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목요일.
미리 약속해 둔 대로 더글라스의 교수실을 찾아갔다.
익숙한 소파에 퀭한 얼굴로 앉아있는 메이지 볼더를 보니 기가 찼다. 원래도 살집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양 볼이 움푹 패어 있었다.
내가 가타부타 말을 더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자 볼더가 마땅한 인사를 하기도 전에 황급히 변명부터 늘어놓았다.
“지금 에른하르트 영식도 보셔서 아시다시피 골렘 4호가 제대로 된 단전을 생성하기 시작했잖아요? 날개뼈에서 꼬리뼈까지 척추를 따라 이어지는 흐름의 이유가 모호할 뿐, 작동이 제대로 되고 있으니까, 이게 실제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적용되어 작용하는지를 꼭 알아보아야 했거든요.”
“⋯아, 예.”
“사람에게는 목숨을 내걸 만큼 가치 있는 순간이 있는 법이잖아요? 제게는 이번 일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진리의 이끌림으로.”
“또 그러실 겁니까?”
“정말 불가항력으로.”
“또 그러실 거냐고 물었습니다.”
“⋯아니요⋯.”
“⋯그러면 됐습니다.”
나는 누군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메이지 볼더의 의도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를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난 가까운 이의 죽음에 예민했다. 그것도, 다른 무엇도 아닌 남궁의 무공을 해석하고 사용하다가 죽는 것은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
내가 볼더를 꾸짖는 모양새를 지켜보고 있던 더글라스가 웃는 낯으로 서류 몇 장을 건네주었다.
“그래도 덕분에 알게 된 게 있기는 해요.”
“⋯.”
“에른하르트 영식이 의지, 또는 의도라고 말하는 그 부분이요. 아마 마나의 순정도에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순정도?”
“네. 시어런의 기사는 대기 중의 마나를 신체 외부에서 형태변환을 하여 곧장 사용하고, 시어런의 마법사는 대기 중의 마나를 서클에 감아 사용하기 때문에 다루는 마나의 순정도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아요. 하지만 에른하르트 영식은 그 마나를 몸으로 받아들여 한 번 정화한 뒤 신체 내부에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형태변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사용하잖아요.”
“⋯예.”
“보다 순수하고 정순한 마나는 정화되지 않은 일반적인 마나를 밀어내고 배척하는 현상을 보이더라구요. 이번에 메이지 볼더의 기혈이 뒤틀린 것도 그 때문이었고요.”
나는 입을 닫았다. 내 몸의 내공이 오러를 밀어낸 것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러나.
“⋯하지만 저는, 서클을 전개해 본 적이 있습니다.”
“예, ‘중단전’에만 머무르는 서클을 전개했었죠.”
“⋯.”
“그래서 날개뼈 아래로, 꼬리뼈 어림까지 내려갈수록 마나가 이상하게 뒤틀리는 모습을 보였던 거예요. 순정한 ‘단전’의 영향을 받는 범위가 여기까지인 거죠.”
“아⋯.”
내가 온전히 이해한 기색이자, 더글라스는 다정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인체 도해를 짚어가며 내가 아는 혈도와 그가 생각하는 구상도를 알려 주었다. 나는 집중하여 들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중화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정순하면서도 오러를 배척하지 않는 기운은⋯.”
“⋯신성력입니까?”
“예, 맞아요. 알고 있었네요?”
“이번 학기에 운이 좋아서⋯. 우연히 한 번 접해본 일이 있습니다.”
“네, 맞아요. 저도 신성력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가 좀 있어요.”
“⋯어떤 문제입니까?”
더글라스 머스탱이 쓰게 웃으며 메이지 볼더를 바라보았다. 볼더는 고개를 잔뜩 숙였다. 그 나이를 먹고 어깨를 옹송그린다고 가련하고 안쓰러워 보일 것 같으면 오산이었다. 혀를 차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아카데미 내에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교수님들은⋯. 전부 마법사랑 사이가 좀 안 좋아요. 아무래도 마법사들은 신을 물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몰두하는 사람들이라서⋯.”
“⋯아.”
“그래서, 이번 방학 동안 제가 어떻게 방법을 생각해볼게요. 다음 학기에는 에른하르트 영식이 관련된 내용을 좀 더 알 수 있을 거예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역시 더글라스 머스탱처럼 믿음직한 교수가 또 없었다. 더글라스는 다정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샌슨 교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시겠다고 했지만⋯. 다음 학기에도 제게 시간을 좀 내어주실 수 있나요? 이왕이면 에른하르트 영식이 졸업하기 전에 내공심법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싶어요.”
“예,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위대한 발견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제가 더 영광인걸요. 늘 고마워요, 에른하르트 영식.”
눈치를 보던 볼더가 냉큼 말을 더했다.
“우리 다 같이 힘내 봅시다.”
“⋯엉뚱한 짓이나 하지 마세요.”
피식 웃음이 샜다.
이 엉뚱한 마법사와도 정이 들어 가지고, 어찌 됐든 아파서 골골거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쓰였다. 볼더가 저는 멀쩡하다며 뽐냈으나 괜찮을 리 없었다. 그의 숨소리에서부터 주화입마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사람인 태가 났다.
할 이야기를 마쳤다며, 방학 잘 보내라 인사하는 둘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교수실을 나섰다. 이것으로 아카데미에서 이번 해에 할 일은 모두 마무리한 셈이었다.
여느 때보다 더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 * *
11월의 마지막 주 금요일이었다.
발렌티아 가 타운하우스에 다른 가족들보다 사흘 먼저 도착했다. 익숙한 얼굴의 집사가 나를 반겨주어 어색할 일은 없었다. 일전에 사용한 적 있었던 방을 그대로 안내받았다.
가족들이 수도에 올라오기 전까지 심란한 마음은 검술 수련을 하며 흘려보냈다.
이번 학기 내내 세이렌 검형을 연습한 덕분에 유검, 흐르는 검의 묘리에 대해 좀 더 익숙해졌으나 이 또한 남의 것이라. 나의 검을 자아내는 일에 온전히 스미지 못했다.
간간이 서재 책상 위에 문진으로 눌러 놓은 초대장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언제 연락을 하는 것이 좋을까. 루베르 그 녀석의 흰 낯이 떠오를 적마다, 가늘게 떨리던 손안의 감촉이 떠올라 괜히 손아귀가 간지러웠다.
마리앤이 앙큼하게 떠들어댄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그 선배가 미카엘 좋아하잖아요, 하던 낭랑한 목소리가.
그러나 루베르는 한 번도 나를 좋아한다거나,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저, 그만하겠다고만 했다⋯. 그게 벌써 지난 학기의 일이었다.
그러더니 이번에 졸업 전에는 그저 지금처럼 잘 지내자 하지 않았던가. 지금처럼⋯. 잘 지내자고.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궁금했다.
생각이 끝 간 데 없이 뻗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초대장을 다시 문진으로 눌러두었다.
내 모친이 고위귀족으로 사교계를 휩쓸었다 하니 모친에게 해답을 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여겼다.
방학에 내가 가족들을 기다린 것은 처음이었다.
약속한 날이 되자 하인 하나가 복도를 타다닥 달려오는 소리가 선명했다. 그러나 이미 열린 창 너머로, 발렌티아 가 타운하우스의 거대한 정문이 열리는 것을 본 나였다.
막 나가던 길에 하인을 마주하고 웃어주었다.
낯익은 마차에서 내린 가족들은 모두 화려하고 섬세한 꾸밈을 하고 있었다.
“미카!”
“형아아!”
기분 좋은 부름이었다. 나는 익숙하게 품을 열어, 냅다 달려드는 미하엘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아비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갓 내린 아스델도 다른 팔로 덥썩 붙들어 올린 채 모친과 뺨을 맞대는 인사를 했다.
사이 좋은 가족의 모습에 마중 나온 사용인들이 흐뭇하게 웃었다.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는데도 벌써 12월이구나. 오래 기다렸니?”
“아닙니다, 아버지. 먼 길인 것을 빤히 아는걸요.”
“널 만나러 온다고 다들 예쁘게 하고 왔단다.”
내 품에서 바동거리는 아이들을 내려놓으며 부친을 반기자, 모친이 냉큼 양 손끝으로 치마를 집어 올리며 제 드레스를 자랑했다. 내가 보기에도 크게 부푼 치마와 화려한 장식이 빛이 나고 신기하여 곧장 칭찬했다.
“이렇게 꾸미신 모습은 처음 봅니다. 무척 잘 어울리세요.”
“오랜만에 수도에 온다고 힘을 좀 줬지. 유행은 좀 지났지만, 난 버슬 드레스를 좋아하거든.”
모친이 제자리에서 빙그르 돌며 뽐을 내자, 그 모습을 본 아스델이 눈을 빛내며 저도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아이가 넘어질까 미리 팔을 뻗고 있는 미하엘이 눈에 띄었다. 저도 사내고 오빠라고 동생을 챙기는 모습이 참 귀엽고 뿌듯하여 절로 웃음이 나왔다.
가족들과 함께 타운하우스로 들어섰다.
일전에 나의 외사촌인 아이젠 발렌티아가 내 데뷔탕트에 쓰라고 물려줬던 보석들을 챙겨왔다, 같이 한 번 보자 하는 말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때가 다 되어 가족들이 도착한 덕분에, 만찬장에 음식이 바로 차려졌다. 무거운 액세서리만 떼어내고 자리에 앉은 모친이 금방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데뷔탕트용 의상은 총 다섯 벌을 지어야 해. 내일부터 준비하면 되겠구나.”
“다섯 벌을요?”
“그래, 데뷔탕트는 보름간 치러지는 행사잖니? 보통 다섯 벌에서 열다섯 벌까지도 짓는단다. 하지만 매일 다른 옷을 입으면 또 사치를 한다고 뒷말이 돌 수 있어서, 검소한 백작가 영식이라면 다섯 벌이 적당하지.”
“흐음.”
“보통은 위아래를 따로 입어도 어울릴만한 옷으로 다섯 벌을 지어, 그날그날 다른 조합으로 갈아입고는 한단다.”
“⋯어머니께 전부 맡기겠습니다.”
“그래. 내가 왕년의 솜씨를 보여줄게.”
모친이 말하는 내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만 주억거리는 부친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는 수도의 사교계에 출입한 첫날 멱살을 잡힌 후로 파티를 찾은 적이 없다고 했다.
부친은 그저 신이 난 모친의 얼굴을 보며 간간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러는 김에 우리 아가들 옷도 맞출까?”
“우리도 데뷔탕트 해요?”
“그래, 우리끼리 데뷔탕트를 하자. 샹들리에도 새로 사고.”
“좋아요!”
아스델이 눈을 반짝이자, 부친이 얼른 어른이 되려면 콩을 잘 먹어야 한다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스델이 냉큼 콩을 골라 주워 먹는 것을 보니 실없는 웃음이 샜다.
데뷔탕트와 티타임 예절에 대해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기에 달게 받았다. 내가 루베르에게 춤을 배운 이야기를 하자, 모친은 매우 기뻐하며 눈을 둥그렇게 휘어 웃었다.
“어머, 정말? 그럴 줄 알았어. 하여간 우리 집안에서 춤을 싫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까.”
“⋯외숙부도요?”
“그럼. 몸 쓰는 거라면 아무튼 다 좋아해 가지고.”
또 새로운 사실이었다. 나는 잠시 침음하다 웃었다.
“제가 괜한 고집을 부렸던 것 같습니다.”
“조금? 아니, 우리 미카는 아주 고집불통이었어. 그런 점이 귀여웠지만.”
동생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핀잔은 간지럽지도 않아 나도 따라 웃었다.
식사 자리 내내 하도 웃어서, 식사를 끝마친 뒤에도 배가 고팠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커다란 파운드 케이크와 오렌지를 띄운 홍차 몇 주전자를 먹어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