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아이는 시답잖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나는 몇 번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러나 내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방금 전에 나눈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저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내 표정을 가만히 살펴보던 루베르가 몸을 일으켰다.
다시 걸었다. 따라 걸었다.
긴 밤 슬픔을 베어내기 위해 찾았던 연무장에 걸음이 닿았다. 아이와 둘이 앉아 별을 구경한 그 자리였다. 나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파란 하늘에는 별은커녕 구름 한 점 없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잠시 별 보다 갈까요.”
아이가 웃었다.
“아니.”
“⋯.”
“또 가고 싶은 데가 있어서.”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게 되었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는 아이의 머리칼이 조금 더 자라 있었다. 어깨 어림에서 바람이 일 적마다 살랑이는 검은 머리칼을 보고 있자니 눈이 부셨다.
눈이 부신 것인지, 눈이 시린 것인지.
아이는 모든 장소에서 조용히, 단 하나도 잊고 싶지 않은 사람인 양 찬찬히 살폈다. 풀꽃 한 포기, 나무 한 가지, 돌멩이 한 조각을 꼼꼼히 둘러보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차근차근 걸어간 걸음의 마지막, 우리는 메인홀에 들어섰다.
내가 처음 아카데미 입학식을 치른 그 강당이었다. 늘어선 샹들리에의 개수만 해도 열둘이고, 단상 앞의 계단은 일곱 단이다. 나는 내가 서 있던 자리를 기억했다.
⋯그리고 루베르 이 아이가 서 있던 자리도 기억하고 있었다.
근로 장학생의 의복을 차려입은 루베르는 홀의 왼편에 다른 아이들과 나란히 서서 신입생들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그때 홀에 있던 아이들 중 루베르와 루실라만 일류 무인이었다. 갓 지학을 넘긴 소년과 소녀가 일류의 경지에 닿아있는 것을 보고 시선을 떼지 못했던 일이 생각이 났다.
어쩐지 막막하여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루베르가 다시 웃었다.
“여기에서 널 처음 봤는데.”
“⋯.”
나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어찌 대답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선배는 근로 장학생으로 계셨지요.”
“하하, 맞아. 눈이 마주쳤지.”
“⋯예.”
이렇게 어린 아해가 그렇게 일찍 강해진 것이 부러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이 어여쁜 것을 질시했다. ⋯그랬다. 겨우 2년 만에, 이 아이가 이렇게 귀하게 여겨질 줄을 모르고.
루베르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이어 말했다.
“나를 그렇게 노려보는 사람을 그때 처음 봤거든. 엄청 놀랐어.”
“⋯노려본 것이 아니라.”
“재미있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고⋯.”
입 안으로 혀가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어쩌지? 나는 대답할 것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이 아이를 잃고 싶지도 않았고, 아이의 마음을 고스란히 받아 낼 자신도 없었다.
두려웠다.
그러나 루베르는 내가 난처해할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꽃처럼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물었다.
“아. 참 즐거웠다. 그렇지?”
“⋯아⋯.”
무어라 대꾸하고 싶었으나 숨이 떨려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했다.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충분히 침착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루베르는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나는 웃는 얼굴을 해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표정을 가늠하는 것이 어려웠다.
“예. ⋯무척 즐거웠습니다. 선배 덕분에.”
“나도. 내가 졸업하고 나서도, 우리, 잘 지내자. 지금처럼.”
새삼스럽게 내 앞에 내밀어진 손을 보았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긴장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은 뜨거웠다.
나는 맥문을 잡는 인사가 표하는 인정과 다정을 배웠다.
그러나 손끝을 덜덜 떠는 이 감정은 내가 모르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손끝을 떨며 다음을 기약하는 애원을 나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지켜주고 싶다.
그런 생각이 울컥 들었다. 지켜주고 싶었다. 이 아이가 웃는 얼굴을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가슴 깊숙이 검고 가여운 새가 날아들어 제 깃을 골랐다. 그럴 적마다 기침이 나올 것처럼 속이 간지러웠다.
루베르가 조심스럽게 손을 떼어냈다. 아이의 손에 붉은 자국이 날 만큼 꽉 잡고 있던 것을 뒤늦게 알아 사과하려는데, 루베르가 조금 더 빨랐다.
“나도, 영식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아도 될까?”
“⋯예.”
찬찬히 내 머리칼에 손이 닿았다.
겨우 한 번.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렸을 뿐인 손짓은 무척 가볍고 조심스러웠는데도, 속을 갈퀴로 긁어내는 듯했다.
나는 얼떨떨하여 루베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이가 울진 않을까 염려했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루베르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울고 싶은 것은 나였다.
우리는 삼십 여분 동안 메인홀에 있었다.
식사를 하러 가자 하기에 따라나섰다. 전에 들른 적 있던 오웬식 식당에 마주 보고 앉아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이번에도 루베르가 먹지 못하는 향채는 내가 먹었다.
내년에 들으면 좋을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지난 과제나, 내 동무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루베르는 시종일관 평소처럼 굴었고 나도 그랬다.
외출이 끝나고, 3학년 기숙사 문 앞까지 루베르를 바래다 주었다. 루베르는 평소처럼 내일 보자 웃으며 인사하는 대신에 다른 이야기를 했다.
“나 내일 아침에 황궁에 가서, 내일은 도서관에 없을 거야.”
“⋯그래요.”
“12월에, 그, 시간이 나면 꼭 연락 줘.”
“예. 그러겠습니다.”
방긋 웃은 아해가, 그럼 이제 저를 쓰다듬으라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는 익숙하게 아이를 얼렀다.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머리칼을 가만가만 쓰다듬고 있으려니, 벌써부터 서운해 어쩔 줄 몰랐다. 왈칵 밀려 들어온 설움이 가슴 속에 흥건히 고였다.
익숙하게 예쁨을 받고, 또 익숙하게 고개를 든 루베르가 방긋 웃었다.
“잘 자.”
“예, 선배도요.”
믿기지 않을 만큼 계속해서 가슴이 수런거렸다.
* * *
일요일 아침.
나는 이 땅에 태어나서 검을 잡은 뒤 처음으로 연무장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이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푹신하고 포근한 침대에 누워 까마귀 인형이나 주무르고 있었다.
자꾸만 익숙한 노래를 흥얼거리는 인형은, 하도 조물거려 손때가 타 반들거렸다. 그 까만 눈 사이를 엄지로 문지르는 일이 잦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루베르 그 아이와 닮았다.
일을 돌봐주는 사환 아이가 내 침실 앞까지 기웃거리다가 전언을 전해 주었다.
“⋯샌슨 교수님께서?”
“예. 에른하르트 영식이 편할 때, 오늘 중으로 교수실에 들르라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점심때가 훌쩍 지났다. 지금껏 마엘로 샌슨이 이런 식으로 나를 따로 부른 일이 없어 당혹스러웠지만, 그를 존경하는 마음은 언제나 깊고 짙었다.
심란한 마음을 애써 털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두 시간 뒤에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꾸벅 인사하고 나가는 사환의 뒷모습을 한 번 보고, 저켠에 놓여져 있는 거울을 한 번 보았다. 그 꼴이 부스스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차지 않아 다시 침대 밑으로 내려가 앉았다.
운기조식으로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가운 물로 피로를 씻어 낸 뒤에야 마엘로 샌슨의 교수실을 찾을 수 있었다.
대개 샌슨과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으면 연무장을 찾았으므로 무척 낯선 기분이었다.
샌슨의 교수실에는 사용감이 넘치는 갖가지 종류의 무구들이 저마다 괜찮은 받침대에 올려져 있었다. 큼직한 소파와 테이블이 교수실의 한가운데에 툭 놓여 있는 것 외에는 책상이나 책장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어.”
“예, 교수님. 부르셨습니까.”
“어. 우리 열심히 한 미카엘 칭찬도 좀 해 주고⋯. 부탁도 좀 하고, 하려고.”
부탁이라고? 그가 내게 부탁할 일이 뭐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샌슨은 차를 내 주는 대신에 아카데미 카페테리아에서 판매하는 딸기 주스를 권했는데, 좋아하는 것이라 기쁘게 받았다.
내가 주스를 두어 모금 마시는 것을 지켜본 샌슨이 입을 열었다.
“네가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하긴 했지?”
“⋯예⋯?”
“혹시, 내년에도 내 수업은 다 들을 생각이냐?”
“예.”
샌슨은 잠시 침묵했다가 웃음을 꾹 눌러 참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나는 내년에 초급 검술과 고급 검술을 가르치는데도?”
“⋯.”
“그러지 말라고 얘기하는 거야. 너는 초급 검술 수업에 들어와도 배울 것이 없어.”
나는 서운하여 대꾸도 못 하고 손에 들린 주스 잔을 만지작거렸다.
샌슨이 내내 참았던 웃음을 껄껄껄 흘러내며 소파에 푸욱 몸을 묻었다. 큰 덩치에 끼익, 가구가 뒤로 밀려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대신, 네게 내 오후 시간을 내주마.”
“⋯예?”
마엘로 샌슨은 준비했던 것처럼 종이 몇 장을 꺼내 놓았다.
내가 지난 2년간 들었던 매 학기 시간표들이 종이 네 장에 들어차 있었다. 그 수업 각각에 할당된 학점과, 내 점수까지도.
잠시 이해하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본 샌슨은 졸업요건 서류를 꺼내어 함께 내밀었다.
“네가 지난 학기들마다 수업을 넘치게 들은 덕분에, 졸업할 수 있을 만큼의 학점은 충분히 채웠어. 나는 매 학기마다 오전에만 수업을 하고, 오후 시간에는 너처럼 힘이 넘치는 꼬마들을 돌보는 게 취미거든.”
“그 말씀은.”
“그래, 아예 학점 인정이 되는 특수 학급을 개설할 생각이다. 머스탱 교수도 너를 많이 탐내고 있거든. 화, 목 오전의 고급 검술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나와 더글라스 교수가 널 각각 데려다 가르치도록 합의를 봤다. 학점 인정은 시수에 따라 해 줄 거고, 배우는 내용은 개인 과외에 가깝겠지. 어때, 할래?”
놀랍도록 과분하고 기쁜 소리였다. 잇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색을 내보이고 싶지 않아 조심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예, 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요일은 머스탱 교수님이랑 상의해서⋯.”
“아.”
“왜?”
“제가, 수요일에는 윌턴 로버츠 교수님께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이 있어서⋯.”
“윌턴 로버츠? 그, 비도술 가르치는?”
“예.”
마엘로 샌슨은 잠시 생각하다가, 생각지도 못한 라이벌이 늘었다며 또 껄껄 웃었다. 걱정하지 말라며 어깨를 투덕이는 큰 손에 의지하여, 기쁜 얼굴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