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64)화 (164/176)

164.

금요일.

마법생물 시험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마법생물 이름 서른 개 적기였다.

그러나 각 마법생물의 신체적 특징이나 사용 가능한 능력, 마법생물 기초상식에 대한 문제는 대부분 정답을 고른 것 같아 걱정을 덜었다.

시험지를 옆에 두고 답안을 맞추어 보던 에드윈이 쉬운 문제를 틀렸다며 나를 타박했으나, 이 정도면 나름 선방한 것이 아닌가 하고 시치미를 떼게 되었다.

아이들이 내민 답안을 간단히 한 번 훑어본 앨런 라게르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다들 잘했습니다. 대강 보아도 점수를 기대할 만하겠어요. 그럼 이제 한 학기 동안 기른 라넌큘러스의 목에 이름표를 달아, 여기 이 새장 안에 넣어주시면 됩니다.”

근로 장학생 하나가 돌아다니며 이름을 적을 종이가 달린 리본을 나눠주었다.

미카엘 에른하르트. 내 이름을 목에 매단 라넌큘러스가 까만 눈을 빛내며 파란 깃을 퍼득였다. 이제 헤어질 것을 아는 게지.

녀석의 목 아래 깃을 긁어주며 마지막으로 마나를 풀어 먹였다.

“고마웠다.”

“고마워. 고마워!”

“그래, 넌 참 착한 놈이었다.”

녀석을 감싸듯 쥐어 새장 안에 넣었다.

금방 헤어질 놈이라 정 붙을 것이 무서워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새야, 새야. 하고 불렀던 놈이었다. 몇몇 아이들이 정든 라넌큘러스와 헤어지기 싫어 코 먹는 소리를 냈다.

앨런 라게르는 모든 라넌큘러스가 새장 안에 온전히 자리 잡았는지 헤아려보고, 다정한 소리를 냈다.

“여기 있는 이 녀석들은 이제 제1 마탑으로 들어가서, 배부르게 마나를 먹고 부쩍 자라 이 세상을 떠돌며 소식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될 겁니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여러분을 기억하는 라넌큘러스와 다시 한번 마주칠 수도 있겠죠.”

애틋한 소리였다. 새파란 라넌큘러스에게 시선이 꽂혔다. 녀석은 다른 라넌큘러스와 서로 깃을 골라주며 귀엽게 구느라 바빠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한 학기 동안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방학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앨런 라게르가 큰 손으로 가뿐하게 새장을 들어 올렸다. 새들이 저들끼리 좋아 파르륵 날았다가, 큼직한 새장 안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예, 감사했습니다.”

아이들이 입 모아 꾸벅 인사하는 틈에 나 또한 감사 인사를 했다.

참 좋은 것을 배웠다.

집을 떠나서도 에른하르트가와 연락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장점이었다.

에드윈이 다시 한번 제게 감사하라며 뽐을 내기에,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 귀에 단 말을 잔뜩 해 주었다.

* * *

시험이 끝난 주의 주말에는 바로 마차를 잡아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번 주는 달랐다. 겨울 방학을 수도에서 보내기로 한 덕분이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고, 겨울은 저장의 계절이었다. 이 몸의 아비가 일이 바빠 12월에 맞춰 발렌티아 타운하우스로 올라오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한 주 더 아카데미 기숙사에 머무를 수 있었다.

주말 동안에 무엇을 할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토요일 새벽, 익숙하게 찾아든 연무장에서 마리앤을 만났다.

“어, 집에 안 갔어요?”

“예. 다음 주나 되어야 타운하우스에 가족들이 도착한다고 들어서요. 마리앤은요?”

“원래 수도에 타운하우스가 없는 학생들은 기숙사 사용이 가능하거든요. 여기서 황궁까지 거리가 멀지 않으니까요. 이번 방학도 그렇게 보내겠죠, 뭐.”

“흐음.”

“왜 그렇게 봐요?”

“아뇨, 그러면 방학 동안에도 계속 연무장에 나올 수 있겠네요.”

“어! 설마 방학 동안에도 저 봐 주려구요?”

“매일은 아니고.”

나는 잠시 연무장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이제 마리앤은 이 연무장을 다섯 바퀴는 거뜬히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다섯 바퀴를 달리고 회복 주문을 외우고, 다섯 바퀴를 뛰고 회복 주문을 외우면서 체력과 마법수식 구현을 함께 연습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

“할당량을 정해주겠습니다.”

“⋯할당량?”

“예. 오늘부터 일주일간 매일 이 연무장을 일곱 바퀴씩 돌고, 제가 지금 알려드릴 다섯 가지 운동을 정자세로 백 번씩.”

“예에? 아니, 잠깐, 잠깐만요. 미카엘.”

“그러면 다음 주에 와서 상태를 확인하고, 그다음 과제를 드리는 식으로. 다만 주말에는 저도 바쁠 것 같으니 요일은 지정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화요일 어때요?”

“와, 아니, 아니 잠깐. 진심이에요? 저 지금 다섯 바퀴 뛰면 다리 후들거리는 거 알잖아요.”

“유일 산맥에서도 그렇게 말할 겁니까?”

“⋯그건, 아니죠⋯. 아, 흐으, 알았어요. 할게요.”

“좋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죠.”

익숙하게 매일 출발선으로 삼고 있던 조경수 앞쪽 방향으로 향했다. 뒤따라오던 마리앤이 슬쩍 내 옷깃을 잡아당기기에 돌아보았다.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요, 미카엘.”

“⋯천만에요.”

무척 흐뭇했다.

죽는 소리를 내는 마리앤에게 팔굽혀펴기, 기마자세로 오래 버티기, 그리고 삼재검법의 바른 자세를 꼼꼼하게 가르쳐 두었다.

자세가 무너진다고 해도 일주일 뒤에 다시 보아 주면 될 터이니 걱정될 것이 없었다.

훈련을 마치고, 씻고, 혹시나 싶어 찾아 든 도서관에서 루베르를 만났다.

루베르는 우리가 늘상 앉아 공부하던 커다란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었다. 아이가 까만 시선을 들어 나를 보았다. 공부할 것은 조금도 가지고 오지 않은 채였다.

나 또한 그랬다. 텅 빈 손이 허전하여 괜히 빈 주먹을 등 뒤로 감추었다.

간단히 묵례로 인사를 갈음하고 물었다.

“시험도 끝나셨을 텐데, 여기는 왜.”

“그러는 에른하르트 영식은?”

“⋯.”

그러게, 대체 내가 왜 이곳에 왔을까.

대답하지 못 하는 나를 보며 루베르가 시들시들하게 웃었다. 언제나처럼 가엾고 어여쁜 웃음이었다.

그 흰 뺨에 홍조가 어리는 것을 볼 적마다 민들레 홀씨를 삼킨 듯 속이 간지러웠다.

“그냥, 영식이 올 것 같아서⋯ 이거 주려고.”

“⋯이게 뭡니까?”

“티파티 초대장.”

건네주는 것을 받아 확인했다. 좋은 종이에 화려한 잉크로 시어런 제국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2황자의 인장이 있었다.

루베르 안티 시어런. 아이가 멋들어진 글씨로 남긴 서명까지 살펴보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내가 입을 열어 묻지 않아도, 설명이 필요한 것을 알고 루베르가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데뷔탕트는⋯ 한 해의 마지막 날부터 보름에 걸쳐서 하잖아. 그 전에도 후에도, 티파티는 종종 열거든. 모르는 사람을 소개받기도 하지만,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서 그냥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티파티라고 불러.”

“⋯음.”

“이건, 그러니까⋯. 2황자궁에 올 수 있는 초대장이야. 사흘 전에만 미리 알려주면, 영식이 편한 시간에 내가 맞출게. 이 초대장을 들고 한 번 놀러 와.”

새삼스러웠다.

루베르 이 아이가 졸업을 한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나는 초대장의 모서리를 손끝으로 매만지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또 춤을 가르쳐 주시려고요.”

시답잖은 농담에도 루베르는 환하게 웃었다. 반짝거렸다. 어여쁘게 빛이 났다.

“글쎄. 그럴까?”

“시간 내어 가겠습니다. 12월 중에.”

“응, 기다릴게.”

아이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묵묵히 서 있었다.

그런 나를 이끄는 것은 이번에도 루베르였다. 녀석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다정한 목소리로, 간지럽게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같이 산책이라도 할까? 나도 이제 졸업하니까⋯. 내가 아카데미에서 좋아했던 장소들에 다시 가 보고 싶거든. 에른하르트 영식이 함께 해 줬으면 좋겠어.”

“⋯예. 그럽시다.”

루베르는 우리 둘이 마주 앉아 오래 공부했던 독서실 테이블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큰 테이블은 두툼하고 묵직하여 앞으로도 몇백 년을 이 자리에서 꼼짝도 않을 것처럼 생겼다. 반들한 표면을 손으로 한 번 훑은 루베르가 걸음을 옮겼다.

나도 따라 나갔다.

고급 검술 수업을 듣던 11연무장에 도착했다.

고급 검술 수업은 대련, 대련, 또 대련으로 이루어진다. 11연무장은 대련을 할 적에 검을 맞대지 않고 도망만 다니는 것을 막기 위하여 다섯 장 남짓한 크기로 빙 둘러 구역을 나누어 놓은 곳이었다. 울타리는 없고, 바닥재의 색이 일부 달랐다.

대련장을 바라보는 남쪽 어느 점에 루베르가 섰다. 나도 그 곁에 섰다. 지난 두 해 내내 우리는 이렇게 서 있었다.

수업시간에 늘 그랬던 것처럼, 내 뺨에 달라붙는 시선이 있었다.

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루베르는 곱게 웃더니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다. 연무장을 꼼꼼히 살피는 까만 뒤통수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루베르는 서툴고 성긴 오러가 바닥 판석의 여기저기를 긁어 둔 것을 꼼꼼히 살펴본 뒤, 가자. 하고 나를 불렀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다음에 도착한 곳에서 나는 참지 못하고 침음을 삼켰다.

루베르와 대화를 할 적마다 주로 찾았던 연못이었다. 넓지 않은 못 주변으로 낙엽이 살얼음처럼 끼어있었다. 날이 많이 추워진 탓에 물고기 한 마리 고개를 내미는 일이 없었다.

못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딛고 선 루베르가 내게 손짓했다.

“왜 안 와?”

“⋯.”

숨이 턱 막혔다.

소리 없이 걸어 아이의 곁에 섰다. 어둑한 물웅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먹먹한 기분으로 내려다보았던 그날과 다른 이유로, 목 안쪽이 꽉 메어 숨을 내쉬기 어려웠다.

그런 나를 다정히 살펴보던 루베르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 다니면서, 여기가 가장 좋았던 것 같아. 그냥, 여기 서 있으면⋯.”

“⋯.”

“이렇게 낮은 다리인데도, 아주 높은 곳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거든.”

“⋯그래요?”

“응. 기다리는 것도 좋았고.”

무엇을 기다렸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이는 이제 내 손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루베르는 다시 걸었다. 나는 또 뒤를 따랐다.

토라져서 달아난 루베르를 달래기 위해 찾아들었던 벤치에, 다시 루베르가 앉았다. 나는 앉지 않았다. 시선이 얽혔다. 루베르는 까만 눈을 휘며 웃었다.

나는 여전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왜?”

“⋯아닙니다.”

늘 묻던 것은 나였다. 오늘은 루베르가 물었다. 나는 답을 알면서도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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