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68)화 (168/176)

168.

다음 날 아침, 부친과 모친을 불러두고 루베르의 초대장부터 꺼내 보여주었다.

모친만 불러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둘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게 느껴진 탓이었다.

루베르를 떠올리면 여전히 속이 울렁거리고, 쉼 없이 갈증이 일었다. 내가 하는 모든 판단을 믿을 수가 없으니 혈족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모친은 초대장을 가만히 살펴보더니, 은은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흐으음⋯. 네가 보기에, 2황자는 어떤 사람이니, 미카?”

“⋯성실하고, 귀엽고, 얌전한⋯. 다정한 소년입니다.”

“그래. 그럼 이 티타임은 둘이서만 독대하는 자리일 것 같아?”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 자리에 루실라나 맷 니코가 함께 할까?

아니, 아니었다. 겨우 야시장에 놀러 가는 일에 빌 브라운을 끼워 넣을 뻔했다고 속이 상해 달아났던 아이였다. 춤 연습 이야기까지 꺼냈으니 둘이 보자 부른 것이리라.

“⋯예.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편히 마음먹어도 될 것 같구나.”

“그렇습니까?”

“응, 나도 우리 발렌티아 차기 공작님께 들은 것이 좀 있어서.”

“⋯외숙부에게⋯?”

나는 얼떨떨하여 눈을 깜박거렸다. 모친은 우아한 손짓으로 부채를 탁 펼쳐 살랑거렸다. 부채언어니 뭐니 하는 것을 모르는 내 눈에도 고귀해 보이는 손짓이었다.

“이미 패가 갈렸으니, 더 확실히 하는 것이 좋다고. 우리가 2황자님께 귀한 선물을 좀 드려야 할 것 같구나.”

“⋯선물을요?”

“그래. 괜찮은 선물을 한다는 핑계로 찾아뵈면 되겠지. 황궁에 들어갈 때에 입을 옷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 12월 둘째 주 이후로 날을 잡는 것이 좋겠구나.”

“⋯데뷔탕트용 의복 말고도, 갖춰야 할 옷이 있습니까?”

“그럼. 나중에 네가 더 나이를 먹고, 황궁 출입이 잦아진 뒤라면 모르겠지만⋯. 이건 네 첫 입궁이잖니. 보는 눈도 많을 것이고, 보여줘야 할 것도 무척 많단다.”

나는 할 말을 잃어 잠시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나 곧, 내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방긋방긋 웃고 있는 내 모친, 세이른 에른하르트는 그 발렌티아 공작가의 금지옥엽으로, 데뷔한 해부터 팔 년간 사교계를 휩쓴 여인이었다.

내가 태어난 그날 이후로 사교계를 떠나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얕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공손하게 손을 모았다.

“예, 어머니께 맡기겠습니다.”

“그래. 날짜를 정하는 서신에는 에른하르트 가의 문장을 찍어 보내는 거란다. 이 초대장은 시종에게 잠시 보여주기만 하고, 계속 네가 갖고 있는 거야. 잃어버리지 않게 주의하렴.”

“예.”

“답신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줄 테니, 네 글씨로 직접 써 보렴.”

“예.”

곧 괜찮은 종이와 펜이 준비되었다. 나는 모친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적었다.

「다정한 신의 안배, 루베르 안티 시어런 황자님께.

첫 번째 신의 은혜가 황자님의 발치에 깃들기를 바랍니다. 녹옥의 궁에 발을 딛는 영광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빛나는 마음을 품고 찾아갈 터이니 12월의 둘째 주에 금빛 문을 열어주시기를 청합니다⋯.」

내 손으로 적는 글씨임에도 낯선 기분이 들어 헛웃음이 샜다.

“이렇게 말하면 둘째 주의 어느 날인지 어찌 압니까?”

“그건 그쪽에서 정해줘야지. 원래 황족을 대할 때에는 그렇단다. 그쪽에서 정한 날짜에 우리가 맞추어야 해.”

하지만 루베르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다시 물었다.

“화요일은 피해달라고 적어도 될까요?”

“그럼. 그런데 화요일에 선약이 있니?”

“예. 마법사를 하나 키우고 있습니다.”

“응?”

모친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다가, 그 일은 나중에 묻겠다며 다음 줄에 적을 내용을 읊어주었다. 나는 또 그대로 받아 적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줄에 화요일을 피해달라고 말하는 대신 십자 마크를 적어 넣었다.

이 표식은 일곱 가지가 있는데, 승낙의 말은 할 수 있어도 거절의 말은 적을 수 없는 서신을 위해 정해진 것이라고 했다.

모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참 다행이라 여겼다.

* * *

옷을 맞추는 일은 생각보다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물론 지난 14년간 모친의 구미에 맞는 옷을 맞출 적마다 한두 시진은 훌쩍 쓰기에 그런가보다 싶었으나, 올해는 정말 유난도 그런 유난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옷감과 저 옷감의 색이 같아 보이는데도, 윤기가 다르다 원산지가 다르다 실의 색이 다르다 하며 꼼꼼히 따지고 입을 대는 모친의 명에 따라 하루 종일 이런저런 옷감을 몸에 대어보았다.

가장 어울리는 목깃이 어느 것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미리 준비된 여러 모양의 셔츠를 입었다 벗고, 움직이는 동작에 따라 멋들어진 주름이 지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시키는 대로 팔을 올렸다 내렸다, 앉았다 일어났다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그중에서 내가 양보하지 못한 것은 신발이 유일했다.

색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만약의 일이 생겼을 때 사람을 들고 뛸 수 있으려면 밑굽이 너무 딱딱하지 않고 우스꽝스럽지 않은 모양의 신발을 신는 것이 중요했다.

애걸하고 간청하여 새로 짓는 신발의 끝이 뾰족할 일을 막고 나니 진땀이 절로 나왔다.

제 손위 누이의 옷을 그대로 입고 나갔다는 마리앤이 부럽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나, 입 밖으로 내면 욕 들어 먹을 소리인 것을 알아 홀로 참았다.

그래서일까.

화려하고 훌륭하게 꾸미고 2황자궁으로 향하는 12월 둘째 주 수요일에는 가장 큰 산을 넘은 듯 해방감이 들었다.

우윳빛의 셔츠는 몸에 딱 맞게 지어져 있었다. 목깃에도 손목에도 보석을 달았다. 그 위에 허리를 바짝 조이는 조끼를 입고, 다시 딱딱하고 자수가 어여쁜 코트를 덧입었다. 보석으로 만든 단추를 채웠는데, 숨을 크게 마셔 가슴을 부풀리면 몸이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바짓단도 어찌 이리 허벅다리에 딱 맞게 만들었는지, 나무라도 타고 올랐다가는 이음새가 튿어질 것이 분명했다. 황자궁에서 첩자질을 하지 못하게 만든 옷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잔뜩 꾸미고 루베르를 만나러 가는 길이 민망할 것 같다 여겼으나, 그렇지도 않았다.

타박타박 말 걷는 소리에 맞추어 진동하는 마차 안에서 나는 살랑이는 앞머리가 시야에 거슬리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다.

분홍빛으로 고슬고슬한 머리칼을 잘 빗어 가르마를 타서, 오른쪽 눈썹 아래로 살랑 내려오게 만든 것도 모친의 명에 따른 일이었다.

손대어 뒤로 넘기는 일이야 금방 할 수 있지만, 굳이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황궁에 마차가 닿으면 경비병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마차 창문에 대고 경례를 올렸다. 나는 그 너머로 내가 받았던 초대장을 보였다. 병사가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물러서면, 마차는 그대로 대로를 따라 다시 이동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번쩍거렸다. 이 겨울에 눈처럼 새하얀 꽃을 사방에 피워두고 마법으로 빛을 뿌려 둔 모습을 구경하며 터져 나오는 감탄을 억누르지 않았다.

황궁에 대해 상상한 그 모든 것보다도 더욱더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건물 하나하나가 높고 거대하고, 희고 빛이 났다.

시어런 제국의 황성은 신의 빛을 흉내 내어 지었다고 했다. 신성력을 닮은 건물을 짓기 위하여 새하얀 칠을 하고 마법으로 빛을 뿌려 장식해 둔 것이었다. 비가 와도 피해 가고, 눈이 와도 비켜 갈 것 같은 고운 빛이었다.

식물원에서 종종 본 적 있던 사철나무가 금으로 장식된 건물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흰 건물이 간간이 누런 빛으로 귀하게 빛이 났다. 그 앞에서 마차가 멈춰 섰다. 시중드는 이가 문을 열어주기에 마차 밖으로 나섰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초로의 노인이 정중히 허리를 깊게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에른하르트 영식. 2황자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귀히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또한 간단한 묵례로 예의를 차렸다.

내심 루베르가 마중을 나오기를 기대하긴 하였으나, 실망하진 않았다. 지엄한 신분의 벽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이제 그 아이가 나를 버선발로 마중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모친이 미리 안내해 준 순서에 따르면, 내가 응접실에서 차와 다식을 대접받고 십 분을 기다린 뒤에 루베르가 응접실로 와 내 인사를 받는 것이 옳은 일이라 했다.

그래서,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숨 돌릴 새도 없이 벌떡 일어선 놈을 보고 얼떨떨했다.

“에른하르트 영식!”

“⋯선배?”

문 안에서 기척이 느껴지긴 하였으되, 법도에 따라 찬찬히 들어올 줄 알았건만. 기다린다는 말이 진짜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었던가.

환한 얼굴을 한 루베르가 나를 바라보고 흰 낯을 꽃처럼 붉히는 모습을 멀거니 보다가 웃음이 터졌다.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솔직히 기뻤다.

“어, 오늘⋯ 오늘. 엄청⋯ 예쁘게 입었네.”

“예. 선배를 뵈러 가려면 이렇게 입어야 한다기에.”

“그, 아니⋯. 그렇지. 그건 그런데, 에른하르트 영식이⋯.”

“일단 자리에 앉읍시다.”

이렇게 내가 먼저 자리를 권하는 일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미리 설명을 들었으나 정작 그 예를 받아야 하는 놈이 이렇게 안달이 나 있는데 무엇을 따지겠나 싶어 일단 루베르부터 자리에 앉혔다.

문 앞에서 정중하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서 있던 안내인이 깊게 허리를 숙이고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루베르의 까만 시선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 묘하게 기꺼웠다.

방학 동안에 아이를 보지 못 했던 일이 잦았던 탓인가, 루베르가 졸업하는 일로 서운해 밤잠을 설친 일이 꿈인 듯싶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응⋯ 응, 영식은?”

“그걸 잘 지냈다고 해야 할지⋯.”

2주 내내 옷만 지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신에,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선배 한 번 뵙기 참 힘이 든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아니, 언제든 와도 되는데⋯.”

“그게 제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더군요.”

“⋯.”

내가 무슨 서운한 말을 한 것인가. 루베르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얌전히 호흡을 고르는 것을 곁눈질로 살폈다.

나는 모친이 몇 번이나 당부한 인사말을 생략하기로 하고, 준비된 것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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