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72)화 (172/176)

172.

네 개의 춤곡이 모두 끝나자, 지친 아이들이 저마다 흩어졌다.

이제야 동무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어울려 춤을 추고 노느라 숨이 가빠 색색거리는 아해들을 마주하니 그제야 웃음이 나왔다.

동무들 사이에 나를 두고 혼자 멀어지려는 루베르의 손목을 잡아채 곁에 머무르게 했다.

“⋯에른하르트, 영식?”

“선배도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같이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럴까.”

웨슬리 키아드리스가 돌아다니는 곳에 루베르 혼자 놓아두기가 불안했다. 루베르 이 아이는 따로 가까운 친우도 없으니 내 곁에 묶어두어도 괜찮을 테지.

이런 일에 늘 앞장서서 아이들 사이를 어르는 쉐이든과 데미안이 냉큼 루베르가 있을 자리를 터 주었다.

처음에야 어색하게 인사했으나, 어린 것들은 모아두면 금세 친해지기 마련이었다. 금방 마음을 터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잘거렸다.

화려하고 멋진 옷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저마다 지난 시험 기간 이야기와 새로이 사귀게 된 동무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런저런 사교계 가십의 대부분은 내가 모르는 이들의 이야기였으나, 간간이 동무들의 이야기가 섞여 있어 들을 만했다.

벤자민이 배가 고프지 않느냐 하고 이야기를 꺼내어, 다 함께 어울려 식사도 했다.

메인홀에서는 여전히 아이들이 춤을 즐겼다. 반 층 높이 올라가 홀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는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여럿 마련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자리에 둘러앉아 음식을 주문하여 먹고 마셨다.

시험이 끝나 아이들끼리 늘 향하던 식당에 다니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마다 방학 기간 동안 해야 할 일과 다음 학기의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나 또한 다음 학기에는 이렇게 하기로 했다 하고 말을 꺼냈다.

“예에? 3학년이 되면 일반 수업은 거의 안 들을 거라고요?”

“예. 빠르게 경지를 올리는 데 집중할 생각입니다. 미리 수업을 많이 들어 둔 덕에 그래도 졸업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수업을 좀 더 많이 들어둘 걸 그랬습니다.”

“하긴, 미카엘은 조기 졸업을 할 것도 아니면서 수업을 엄청 듣기는 했죠. 와⋯. 그래도 개인 교습이라니.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역시 그 내공심법 덕분인가요?”

“뭐, 그것도. 졸업 전에는 해결해 두어야 할 문제니까요.”

마엘로 샌슨과 더글라스 머스탱이 나를 교육하는 데 쓰는 시간은 많았으나, 내가 얻을 수 있는 학점은 한정되어 있었다. 아카데미의 학점제도가 공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한 번에 많은 학점을 가져갈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내 수업에 끼어 함께 수업을 듣겠다 말하지 못하는 벤자민이 서운한 기색을 보였으나, 내가 도울 수 없는 일이라 굳이 입 대지 않았다.

점원이 내온 음료 중에서 포도 음료의 병에 에른하르트의 인장이 박혀 있어 묘한 감상에 젖기도 했다.

“올해에는 성공했네. 어쩐지 맛이 좋더라니.”

“올해에는?”

“매해 신년제 무도회, 그러니까 데뷔탕트에 올라오는 음료는 제국에서 가장 최고등급으로 쳐 주거든.”

“에른하르트 지역의 포도의 품질이야 유명하지만, 에른하르트 백작님과 소백작님 모두 공격적으로 수도까지 영지에서 생산한 물건들을 판매하는 일이 없어 지금껏 황궁 신년제에서 에른하르트산 포도를 볼 수 없었습니다. 올해엔 아무래도 미카엘의 데뷔탕트가 있으니 신경을 좀 쓰신 것 같아요.”

쉐이든과 데미안의 설명에 괜히 포도 음료를 한 잔 더 청해 마셨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동무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루베르는 계속 잔잔한 미소를 띠고 몇 마디 추임새만 거들며 별말을 하지 않았다.

자리가 어색한 것인가, 아니면 피곤한 것인가. 신경이 쓰여 루베르를 슬쩍 건너보았더니 마리앤이 냉큼 입을 열었다.

“황자님 피곤해 보이시는데, 미카엘이 휴게실에 좀 모셔다드리지 그래요?”

“음?”

“해가 뜨는 것을 보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요. 좀 쉬다 와요.”

“그래요. 새로운 태양을 보려면 아직 멀었잖아요.”

마리앤의 방긋방긋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그득 스민 것을 눈치챘다. 허. 무엇을 알고 놀리나 싶어 입을 열려던 찰나에, 루베르가 의자를 뒤로 끌며 사양했다.

“아니, 아니야. 나 혼자 갈게.”

“같이 가지요.”

루베르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 데리고 온 것인데, 이제 와서 혼자 떠나보낼 리 없었다. 냅킨으로 가볍게 입술을 눌러 닦은 뒤 몸을 일으켰다. 휴게실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길은 루베르가 잘 알 터이니 괜찮겠지 싶었다.

마리앤이 배시시 웃으며 자꾸만 수상하게 눈짓하는 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루베르가 미리 내 파트너에게 이야기해 두었으니 괜찮다, 하는 투로 말하며 춤을 청하지 않았던가. 이 아이들이 무슨 귀여운 수작을 부린 것인가 싶다가도, 기꺼워 웃고 말았다.

루베르와 둘이 쉬겠다고 휴게실에 들어앉았다.

아이들과 있을 적에는 말 한마디 쉬이 하는 법이 없더니, 둘이 있으니 금방 입을 열어 재잘거리는 루베르를 보니 데운 돌을 품은 것처럼 가슴이 뜨끈해졌다.

역시 낯을 가린 게지. 사내가 이렇게 수줍고 귀여워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새침한 모습도 좋게 보는 이들이 많다 하니 다행스러웠다.

휴게실에 마주 앉아 차 한 잔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머릿속에 스친 것이 있었다.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곳이었으나, 황궁에서는 벽에 달린 귀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은 전생에도 현생에도 익히 들었다.

루베르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파드득 놀라는 루베르의 어깨를 잡아 누르며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일전에, 늑대 사건 때.”

“⋯어? 어어, 어⋯.”

“웨슬리 키아드리스가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다고 하신 적이 있지요?”

“읍, 응. 으응⋯. 그랬었, 그랬었지.”

“웨슬리는 1황자의 수족인데, 왜 굳이 유일 산맥 최전선까지 나갔습니까?”

“⋯그야, 그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고⋯.”

당혹한 루베르가 제대로 생각지 못하는 것 같아, 쥔 어깨를 몇 번 주물러주어 긴장을 풀어라 달랬다. 얌전히 앉은 아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이어 말했다.

“유일 산맥의 몬스터가 그렇게 세가 크고 강력한데, 왜 지금 그가 여기에 있겠습니까?”

“⋯그렇게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 나도⋯. 좀 더 알아볼게.”

“그래요.”

루베르가 깊은 눈을 한 것을 보고 안심했다.

루베르는 현명한 아이였다. 그 손에 쥔 것이 많으니, 화두를 던져두면 알아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으리라. 나는 내 육감을 믿었다. 그는 위험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루베르를 두고서도 안심하기 위해서는, 루베르가 웨슬리를 충분히 경계하고 있어야만 했다.

곰곰 생각에 잠겨있던 루베르가 입을 열었다.

“아마 지금은, 그⋯ 여동생을 리차드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온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포플라 키아드리스를?”

“으응. 나는 그렇게만 알고 있었어. 옐디더스 공작가와 리차드 형의 혼인을 가장 반대한 게 웨슬리 키아드리스라고 들었거든. 아마 형이 황제가 되면 키아드리스 공작가가 다른 네 공작가를 발밑에 두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어느 쪽이든 터놓고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서로 속삭이는 목소리가 예민한 귀에도 겨우 걸릴 만큼 작았다. 제대로 경계한다니 되었다. 루베르의 어깨를 두어 차례 도닥여 주다가 아이의 귓불이 발갛게 물든 것을 조금 늦게 알아챘다.

긴장으로 굳었던 몸이 어쩔 수 없이 녹아내렸다.

내 어깨에서 힘이 빠진 것을 나보다 더 먼저 눈치챈 루베르가 어여쁜 아랫입술을 꼭 감쳐 물었다가 빙긋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에 스민 홍조가 거짓인 것처럼 자상한 목소리였다.

“⋯이제, 좀 피곤이 가신 것 같은데. 같이 해 뜨는 거 보러 갈까?”

“⋯예. 그럽시다.”

조용한 곳을 알고 있다며 이끌기에 순순히 계단을 올랐다. 겨우 손끝 하나 잡지 못하고 옷소매 겨우 잡은 녀석의 손짓이 어여뻐 잔기침이 났다. 날이 추워 그러냐 묻기에 고개를 저어 괜찮다 답했다.

데뷔탕트가 이루어지는 오팔 궁의 건물에는 일곱 개의 뿔이 돋아 있었다. 높은 뿔마다 어여쁘게 빚어진 둥그런 지붕을 얹고 있어 장식인가 싶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계단은 귀한 곳에 따로 놓인 것을 이제 알았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마련된 너른 자리의 사방에 태피스트리가 걸려있고, 푹신한 쿠션이 여럿 놓인 널따란 소파가 있어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소파는 창밖을 편히 볼 수 있는 위치와 각도에 놓여 있었는데, 루베르가 손수 커튼을 걷고 너른 창을 활짝 열었다.

마법이 걸린 게지. 찬 바람 한 톨 들어오지 않는 것에 감탄하며 소파에 풀썩 앉았다.

“이런 곳이 있었습니까?”

“응. 어릴 적에⋯ 내가 데뷔탕트에 초대받지 못할 나이일 때에는, 어머니랑, 루실라랑. 여기에서 신년 첫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했어.”

“⋯데뷔탕트 이후로는?”

나는 내가 왜 이런 것을 물었는지 알지 못했다. 루베르는 내 옆자리에 조심히 앉으며 담요를 권했다. 내가 고개를 저어 사양하자, 루베르가 제 무릎에 담요를 덮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메인홀에서 봤지. 여긴 오랜만에 올라와 보네.”

“⋯.”

나는 까만 밤하늘을 닮은 머리칼을 곱게 반만 묶어 늘어트린 아이에게 시선을 두었다. 아이의 희고 곧은 목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시선을 오래 빼앗기고 싶지 않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개의 달이 사이를 멀리 두고 떠 있었고, 수천의 별이 저마다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저 멀리, 궁의 아래쪽에서 고운 음악 소리가 큰 울림통으로 번졌다. 오팔 궁이 하나의 악기가 된 것 같았다. 온몸을 울리는 음악에 잠긴 채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댔다.

구태여 말을 더하지 않았다. 까만 밤하늘이 희끗희끗 밝아지는 것에 가만히 시선을 두었다. 어느새 맑은 해가 솟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시어런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차근차근 하늘을 먼저 밝히고, 붉은 해가 지평선 저 먼 곳에서 머리꼭지를 비추었을 때.

내동 고요하던 루베르가 입을 열었다.

“열다섯 살이 된 걸 축하해, 미카엘.”

“⋯.”

늘 에른하르트 영식, 하고 예의를 갖춰 부르던 놈이었다. 나는 고개를 틀어 루베르의 얼굴을 보았다. 갓 난 햇빛을 받아 진주 가루를 뿌린 듯 곱게 빛나는 얼굴을 한 아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예. 성년이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선배.”

“⋯난 이제 곧 졸업하니까, 선배가 아니지 않아⋯?”

“그러면요.”

루베르가 고운 입술을 한 번 감싸 물었다. 나는 손끝이 움찔했으나, 굳이 그 입술에 손을 대는 겸연쩍은 짓을 하지 않았다. 어쩐지 숨이 찼다.

“⋯이제 이름으로 불러 줘.”

“그래요, 루베르.”

“⋯루벤.”

“⋯그래요, 루벤.”

애칭을 허락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순순히 대답하자 아이가 고운 눈을 깜박이더니 소파에 푹 몸을 묻고 다리를 올려 웅크렸다.

여전히 루베르와 내 사이에는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저도 편히 부르셔도 좋습니다.”

“⋯미카?”

“예, 그렇게.”

다른 동무들도 몇이나 불러대는 애칭이었다. 구태여 아낄 이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목이 말랐다.

음료를 가지러 내려갔다 올라오는 시간이 아까워 한참을 목마른 채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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