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63)화 (163/176)

163.

토요일.

루베르의 방에 들어가는 것은 오늘이 두 번째였다. 일전에 이미 춤을 익히겠다 찾아 갔을 적에 길을 외워두었으니, 굳이 마중을 나오지 않아도 된다 일러둔 차였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 문이 반쯤 열려있었다. 부러 기척을 내며 들어섰다.

월초에는 테이블과 소파를 전부 벽에 바짝 붙여 놓았던 루베르였다. 이번에는 소파와 테이블 따위가 원래 있을 자리보다 밀려나 있기는 했으나, 이전처럼 앉기 저어할 만큼은 아니었다.

과했던 것을 알아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는 이미 익힌 춤을 추며 노니는 것 외에도 다른 일로 시간을 보낼 작정인 것인지.

손수 차가운 차를 잔에 옮기고 있던 루베르가 환한 낯으로 나를 반겼다.

“아, 왔어? 일단 뭐 좀 마실래?”

“예.”

아이의 방에서 마주 앉아 찻잔을 기울이고 있자니, 괜한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루베르가 오늘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탓인지, 자리에 앉혀놓고 들뜬 어조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탓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춤을 핑계로 나를 부른 것이냐 물을 수는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묻는다면 대답할 길이 없었다.

하자는 대로 따라오는 제가 가장 문제인 것이 아닌가.

보아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다고,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루베르 탓에 뺨이 간질거렸다.

양손으로 찻잔을 감싼 채 앉아 시험 이야기나 늘어놓았다.

루베르와 함께 듣는 몬스터와 철학 수업은, 그 수업의 성질에 맞게 약하다고 평가되는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중간고사 전에는 슬라임을 비롯한 하급 마물에 대하여 배웠고, 이번 달에는 고블린이나 오크 등 낮은 지능을 가졌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마물에 대하여 배웠다.

그중 오늘 화두로 삼은 것은 보물 고블린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블린은 소형 마물 중에서도 키가 작은 마물이었다. 대개 녹색이나 푸른색의 질긴 피부를 갖고 있는데, 성체의 크기도 130cm를 넘는 일이 없다고 했다. 체구가 작아 다른 마물의 먹이가 되기도 하는 그것들은 짧게나마 인간의 언어를 학습할 수 있었다.

인간의 말을 쓰는 몬스터라니. 과연 마음 약한 이라면 딱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내공이 실려 검이 징징 우는 소리를 내는 것에도 크게 감명하는 것이 사람이었다. 제 검을 제 자식인 양 알뜰살뜰 끌어안고 사는 무인이 어디 한둘이던가. 숨이 붙어있는 짐승을 상대로라면 아마 더할 테지 싶었다.

고블린은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여 탐욕스럽게 그러모으는 습성이 있었다. 고블린들 중에 지위가 높거나 힘이 세서 각종 보물을 짊어지고 다니는 놈들을 보물 고블린이라고 불렀다.

수업시간에 배운 것은 그 정도까지였다.

“이번에 책에서 봤는데, 대부분의 보물 고블린은 섀턴 사막에서 발견된다고 하더라. 특히 오웬에서도 한참 서쪽으로 가야 하는 오아시스 근처에 많다고 했어.”

“그래요?”

“응. 섀턴 사막에서 길을 잃고 죽은 방랑자들의 물건을 가져다가 살아있는 인간에게 거래를 청한대. 보통 식량이나, 더 반짝이는 다른 물건과 교환을 하고자 한다고. 인간의 말을 하는 고블린이 있는 것처럼, 고블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나 봐.”

루베르의 눈이 흥미로 반짝거렸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으응. 그랬던 적도 있었지.”

내 아비는 아직 소백작이었다. 조부가 살아있어 백작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다.

자식을 셋이나 둔 다 큰 어른인데도 그러니, 이 녀석도 마찬가지일 것이 아닌가. 황제의 위를 물려받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해도 좋을 것이다.

“나중에 혹시.”

그러나 나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이 아이와 둘이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지난 에른하르트 가 소풍 때 이미 겪지 않았나. 지위 높은 이들은 전생의 내가 그러하듯 훌쩍 맨몸으로 나다닐 수 없었다. 시종과 기사들을 줄줄이 끌고 다니는 유람을 청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이 아이가 황자인 것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루베르가 반짝이는 눈으로 흥미를 보이며 내 쪽으로 몸을 가까이 기울이는 모습을 보았다.

이 아이가 언제까지 나를 이렇게 가까이 여길 것인가.

“혹시, 뭐?”

“아니, 아닙니다.”

“⋯왜? 무슨 말을 하려고.”

“그게⋯.”

루베르가 불안해하며 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지 말아라, 하고 손을 뻗어 아이가 입술을 물어뜯지 못하게 막았다. 하긴 못 할 말도 아니었다.

“혹여 나중에 타국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진다면, 제가 호위를 서겠다는 이야기를 할 참이었는데.”

“⋯응. 그런데⋯?”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요.”

“어? 왜, 왜 필요가 없어?”

“그야, 선배를 지킬 인물이 한둘이 아닐 것이고⋯.”

“아냐, 필요해.”

“⋯.”

호위가 필요한 것인지, 내가 필요한 것인지.

차마 묻지 못하고 내 앞에 둔 차를 단번에 들이켰다. 빈 잔을 내려놓을 적에 조심하지 않아 잘그랑 소리가 났다. 몸을 일으키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하려던 것을 할까요. 연습을 하고⋯.”

“으응.”

“식사는 나가서 먹는 것이 좋겠습니다.”

“응, 그러자.”

배시시 웃는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무엇이 두려운지도 모르면서 덜컥 겁이 났다. 루베르의 허리 뒷켠에 손가락을 걸고 좋은 노랫가락에 맞추어 발을 움직였다.

내 손 위에 가볍게 얹힌 소년의 손은 뜨겁고 보드라웠다.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 아주 큰 잘못을.

* * *

11월. 시험의 달이 도래했다.

몬스터와 철학의 만남, 영지경영 기초, 마법생물의 성장과 이해.

이렇게 단 세 과목만 이론 시험을 치르는 나는 다소 여유로웠다. 몬스터와 철학 시험은 루베르가 노트를 챙겨주었고, 영지경영 기초 시험은 쉐이든과 데미안이 함께 답안을 궁리해주었다. 마법생물 시험은 또 에드윈이 챙겨주었다.

내가 전생에도 현생에도 인복은 많은 모양이지. 마음이 기뻤다.

익숙하게 첫 주에 시험 범위와 시험문제를 듣고, 둘째 주에는 아이들과 모여 공부를 했다. 도서관을 들락날락하며 수 권의 책을 읽었다.

한 학기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치렀으니, 벌써 내게는 여덟 번째 시험 기간인 셈이다.

아직 시험을 보는 것이 서툴러 끙끙거리는 빌 브라운에게 내가 받았던 노트를 전해 주고 챙겨주었다.

그런 나를 보고 쉐이든은 하루 종일 꾹꾹 눌러 참다가, 저녁 시간에 내 어깨를 두드리며 크게 웃었다.

“왜 그리 웃어?”

“아니, 너도 선배 다 됐네. 진짜 신기하다⋯. 다 컸네, 우리 미카.”

“그럼.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지.”

쉐이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았다. 칼립스의 수업을 처음 듣고 놀라 방에 숨어든 것을 또 떠올린 모양이지. 이제는 그날의 일을 생각해도 민망하지도 쑥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쉐이든의 머리를 꾹 누르며, 너 할 일을 하라 떠밀어 보냈다.

수요일 저녁.

윌턴 로버츠는 내가 손끝의 감각을 첨예하게 다스리는 데 익숙해지자, 특수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실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느다란 실을 잡아당겨 큼직한 나뭇등걸에 꽂힌 비도를 회수했다.

중원에서도 천잠사를 사용하는 무공을 들어보았다.

천일을 산다는 영물 누에, 천잠에게서 뽑아낸 실을 천잠사라 불렀다. 내공을 실어 강한 절삭력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적의 사지를 단숨에 잘라내는 잔혹한 수는 은월단 살수들의 특기였다.

그 무공이 궁금하여 일전에 낚싯대에 내공과 오러를 번갈아 실어가며 골몰한 적이 있었다. 확실히 평범한 낚싯줄보다 윌턴이 내게 건네준 미스릴사가 무기로는 더욱 적합했다.

나는 다섯 손가락에 미스릴사를 걸고 윌턴을 바라보았다.

“⋯흐음.”

칭찬하는 말이 돌아오지 않아도 칭찬인 것을 알았다. 윌턴은 희로애락의 폭이 크지 않은 사내였다. 그 입꼬리가 슬쩍 비틀려 올라간 것을 보고 나 또한 웃었다.

“그래, 이달에 가르칠 것은 여기까지로군.”

“그 말씀은.”

“그래, 다음 주부터는 시험공부나 하도록 해라. 나도 이제 나오지 않을 테니.”

나는 화들짝 놀랐다.

비도술과 은신술, 그리고 미스릴사를 사용한 몇 가지 잔재주를 배우긴 했으나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려면 멀었다.

루베르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루베르를 붙잡고 익힌 비도술과 윌턴을 붙잡고 익힌 비도술 간에는 하늘과 땅만큼 큰 간극이 있었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고 윌턴이 흥 코웃음을 쳤다.

“다음 학기에도 마찬가지로, 수요일 이 시간에 보지.”

“⋯예!”

아. 그러고 보니 윌턴도 수업을 마치고 방학을 보내러 갈 때가 되었다. 그제야 안심하여 웃는 낯을 보였다.

오늘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고 팔짱을 낀 채로 큼직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윌턴이 답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 그럼 이번 학기 마지막으로 질문.”

나는 매 수업시간마다 이 보법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어떻겠느냐, 이 무공은 이런 식으로 사용하면 안 되느냐 하고 이런저런 것을 따져 묻고는 했다.

몇 차례 그런 일을 겪은 뒤 수업이 끝날 적마다 그날의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답해주던 윌턴이었다.

그러나 오늘 배운 것들은 이전에 배운 것을 능숙하게 가꾸는 과정이었으니 크게 질문할 것이 없었다. 나는 고민하다 물었다.

“이제 교수님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뭐?”

“방학 주간에, 어느 지역에 가 계실 것인지가 궁금하여⋯. 제가 괜한 질문을 한 것이라면 대답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윌턴 로버츠를 친근하게 여겨 꺼낸 질문이었다.

그의 수업을 듣거나 매주 얼굴을 마주한 것이 벌써 일 년 반이 되었다. 그런데도 그의 사적인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일주일에 두 번만 아카데미에 오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막연히 제국 연감 부서의 일로 돌아다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정도였다.

“그래, 그게 궁금하다는 말이지⋯.”

“예.”

대답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윌턴이 흡족한 얼굴을 하고 제 턱 아래를 쓸었다. 매끈하고 얄쌍하여 수염 한 톨 보이지 않게 정리한 턱은 만질 것도 없어 보였으나, 그래서 더욱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한 번 볼 생각 있나?”

“예?”

“내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

그렇게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으나, 흥미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밝은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웃은 윌턴이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럼, 시험이 끝나고⋯ 하루 정도만 시간을 내 봐. 이왕이면⋯ 화요일이 좋겠군.”

“예, 교수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묘한 기대로 가슴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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