173.
호칭을 달리했다고 하여 크게 바뀌는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루베르가 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웨슬리 때문에 나를 멀리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차라리 다행인 일이다. 그런 핑계라도 없었다면 아이 곁에 붙어 있을 수 없었을 테지.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쓰여 안달이 났다.
신년제는 보름 동안 이어지는 행사였다. 새해 첫 해가 높게 떠서 사방이 환해지고 나서야 하나둘 잠을 청하러 방에 들어가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미리 루베르가 방을 마련해 준 덕분에 멀리 떨어진 객들의 숙소까지 찾아갈 필요가 없어 좋았다.
“여기에서 쉬면 돼. 시종이 필요하면 여기 이 줄을 당기고⋯.”
“혹시, 마리앤의 거처도 이 근처입니까?”
“어⋯. 아니, 여기는 서편이고⋯. 필로덴도르 영애는 동편에⋯. 그, 제니. 그 영애랑 방을 함께 쓸 수 있도록 하느라고. 그쪽에 두었어. 시종에게 명해두었으니 쉽게 방을 찾을 수 있었을 거야.”
“아하.”
하긴 남녀가 유별하니 숙소를 가까이 둘 필요는 없었다. 현명한 처사라 여겨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잘하셨습니다. 선배는⋯. 아니, 루벤의 방은요?”
“⋯여기, 바로 옆에⋯. 왼쪽에.”
“흠.”
이것도 무척 만족스러웠다.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을 보고 루베르가 까닭을 물었다. 말해도 되는 것인가 싶었으나, 이미 몇 번이나 웨슬리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 나였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겠지 싶어 입을 열었다.
“그저 마음이 불안하여 그렇습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제 방으로 오세요.”
“⋯응. 그럴게. 아니, 별일 없을 테지만⋯.”
“압니다. 그래도요.”
“⋯으응.”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그래, 바로 옆 방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도 금방 대처할 수 있을 테니 안심이었다. 평소 사용하던 장검을 들고 오지는 못했으나, 비도 한 자루 숨겨 온 것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럼 잘 자고 낮에 보자 몇 번이나 인사를 하고 아이를 들여보낸 뒤에 나도 방에 들었다.
화려하고 꾸밈새 좋은 방이었다. 충분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응접실 테이블 가운데에 놓여 있는 다식을 보고 짧게 웃었다.
침실로 들어가는 대신에, 응접실 한가운데 털퍼덕 앉았다. 도톰한 카페트가 깔려있어 바닥이 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양손을 무릎에 얹었다.
운기조식으로 피로를 날려두고, 심신을 예리하게 갈고 닦을 속셈이었다. 적을 가까이에 두고 방심하고 싶지 않았다. 몸을 최상의 상태로 끌어올려 둘 필요가 있었다.
* * *
황궁의 신년제는 또래 영식과 영애들을 모두 모아두는 자리였다.
루베르가 황족의 책임으로 무도회 한켠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동안 나 또한 메인홀에 나와 있었다.
내가 아직 기사 작위를 받지 못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걱정이었으나 루베르와 루실라의 자리가 가까이 있고, 리차드와 웨슬리는 건너편 자리에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 참았다.
하긴, 참지 못하면 내가 어쩌겠는가.
심증은 있되 물증이 없었다. 당장 덤벼도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무작정 뛰어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적당히 벽과 가까운 자리에 서 있으면 춤을 추지 않아도 된다 하기에, 벽 근처에 서서 가만히 주변을 살폈다.
내가 홀로 있는 것이 신경 쓰인다며 마리앤과 제니가 내 곁에서 재잘거리며 귀염을 떨었다. 괜찮으니 혼자 있게 두어라 했는데도 아이들이 먹을 것을 챙겨 와서 이것도 먹어 보아라, 저것도 먹어 보아라 들이대어 결국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글로틴 테너. 그놈이 희게 질린 낯으로 이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데미는 휴학했다고 하더니 이런 자리에는 어찌 잘도 찾아 왔다. 마뜩잖아 혀를 차고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올리버 컴바인 그놈은 보이지 않았다.
마리앤이 괜한 신경을 쓸까 걱정이 되어 몸으로 그의 시선을 막았다.
“이거 정말 맛있죠!”
“예. 정신이 번쩍 드네요.”
“그렇다니까요. 신년제엔 이게 좋아요. 황궁 디저트를 맘껏 맛볼 수 있다니, 여기가 여신님 곁인가 봐.”
“그, 신은 총 아홉이 있다면서 왜 매번 찾는 건 여신님입니까?”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인 것처럼, 마리앤과 제니가 시선을 서로 맞대더니 까르르 웃었다.
“그러게요? 어어. 너무 당연하게 여신님을 찾았네. 왜지?”
“아무래도 아홉 번째 신이 남자로 표현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다른 신 중 누구라도 좋으니 아홉 번째 신은 말고 다른 신이 도와주세요, 하는 느낌으로?”
“전 그냥 두 글자라서 그런 거 같아요. 신님! 하는 것보다 여신님! 하는 게 더⋯ 뭔가 발음이 좋아요. 여, 하고 입을 벌리고, 신, 하고 입을 닫는 그 간극이.”
“⋯와, 이렇게 들으니까 이상한 기분인데요. 시학 배울 때나 이런 말 들었던 것도 같고⋯.”
아이들이 저들끼리 재잘거리는 사이, 슬쩍 돌아보았다. 밝은 머리칼을 지닌 탓에 어디서든 쉽게 눈에 띄는 글로틴 테너였다. 휘 둘러보는 시선에 그 머리 색이 걸리지 않았다.
다시 적당히 벽을 등지고 서서 루베르 쪽을 건너다보았다.
당연한 일처럼 눈이 마주쳤다. 루베르가 먼저 눈인사를 건네기에 나도 웃었다.
“그러고 보니 미카엘, 조금 전에 황자님을 애칭으로 부르지 않았어요?”
마리앤이 내 시선이 닿은 곳을 한 번 보더니 내 소매를 죽 잡아당기며 물었다. 숨기려는 생각도 없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랬죠.”
“아, 역시! ⋯혹시 고백받았어요?”
“예? 아닙니다.”
“네엑? 왜요? 일부러 자리도 피해줬는데!”
“선배는 황제가 될 사람 아닙니까. 뭐 후사 문제도 있을 테고⋯. 서로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서운할 사람이 누군데, 제가 더 서운한 표정을 하나. 시무룩해진 마리앤과 제니의 낯을 보고 소리 내어 하하 웃었다.
그래, 일부러 마음을 써서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라고.
루베르와 함께 보낸 새벽이 마음에 가득 들어차도록 무척 좋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늦게라도 감사 인사를 했다.
“그래도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내긴 했습니다. 고마워요, 마리앤.”
“아니, 진짜⋯. 내가 이런 촉이 틀려 본 적이 없는데.”
“세상 살다 보면 원래 별일이 다 있는 법입니다.”
적당히 타이르고 있자니 제니가 슬쩍,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카엘은⋯ 그래도 괜찮아요?”
“예? 무엇이.”
“아니⋯. 지금 황자님들이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거요. 황자비를 구하기 위해서 살펴 보는자리잖아요. 1황자님이야 이제 둘 중의 하나로 상대가 좁혀졌다고 해도, 2황자님은 아직이니까⋯.”
“⋯좋은 짝을 찾으면, 좋지요.”
나는 내 목소리가 잠겨 든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마리앤이 제니의 옆구리를 꼬집는 것을 보면서 허허 웃었다.
그래, 서로 그럴 마음이 없었다. 루베르도 내게 더 이상 달라붙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괜히 아이를 데려다 노는 일은 없어야 했다.
다시 루베르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눈짓으로 피곤한 척하는 것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실없이 웃으며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루베르의 말간 낯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으로만 옆에 선 여아들을 상대하였다.
“그래도 지켜주고 싶기는 합니다.”
“⋯공주님과 호위기사처럼요?”
“말하자면 왕자겠지만⋯. 아무래도 루벤이 낯을 많이 가리는 놈이라 신경이 쓰여서요.”
“그렇구나아⋯. 신경이 쓰이는구나아아아.”
“예.”
왜 말을 저렇게 질질 늘여 끄는가? 의아하여 보자 마리앤이 냉큼 내 입에 다시 과자 하나를 물렸다. 순순히 받아 우물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여간 이 녀석이 수선을 부리는 일이 어디 하루 이틀이었던가.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겨 웃어넘기고 말았다.
다 같이 춤을 추는 시간이 끝나고, 루베르도 제 방으로 돌아간다며 자리를 비웠다.
뒤따를까 고민하다가 다른 아해들이 우르르 몰려와 이제부터 진짜 데뷔탕트의 시작이라며 나를 끌고 가기에 순순히 응했다.
신년제의 보름 동안 춤추고 먹고 마시고 사람을 사귀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여러 번 들어 알고 있었다.
춤을 추고 식사를 했으니 사람을 만나자는 소리겠지.
쉐이든과 데미안의 주도로 벌어진 큰 잔치판에 끼어들어 앉았다. 계절에 맞지 않게 화려한 꽃과 마법석으로 잔뜩 치장이 된 너른 정원에, 한 번에 서너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테이블 수십이 넓직한 사이를 두고 놓여 있었다.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 간간이 자리를 맞바꾸며, 이런저런 환담을 나누는 자리였다. 낯익은 얼굴과 낯선 얼굴들이 저들끼리 모여 낮은 목소리로 사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쉐이든이 곁에서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굳이 이름을 다 외울 필요는 없어. 그냥 마음에 들거나, 친해지고 싶은 상대가 있으면 나중에 적당히 말해 줘.”
“⋯친해지고 싶은 상대라면.”
“지금 이건 말하자면⋯ 봄의 춤곡과 여름의 춤곡 같은 자리거든. 서로 낯선 사람들끼리 인사를 하고 안면을 익히는 자리야. 닷새 뒤 진짜 티타임에 초대해서 어울릴 사람들을 보통 여기서 찾고는 해.”
“진짜 티타임?”
“응. 뭐, 사업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그냥 친해지고 싶은 사람도 있을 거고. 느낌이 좋다든가, 말을 잘한다든가, 재치가 있다든가⋯. 그냥, 그렇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도와줄게.”
어안이 벙벙해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내 맞은편에 앉은 여아들이 지나치게 수줍어하는 기색을 보고 헛웃음이 터졌다.
그러니까 지금 이 어린 것들을 내 상대로 점찍어두고⋯. 선을 보는 것인가?
그 누구도 마음에 찰 리 없었으나, 처음 사교계에 나와 기대에 찬 아해들에게 야멸차게 굴 필요 또한 없었다. 자꾸만 얼척이 없어 헛숨이 새었으나 묻는 것에는 잘 답해 주었다.
내 앞에 소녀들만 앉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에른하르트가의 소식이 궁금한 소년들도 앉았다 일어나는 일이 더러 있었다.
대부분은 좋아하는 음식이나 동물 따위를 물었으나, 몇몇 놈들은 제가 검을 쓰는데 경지를 어찌 올리면 좋을지 모르겠다 따위를 물어오기도 했다. 그럴 적에는 보다 상세히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즈음 해서는 그저 어린 아해들과 어울려 이런저런 소식을 듣고 말하는 것이 나쁘지 않게 여겨졌다.
이 또한 아카데미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낯선 이들과 식사를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제법 익숙해진 일이었다. 이들 사이에 거스러미 없이 섞여들 수 있어 뿌듯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해가 지고 사위가 어두워지자 하나둘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기에, 나 또한 이만 들어가 쉬겠다 친한 동무들에게 일러두고 자리를 떴다.
별일 없이 어제 루베르가 일러준 내 몫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익숙한 놈이 응접실 소파에 앉아 이쪽을 바로 보고 있었다. 또다시 헛숨이 샜다. 할 말을 잃고 가만히 보았다.
“⋯왜 여기 계십니까?”
루베르, 그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