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시어런 제국에서는 보통 서재를 어둑하게 꾸몄다. 창에는 짙고 두꺼운 커튼을 걸어 두고, 색 짙은 유약을 몇 차례나 바른 크고 깊은 책장에 약간의 여유를 두고 책을 꽂아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루베르의 서재도 그와 같았다.
따스하고 포근한 실내에 책 냄새가 스며 있었다. 나는 루베르가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바투 선 게 아닌데도 아이의 호흡이 가까이 들렸다. 서재 안이 조용한 탓이다. 까만 눈이 나를 직시했다.
“그래서, 뭐가 가장 궁금해? 그것부터 얘기해줄게.”
“선배가⋯. 관리감찰 부서와 가까운 사이인지가 궁금합니다.”
“그게⋯.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데⋯. 정확히 말하면 귀족 연감 관리감찰 부서는 나보다는 아버지의 것이거든.”
“황제 폐하의?”
“그래. 아무래도 그렇잖아. 모든 귀족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은 황제의 일이니까⋯.”
루베르 홀로 쓰는 서재여서 그런지, 의자는 하나뿐이었다. 책상에 기대어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까만 시선을 바로 보았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선배는 그것이 옳다고 봅니까?”
“⋯.”
대답이 곧장 돌아오지 않았다. 아차 싶었다. 나도 모르게 따져 묻듯 입을 연 것이 아닌가 하여 목을 가다듬었다.
그 다음번에 묻는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다정하게 들렸다.
“제가 몰라서 묻는 말입니다.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라,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어려워 마음을 정할 수 없습니다. 선배는 그에 대해 더 많이 접하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예전에, 네가 내게 그런 말을 해 줬었지. 어떤 새는 먹이를 잡기 위해 산에 불을 지른다고.”
“⋯.”
“황제는 불이 멀리 번지지 않게 하는 사람이야. 어떤 새가 불을 질러도, 그 옆의 나무와 풀꽃이 상하지 않도록 돌봐야 하는 것이 황제의 의무라고 생각해. 그들은⋯. 물론, 완전히 옳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모르는 연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입 밖에 낸 소리였다. 서늘하게 가슴 한켠이 가라앉았다. 어떤 새가 불을 질러도⋯. 어쩐지 그 말을 오래 곱씹게 되었다.
어둑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서재 한 켠, 널따란 책장 앞에 선 루베르가 책장 아래 놓인 금고에 손을 댔다.
달칵,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금고에서 나온 것은 까만 장정의 책이었다. 겉면에는 음각으로 네 자리 숫자만 적혀 있었다. 아이는 책장을 더듬어 다른 책 한 권을 꺼내 놓았다. 이번엔 나도 익히 보아 아는 표지를 달고 있었다.
“이게 아카데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귀족 연감이지. 그리고, 여기 이건⋯ 황궁에서만, 황제만 볼 수 있는 귀족 연감이야. 매해 단 한 권만 만들어지는 것인데⋯.”
“⋯.”
“이건 아버지가 나와 리차드 형에게 각기 한 권씩 사본을 만들어서 선물해 주신 거야. 20년 전 귀족 연감의 사본이고.”
“20년 전이면 혹시.”
“맞아, 리차드 형이 태어난 해야.”
리차드 플로 시어런이 태어난 해의 일을 기록한 것을, 구태여 아들들에게 알려 주고자 하였다고.
나는 황제의 의도를 바로 읽지 못하여 장정에 손을 대지 않았다.
루베르는 처연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책상을 짚고, 내게 가까이 다가섰다.
“리차드 형이 아버지의 자식이 맞다는 증거가 이 안에 있어. 형과 나는 공정한 선에 서 있고, 형이 어머니를 일찍 잃은 것뿐이니까⋯. 아버지의 사후에도 그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내게도 주신 거지.”
“그건.”
“난 이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황제를 위한 귀족 연감은 한 해 단 한 부만 만들어져. 하지만, 그걸 만든 사람은 몇일까? 수십? 수백? 수천? 나는 그들의 눈을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이야.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사실은.”
루베르는 깊게 심호흡했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를 공정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줘.”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가슴 깊이 스몄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아이의 입술이 달싹이는 모습을 멀거니 보고 있었다.
사실은 중원에서도 이런 식으로, 보이지 않은 다툼을 하던 이들이 있었을까. 그들은 얼마나 공정하고 정당한 방식을 사용했을까. 중원에서의 내게는 그 어떤 정보도 바로 주어지는 일이 없었다. 나도 모르는 새 내가 무슨 짓을 했을지가 뒤늦게 걱정스러웠다.
막막하고 갑갑하여 숨 한 번 제대로 내쉬지 못하는 내 손등에 온기가 스몄다.
루베르는 내 손등을 차분히 감싸 쥐었다. 그 손이 떨리지 않는 것이 도리어 신경이 쓰였다.
“내가 황제가 되고, 네가 내 곁에 선다면⋯. 너 또한 그들의 보고를 받게 될 거야.”
“⋯.”
“나는, ⋯네게 어떤 것도 숨기고 싶지 않으니까.”
가라앉은 공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폐부가 빠듯하도록 숨을 삼켰다가 내쉬었다.
내가 빚어낸 큰 한숨 소리에 루베르가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는 잡히지 않은 쪽 손을 들어 아이가 입술을 무는 것을 막았다.
손끝에 닿은 턱에는 수염이 없다. 앳된 놈이다. 덜 자란 아해가 속 안에 품고 있는 생각을 조금도 읽어낼 수 없었다.
어려운 일이었다. 시어런이 지금껏 이어져 온 방식이다. 수십 수백 수천 년을, 수십 수백 수천 명이 이어 온 길이었다. 아둔한 내가 옳고 그름을 당장 따져 묻기가 어려웠다.
내게 연금술을 가르친 세드릭 교수는 기록의 중요성에 대하여 꾸준히 여러 번 설파했다. 나는 이제 수십 장의 보고서를 짜임새 있게 구성하여 적을 수 있었다. 나와 같은 이들이 별보다 많이 흩뿌려져 있을 시어런 제국이었다.
날개가 있는 것은 날아오르는 것이 마땅하고, 다리가 있는 것은 뛰어다니는 것이 마땅하다. 글을 자아낼 수 있는 이들이 기록을 하는 것 또한 마땅하다⋯.
그 일부나마 사람들에게 헐어 내어준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생각에 잠겨 대답을 않았더니, 루베르가 다시 시들시들해져서 물었다.
“⋯내게 실망했어?”
“⋯제가 왜?”
“표정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실망이라기보다는⋯.”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내 손은 아이의 턱과 뺨을 쥐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를 알아챈 순간 아이의 가슴팍을 가볍게 떠밀어 거리를 벌렸다.
심장이 작은 북처럼 동동거렸다. 속이 불편했다.
“선배가 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아니, 그건⋯!”
“됐습니다. 듣지 않겠습니다.”
나조차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데, 이 책자 안의 나는 어찌 적혀있을까.
글줄을 외고 따지는 것은 내 일이 아니었다. 늘 그랬다. 내가 루베르 이 아이 하나를 닦달한다고 하여 바뀌는 것은 없을 터였다.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이것을 따져 물어도 되는 위치에 올라야 했다.
황제와 귀족연감, 귀족연감과 황제.
그래서 내가 루베르 이 아이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옅어졌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화경이 되어야 볼 수 있는 세상이 있는 것처럼, 이 아이를 황제로 올린 뒤에 생각을 하는 것이 맞겠다. 그렇게 정하고 나니 더 입 댈 것이 없었다.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이해했으니.”
“⋯응. 아, 그리고⋯. 데뷔탕트 말인데.”
“예.”
“황자의 권한으로, 나와 가까운 이들에게는 데뷔탕트 무도회를 좀 더 편하게 치를 수 있도록 방을 배정해 줄 수 있거든.”
“⋯아.”
“괜찮다면, 내가 너와 필로덴도르 영애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주어도 될까?”
굳이 거절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2황자의 곁에 내가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일 중 하나일 테지.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합시다.”
“으응⋯. 고마워.”
힘이 쪽 빠진 루베르가 바닥에 주저앉으려 하기에 말리고, 그 머리나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었다. 서재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낸 뒤에는 그와 둘이서 화려한 식사를 했다.
성대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는 것까지 예법에 맞는 일이라고 모친이 언질을 해 준 일이 있어, 즐거이 웃는 낯으로 식사를 마친 뒤 타운하우스로 돌아왔다.
결국 루베르의 고집에 밀려 마차 어귀에 실린 언월도를 볼 적마다 입 안이 썼다.
* * *
집에 돌아오자마자 황자와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묻는 양친의 말에 대꾸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벌 받는 것처럼 앉아 편히 언급할 수 있는 말을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것이 있었다.
“아. 이번에 제가 마리앤 필로덴도르 영애를 에스코트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뭐어?”
“그, 대단한 것은 아니고 입장을 같이 하기로만 했습니다.”
“맙소사! 미카엘 에른하르트! 그걸 지금 말하면 어쩌니!”
나는 내 모친이 이렇게 크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여인인 줄 처음 알았다.
어안이 벙벙한 나를 앞에 두고 당장 그 영애를 불러라, 아니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안달복달하는 모친을 앞에 두고 멀뚱히 앉았다.
화요일마다 마리앤의 훈련을 도와준다 말하면서, 혹여 남녀의 정으로 오해받을까 싶어 그 아이가 유일 산맥에 오르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까지 언질해 둔 탓에 더욱 의아했다.
“그것이⋯ 그렇게 큰일입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저 가까운 친우가 좋아하는 이의 얼굴을 보기 민망하다고 하여 자리를 대신 맡아주는 것뿐인데도.”
“하지만, 네 데뷔탕트 파트너잖니!”
“⋯예?”
“이럴 줄 알았으면 네 옷과 그 아가씨의 드레스를 함께 맞췄겠지! 맙소사, 필로덴도르 영애 머리색이 무슨 색이라고? 눈동자 색은? 이제 2주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보라색⋯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하아, 그래도 색이 많이 들뜨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야. 내일 아침에, 그 아가씨를 타운하우스로 데리고 오렴. 나도 장인들을 불러 둘 테니까.”
“아니, 그 아이는 다음 주 화요일에나 만나기로 했는데⋯.”
“그러니 전령이 아니라 너를 보내는 거야.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어도, 시일이 급하니까!”
내가 모르는 일에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넋이 반쯤 나가 고개를 주억였다.
당황한 낯을 숨기지 못하고 옆에 앉은 부친을 보았다. 내심 그는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했으나, 몹시 안쓰러운 것을 보듯이 나를 응시하며 혀를 차는 것을 보고 시선을 떨구었다.
내가 무척 큰 잘못을 한 것을 이제야 알았다.
양친이 쓸 만한 드레스와 보석이 있는지를 찾아보겠다고 자리를 뜨는 것을 본 후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플로이드 왕녀가 데뷔탕트 때에 노란 드레스를 어쩌고 한 것이 몇십 년 전이었더라⋯. 그 이야기를 차분히 설명해 주던 루베르의 낯까지 연이어 떠올라, 내심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런 것을 알았으면 미리 좀 알려주지 않고. 방향 잃은 원망이 삐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