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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69)화 (169/176)

169.

모친이 준비해 준 선물이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귀한 함에 들어 있는 것을 응접실 테이블 위에 얹어 아이 쪽으로 밀었다. 아이가 냉큼 선물을 받아들어 상자를 열었다.

“잊기 전에 먼저 드리겠습니다.”

“아, 이게 답신에 적었던.”

“예. 신의의 선물⋯ 이자 발렌티아와 에른하르트에서 보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은으로 금광석을 이어 붙여 만든 가지 위에 맑은 분홍빛과 보랏빛 보석으로 장식해 둔 브로치였다.

이런저런 귀한 것을 덧붙여둔 귀하고 묵직한 상징물이었다. 은색 가지 위 열매처럼 얹힌 보석들을 차분하게 살펴보던 루베르가 또다시 시들시들하게 웃었다.

“신의의⋯.”

“예. 보여드리면 아실 거라고.”

“⋯응. 정말 고마워. 잘 하고 다닐게.”

“예, 그리고⋯.”

아무래도 기껏 선물을 주겠다 해두고, 부모 친지가 전하는 상징만 가지고 오기 뭐하여 더 챙겨 온 것이 있었다. 시종이 자신이 들겠다 하는 것을 굳이 거절하고 내 손으로 들고 온 것이었다.

응접실 테이블 위에 찬합을 올려두자 루베르의 낯이 희게 질렸다.

“어?”

“이건 제가 드리는 것입니다.”

“이거, 설마, 설마 그거야⋯?”

“예. 전의 것은 다 드실 때가 되었기에.”

끄응, 앓는 소리를 낸 루베르가 양손으로 제 얼굴을 폭 덮어 가렸다.

머리통이 작아 그런가, 손이 커서 그런가. 어여쁜 낯이 눈앞에서 가려지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귀엽고 우습다. 웃음소리를 참지 않았다.

“아니, 그⋯.”

“아직 남으셨습니까?”

“다⋯ 먹었어. 먹었는데⋯. 아니, 도대체⋯.”

“오래 사셔야지요.”

루베르가 손가락 사이로 나를 노려보았다. 앙큼하기도 하지. 내 웃는 얼굴을 본 녀석이 결국 피슬피슬 웃기에, 나 또한 웃음을 참지 않았다.

우리는 마주 보고 한참을 웃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아.

그래, 반가웠다.

지난번에 그리 애틋하게 인사하고 아이를 보낸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목마르게 떠들어대느라 찻주전자를 두 번을 비웠다.

늘 그렇듯 루베르는 이런저런 말을 하며 내게 다식을 챙겨주었고, 나는 또 익숙하게 받았다.

데뷔탕트와 신년제를 준비하는 황궁은 요사이 매일이 소란스럽다고 했다.

황자 황녀의 궁은 그나마 소란에서 벗어나 있으나, 연회가 벌어질 파티홀이 있는 오팔 궁은 태피스트리나 샹들리에뿐만 아니라 창문도 갈고 장식도 바꾸고 한다는 이야기였다.

황궁에서 마주한 루베르는 일전에 춤 연습을 할 때처럼 꾸밈새 좋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엇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는 나는 움직일 적마다 불편하고 갑갑한데, 루베르는 마치 가벼운 깃털을 둘러 입은 듯했다. 팔을 움직이는 모양이나 간간이 다리를 꼬아 앉는 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이런 모습, 이런 의복, 이런 자세가 익숙한 놈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루베르가 긴장한 기색으로 슬쩍 입을 열었다.

“그래서⋯ 혹시, 에스코트할 상대가 있어?”

“예.”

별생각 없이 쉽게 대꾸했다가, 루베르가 흠칫 놀란 것을 알고 재빠르게 뒷말을 이었다.

“마리앤 그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어⋯ 필로덴도르, 영애를? ⋯왜?”

“예. 작년에는 녀석이 글로틴 테너와 함께 들어섰는데, 올해엔 상대가 없는 것이 괴롭다 하여. 별 뜻은 없습니다.”

“아⋯. 그렇구나.”

루베르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손짓에 시선을 두었다. 무인의 손에 끼워진 보석 반지가 빛을 받아 요요한 빛을 흩뿌렸다.

“선배는요.”

“나는, ⋯아직, 아무도.”

“그래요.”

루베르가 어떤 표정으로 대답했는지 궁금했으나, 나는 그 반지에만 시선을 두었다. 내 목에는 녀석이 선물해 준 로켓이 걸려 있었다. 그 로켓에⋯. 저 반지와 같은 색의 보석이 붙어있는 것을 벌써 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목이 탔다.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뵈니 좋습니다.”

“⋯응. 나도.”

“응접실만 구경시켜 주실 겁니까?”

“아, 다른 데도 좀 돌아볼래?”

“예. 선배가 오래 지내셨다고 하니 궁금합니다.”

발렌티아 공작가의 저택도 그리 웅장하고 볼 것이 많았는데, 2황자궁은 얼마나 더 하겠는가. 루베르가 화색을 띠며 몸을 일으키기에 따라 일어섰다.

잠시 고민하던 루베르는 나를 돌아보며 어여쁘게 웃었다.

어쩐지 속이 울렁거려, 한 손으로 내 하관을 쓸어 만지는 척하고 입매를 가렸다.

루베르가 냉큼 물었다.

“무기고부터 볼까?”

“⋯그럽시다.”

아이의 배려를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루베르는 이 큰 궁에 홀로 산다고 했다. 물론 시중드는 이들이야 차고 넘치지만 법도에 따라 황제는 황제의 궁에, 황후는 황후의 궁에, 황자와 황녀는 각자의 궁에 산다고 했다. 궁이 워낙 넓어 약속을 정하지 않고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살 부대끼고 사는 것이 가족이고 혈족일진대, 외롭지는 않으냐 물었더니 아이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어어⋯. 나랑 루실라는 다섯 살 때까지는 황후궁에서 지냈거든. 외롭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음.”

“너무 어렸을 때라 잘 기억이 안 나긴 하는데⋯. 다섯 살 생일파티를 크게 열어서 선물을 잔뜩 받고, 이 궁도 생일선물이라면서 받은 거거든. 내가 황후궁으로 가는 길이 막힌 것도 아니니 새삼 외로울 필요는 없었어.”

악몽을 꾸는 밤에는 어찌 보냈을까. 하릴없이 그런 것이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구김살 없이 다 큰 소년에게 묻기에 좋은 질문이 아니었다.

나란히 무기고를 구경하며 귀한 검과 방패들의 연혁을 들었다. 그중 날이 잘 선 언월도를 닮은 것이 있기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보았더니 또 금방, 이거 줄까? 하고 말을 붙여오기에 웃었다.

“뭘 그리 자꾸 주고 싶어 하십니까?”

“하지만, 에른하르트 영식도 내게 좋은 선물을 해줬잖아.”

“그렇게 싫은 표정으로 노려봤으면서.”

“⋯아니, 그거 말고⋯.”

“말고?”

“⋯그렇지만, 나는 거북이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단 말이야⋯.”

“몸에 좋습니다.”

그 뾰로통한 얼굴이 어찌나 귀여운지, 손끝이 움찔 떨렸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아 눌렀다. 이제 편하고 좋은 아카데미 선후배 관계가 아니니 무례한 일은 그쳐야 했다.

아쉬운 마음을 감추기 위해 아이의 등을 살포시 떠밀어, 언월도가 올려진 장식장 앞에서 벗어났다.

“정원 구경이 하고 싶습니다. 익숙한 것들이 있던데.”

“그럴까? 익숙한 것, 어떤 거?”

“전에 같이 본 사철나무들을 많이 보아서⋯. 원래 좋아하시던 나무입니까?”

아.

⋯루베르의 얼굴에 다시금 홍조가 앉았다. 앗차 싶어 나도 더 묻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정원을 거닐면서 황궁의 정원은 얼마나 크고 아름다울까 상상해 본 일이 있었다.

풍성하고 귀한 것들만 모아 두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으나, 루베르의 정원은 내가 떠올린 그 어느 정원과도 달랐다.

소박하게 느껴지는 사철나무가 품에 여유를 낙낙히 두고 나란히 서 있는데, 그 가지 사이에 들어서면 녹빛 열매가 잘 보였다.

이켠의 가지와 저켠의 가지를 끌어다 묶어 동굴처럼 가꿔 놓은 사이로 마법 등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아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비슷한 길을 수차례 지났다.

사방에 흰 꽃이려니 하고 보았던 것이 모두 꽃이 아니라 식물의 잎이라고 하였다.

“실버 레이스는 사시사철 꽃을 피우는 식물은 아니지만, 잎 자체가 꽃처럼 예뻐서 좋아해.”

“⋯음.”

“예쁘지?”

“예.”

만져보아도 된다 허락하기에 손을 대니 보송보송한 솜털이 나 있었다. 루베르는 그런 나를 보면서, 읊조리듯 재차 속삭였다.

“⋯나는 변하지 않는 것이 좋아.”

사철나무를 이르는 것인지, 이 어여쁜 식물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여 얌전히 있었다. 루베르는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따져 묻지 않았다.

대신에 다정한 목소리로 바닥이 차니 이제 일어나서 걷자, 하고 나를 잡아끌었다.

너른 정원 한켠, 거대한 수목에 그네가 매달려 있었다. 푸른 잎이 흐드러진 아래로 죽 뻗은 그네는 잘 손질되어 있었으나 크기가 작았다.

내가 체구가 큰 편이 아닌데도 겨우 앉겠다 싶어 손으로 길이를 재어보다가, 이런 것을 탈 만한 어린 아이가 있느냐 물었다.

루베르는 조금 민망해하며, 제가 어릴 적에 타던 것이라 알려 주었다.

작고 까만 아이가 발을 굴렀을 그네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웃음이 났다. 그가 그네 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춤을 추는 것도 그리 보기 좋았는데, 그네를 타는 모습도 예쁘고 좋을 테지. 그런 생각에 흐뭇했다.

“왜, 왜 그렇게 웃어⋯?”

“귀여워서요.”

“⋯가끔, 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가 정말 궁금해.”

어떻게 보이기는. 귀엽고, 어여쁘고, 가엾고⋯그리고 또⋯.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다른 것을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응?”

“귀족 연감 관리감찰 부서에 대한 것을요.”

“⋯어어?”

“다른 누구에게 듣기보다 선배에게 듣고 싶습니다.”

“아, 아니⋯. 갑자기?”

루베르는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

시종도 물리고 둘만 나온 산책길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 아이에게 시선을 두었다. 밝게 웃는 낯도 어여쁘지만, 난처하여 양 눈썹을 끌어내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몸속에 호수를 담은 듯했다. 철렁, 파문이 이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괜히 빈 그네를 잡고 흔들며 대답을 기다리다가, 아이가 당황한 것이 생각보다 오래 가기에 설명을 덧댔다.

“제가 윌턴 로버츠 교수에게 영입 제의를 받았습니다.”

“⋯아.”

“그가 말하기를, 제가 그와 같은 입장이 될 것이라 하던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선배가 아니면 그런 말이 나올 길이 없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 그래. 로버츠 교수님을 통해서⋯. 그랬구나.”

어쩐지 루베르가 퍽 안심한 기색으로 웃더니, 하늘을 한 번 보고 큰 한숨을 몰아냈다.

“보여주고 싶은 게 생겼어. 안 그래도 데뷔탕트 전에 이야기해야겠다 싶기는 했는데.”

“어떤 것을?”

“음, 일단 서재로 갈까? 가서 이야기하자.”

“예.”

루베르의 목소리에 스민 위엄이 낯설었다.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정원을 거니는 내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던 것을 이제야 눈치챘다. 루베르의 어깨 어림에서 살랑거리는 머리칼은 여러 차례 공들여 빗은 태가 났다.

마리앤의 목소리를 새삼 떠올렸다. 그가 나를 좋아하는지 여부보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맞다 했던가⋯.

그러나, 내가 그를 은애한다면 또 어쩔 것인가?

루베르는 이미 옳은 길을 찾았다. 괜한 욕심을 갖고 이 여린 아이를 흔들 수는 없었다. 헛기침을 하여 마음을 털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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