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71)화 (171/176)

171.

다음 날 새벽. 훈련을 하기 위해 아카데미 연무장에 나온 마리앤을 잡아다가 타운하우스로 끌고 왔다.

얼결에 훈련복을 입은 채 내 모친의 앞에 선 마리앤이 나를 죽일 듯 노려보았으나 나도 별수 없어 모른 체했다.

그리고 모친의 설명을 들은 마리앤은 그녀답지 않게 뺨을 붉히며 몇 번이나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에른하르트 백작 부인. 저는 그냥, 그냥 미카엘의 친구일 뿐인데도요.”

“알아요. 필로덴도르 영애는 제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고, 함께 유일 산맥에 오를 든든한 동지라고 들었어요.”

“네에? 그건, 그거야⋯맞지만⋯.”

마리앤이 흘긋 다시 나를 보았다. 정말 저렇게 말했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시시비비를 가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잔뜩 혼쭐이 난 내가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입이 있어도 답할 길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받아도 돼요. 내 아들의 데뷔탕트를 도와주는 영애에게 감사 인사는 하게 해 주세요.”

“⋯네에, 백작 부인.”

공손하고 수줍게 읍한 마리앤은 모친의 투왈렛으로 끌려가기 전에 내 팔뚝을 야무지게 잡아 비틀었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마음은 괴로웠다.

마리앤의 옷을 마련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들다 보니 아카데미 기숙사를 오가는 일이 불편해졌다. 모친이 데뷔탕트까지 발렌티아 타운하우스에 마리앤의 방을 마련해주었다.

옷을 짓고 남는 시간마다 마리앤을 불러다가 연무장에서 훈련을 시키다 보니, 아이를 가까이에 두는 것이 편하기도 했다.

미하엘과 아스델은 마리앤이 보여주는 마법 시연을 무척 좋아했다. 내가 보기에도 신기한데, 이 어린 아해들이 보면 얼마나 재미있고 좋을까 싶어 말리지 않았다.

새로 지은 옷을 입어보고, 체력 단련을 하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보석을 걸쳐보고, 체력 단련을 하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다시 옷을 입어보고, 체력 단련을 하고,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로 연말이 꽉 찼다.

그리하여 한 해의 마지막 날 아침.

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빛이 나도록 꾸민 마리앤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연푸른색 비단에 옅은 분홍빛 실로 자수를 놓은 옷을 입은 나와, 옅은 분홍빛 옷감에 짙은 보랏빛 자수와 레이스를 덧댄 드레스를 입은 마리앤은 나란히 놓아두면 꼭 남매처럼 보였다.

처음에야 당황하며 이리저리 끌려다녔지만, 나중에는 까르르 웃으며 내 모친과 잘 어울려 레이스와 프릴 따위를 구경하며 눈을 빛내던 녀석이었다.

내 손을 놓고 치마를 정돈하며 자리에 앉은 마리앤이 높은 웃음소리를 방울처럼 터트렸다. 난데없이 한참을 웃더니 겨우 입을 열어 하는 말이 또 우스웠다.

“꼭 공주님이 된 기분이에요.”

“⋯진짜 공주인 루실라 황녀는 무척 괄괄한 성격인데도?”

“그것도 포함해서요. 완전 공주가 따로 없네, 나.”

새침한 대답에 나도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이랴 소리도 없이 마차가 황궁을 향해 달렸다. 양옆으로 활짝 열려 있는 황궁의 거대한 문 사이로 엇비슷한 크기의 마차들이 어깨를 견주어 달렸다. 무척 장관이었다.

* * *

들어선 홀은 거대하고 웅장하고 화려했다. 벽에 어찌 저렇게 커다란 부조를 달아 두었을까. 빛나는 것들에 시선을 빼앗겨 여기저기 돌아보다가, 나와 마리앤에게 몰린 시선을 눈치채고 앞을 바로 보았다.

또래의 동량지재들이 저마다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느린 악곡에 맞추어 살랑이고 있었다.

멀찍한 곳에 먼저 온 동무들이 나를 눈치채고 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인사하는 것을 보았다. 그쪽으로 다가서려 하였더니, 마리앤이 내 손을 놓고 어깨를 가볍게 떠밀었다.

“미카엘은 저쪽으로 가야죠.”

“지금?”

“네, 이제 한 이십 분만 있어도 봄의 춤곡이 시작될 테니까, 미카엘은 홀에 있어야 해요. 저기 보이죠? 남자애들 한 줄로 서 있는 거.”

앳된 얼굴의 소년 소녀가 긴장된 얼굴을 하고 홀의 가운데를 비워둔 채, 양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금방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미리 데뷔탕트를 겪어 본 놈을 옆에 끼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잘 놀고 와요.”

“예.”

순순히 마리앤이 짚어 준 쪽으로 향했다. 적당히 빈 자리에 서자, 긴장한 얼굴의 아이들 몇이 고개와 무릎을 살짝 숙여 인사했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고 앞을 보았다.

얼마간 기다리자, 익숙한 전주가 시작되었다.

여아들이 먼저 홀로 나서서 빙글 돌면, 남아들이 뒤따라 나가 춤을 권했다. 남아와 여아의 수가 맞지 않아 어찌하나 싶었는데, 지켜보고 있던 녀석들 몇이 뛰어 들어와 짝을 맞춰 주었다. 춤 솜씨나 웃는 태도를 보니 올해 데뷔하는 놈들은 아닌 것 같았다.

뛰어 들어온 아이들이 많아 또 수가 맞지 않으면 다른 녀석들이 한둘 끼어들어 함께 봄의 춤곡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얼결에 선배와 손을 맞잡게 된 아이들이 수줍게 웃으며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문화였다.

나 또한 내 손끝을 가볍게 쥔 아해에게 공손히 읍하여 인사하고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이들이 동시에 음악에 맞추어 같은 걸음으로 걸으니, 무척 장관이었다.

세 호흡이 지나면 다른 아이가 내 손을 잡게 되어 있었다.

봄의 춤곡과 여름의 춤곡은 낯선 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춤이었다. 수없이 많은 상대가 바뀌었다. 손끝이나 겨우 스치는 정도의 춤이라 어색할 일은 없었다.

그저 마주 보았다가, 여러 걸음을 걷고, 서로 등을 보였다가, 빙글 도는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보고 다음 아이의 손을 잡았다.

봄의 춤곡을 연주하는 동안 수줍게 움츠렸던 아이들도 여름의 춤곡이 시작될 즈음해서는 환하게 웃으며 날아오를 듯 춤을 추었다. 몇몇 아해가 실수를 했지만, 그 파트너가 바로 잡아 주어 금방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모친이 우리 혈족 중에 춤을 싫어하는 이가 없다고 했었지.

이제 이해했다.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즐거웠다. 몸에 닿는 시선이야 익숙하여 어색할 것도 없었다. 같은 박자에 손뼉을 치고 마주 보는 아해들의 면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노랫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콰앙, 웅장하게 악기를 내려치는 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곡조는 보다 달콤하고 보다 은밀하다. 가을 춤곡이었다. 지금껏 웃는 낯으로 이 춤판을 지켜보던 아이들이 와르르 홀로 쏟아져 나왔다.

홀로 나온 녀석들이 서로서로 춤을 청했다. 일부는 수줍어 홀의 외곽으로 달아나기도 했다. 친한 동무의 손을 잡는 아해들도 있었다.

재미야 있었지만 아이들 틈에서 더 어울리기 겸연쩍어 나도 몸을 빼려는데, 내 손을 잡아 오는 놈이 있었다.

“⋯선배?”

“네 파트너에게 허락받고 왔어, 걱정 마.”

귓가에 내려앉는 다정한 목소리가 익숙했다. 루베르 그 녀석이었다.

옆을 돌아보자 제니의 손을 잡고 선 마리앤이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잔망을 떨었다.

내가 혹시 루베르에게 폐가 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어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남아끼리, 여아끼리 손을 잡은 이들이 몇 보였다. 얼핏 보기에도 가까운 친구들끼리 손을 맞잡은 것을 눈치채고 그제야 안심했다.

루베르의 허리 뒤 옴폭한 자리에 엄지 바깥쪽을 대어 떠받쳤다. 그래도 내내 함께 연습한 상대라, 춤곡이 시작되자마자 함께 걸음을 옮기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아이의 무릎 바깥쪽에 내 무릎 바깥쪽이 스치듯 걸었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연습 때보다 몸이 조금 더 가까웠다.

내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들자마자 눈과 눈이 얽혔다. 나도 모르게 열린 입이 또다시 이유를 찾았다.

“왜요.”

“⋯아니, 그냥⋯. 좋아서.”

무엇이?

큰 북이 둥둥거리는 소리와 관악기가 요요한 소리를 휘파람처럼 불어대는 사이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섞여들었다. 나는 루베르가 몸을 한 바퀴 돌리는 것을 도왔다.

아이들이 그를 보고 웃는 것처럼 여겨져 마음이 쓰였다.

가을 춤곡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화려한 춤이라 동작이 크고 시원시원했다. 서로의 거리를 벌렸다가도 품에 뛰어들 것처럼 가까이 끌려오는 루베르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까닭도 모르고 민망했다.

은은한 곡조의 겨울 춤곡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그만두고 홀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루베르를 보고 한숨을 씹어 삼켰다. 순순히 아이가 이끄는 방향으로 걸었다.

그때.

날카로운 감각이 등골을 스쳤다. 시선이 빠르게 돌아갔다.

한켠에 서 있는 두 청년이 시야에 들어왔다. 샹들리에처럼 반짝이는 금빛 머리터럭을 가진 흰 옷차림을 한 놈과, 연한 보라색의 머리칼을 잘 빗어 틀어 올린 검은 옷의 사내.

화경의 무인이다.

서늘한 살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루베르가 이끄는 대로 걸으며 그의 어깨에 내 표정을 숨겼다. 내 손에 걸린 아이의 허리를 바투 끌어안게 되었다. 당황한 아이가 내 어깨를 잡아 떠미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제 새끼를 맹수의 시선에서 숨기는 어미처럼 굴고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왜, 왜 그래?”

“아닙니다. 누가 보기에.”

“⋯어?”

당황한 루베르를 다시 바른 자세로 붙잡고, 익숙한 곡조에 따라 함께 거닐었다. 방금 전까지 술렁이던 가슴 속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이 서 있는 방향을 다시 흘긋 보았다.

“저자가, 웨슬리 키아드리스입니까?”

“아, 응. ⋯형이랑 같이 왔네.”

나는 사람을 참 많이 죽인 놈이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품는 살의와 살기는 수십 년이 지나도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속이 끓었다.

리차드는 몰라도 웨슬리 키아드리스는 루베르 이 아이를 온전히 둘 생각이 없다. 지금 당장은 손대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그럴 것이다.

내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자, 루베르가 내 귓가에 입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그만할까?”

“아뇨, 아닙니다. 그저 호기심이 일었을 뿐입니다.”

루베르가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아이의 등을 가만히 도닥여 얼러주었다. 춤곡이 끝나갈 무렵에는 지쳐 호흡을 고르느라 우리처럼 서로 몸을 떠받치고 서 있는 아해들이 종종 보였기에 거리끼지 않았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웨슬리 키아드리스였다. 그가 리차드의 귓가에 나직하게 무어라 속삭이자, 두 청년 모두 자리를 옮겼다. 나를 보러 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웨슬리가 나를 어찌 평가했을지가 궁금했다.

천재의 눈에, 제 아이를 지키겠다 감싸 안은 범재가 어찌 보였을까.

이리저리 노닐고 다니느라 내 훈련에 소홀했던 것이 새삼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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