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나는 아이의 손등을 내 손등으로 툭 두드리며 재촉했다. 한참 딴청을 피우던 마리앤이 으으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미카엘, 은근히 곁에 사람 안 두잖아요. 그런데 그 뒤로 내내 황자님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니까 모를 수가 없었어요. 그 선배 표정도 표정이고.”
“⋯표정?”
마리앤이 내 등을 파앙, 힘 있게 두드렸다.
“누굴 좋아하는 사람은 눈빛부터 다르거든요. 나도 그랬고.”
“⋯.”
“미카엘이 뭘 걱정하는지도 알겠더라구요. 그런데요, 전 쉐이든이랑 생각이 좀 달라요.”
나는 마리앤의 표정을 살폈다. 한참 뛰고 구르고 하여 땀과 흙먼지가 배어든 얼굴을 한 마리앤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개구진 표정이었다.
“받아줄까 말까 고민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해 봐야죠. 상대가 날 아무리 좋아하면 뭐해요?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인 거예요, 미카엘. 사랑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
“해결 방법은, 나중에 생각하는 거예요. 일단 전 그래요.”
마리앤은 벌떡 일어나 제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뽀얗게 먼지가 일었다.
“수업료 필요하면 말해요. 연애상담 정도는 언제든지 해줄 테니까. 그럼, 오늘도 화이팅!”
호다닥 달아나는 마리앤의 뒷모습을 멀거니 보았다. 허. 절로 헛웃음이 샜다.
새벽에 마리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 뒤 바로 루베르의 얼굴을 보자니 껄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미 다 알면서도 아이를 놀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겉으로 티낼 수 없는 마음이었다.
먼저 인사하는 루베르에게 묵례하여 아는 체하고 언제나처럼 나란히 서서 대련을 구경했다. 그러고 있자니 또다시 뺨에 진득한 시선이 닿았다. 가슴 한켠이 근질거렸다.
“수업 들어야지요.”
저를 돌아보고 한 말이 아니어도, 루베르는 제게 한 말인 것을 재깍 알아들었다.
다시 대련하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둔 루베르가 얌전하게 구는 것이 또 마음이 쓰여, 이번에는 나도 대련에 집중하지 못했다. 검이 여덟 번 부딪히는 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고심하던 아해가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그 목소리에 벌써 서운함이 스몄다.
“전에는, 봐도 된다면서.”
“수업시간이 아닐 때에는 괜찮습니다.”
“⋯그건.”
볼멘소리를 내려던 루베르도, 내 말이 옳다 여겼는지 잠잠했다. 아이가 귓속말을 할 적마다 귀 끝이 간지러웠다.
“⋯우리, 이번 주 토요일에도 연습할까?”
“⋯.”
춤 얘기였다.
다음 달에는 시험 기간인 탓에 주말에도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연습을 더 하고자 한다면 이번 달 내에 전부 해치워 두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혹시, 이 아이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사방에 소문나면 어쩌나 싶었다.
그러나 또 생각하기로는, 제대로 정을 통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풋정을 홀로 품고 있는 것뿐인데 누가 흉을 보겠나 싶기도 했다.
사랑을 그리 중시하는 시어런이니 이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루베르는 아직 황제가 되기 전이고, 혼약을 정한 상대도 없었다.
슬쩍 루베르를 올려다보았다. 루베르의 시선이 까맣고 간지러웠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이의 얼굴에 서서히 스미는 미소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저도 웃게 되었다.
기막힌 일이다. 제가 정이 들어도 너무 많이 들었다.
그래도 유일 산맥에 오르고 나면 한동안 오래 못 볼 아이였다. 이 정도는 괜찮다. 이 정도까지는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이고 서늘한 속을 달랬다.
오러와 마나 시간에는 메이지 볼더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매주 목요일마다 나를 보며 재촉하고 떼를 쓰는 일에 조금도 소홀하지 않던 놈이라 무척 의아했다.
“⋯메이지 볼더는 어디 갔습니까?”
“하하, 그게⋯.”
더글라스는 허, 하고 웃으며 민망한 표정을 했다.
“저희 없는 데서 단전을 만들어보겠다고 하다가⋯. 지금 몸이 좀 상했어요.”
“그 무슨.”
“그래도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서⋯. 요양 좀 하시다가, 다다음 주에는 돌아오신다네요. 그때까지는 미카엘 영식도 굳이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요. 주요 과목 시험이 끝나면,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한 번 들러주세요.”
“그⋯.”
정말 미친놈인가.
그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은, 더글라스가 무척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깍듯하게 인사하고 교수실을 나섰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가까이 지내는 마법사 셋이 다 그 성정이 무척 독특했다.
마리앤도 얌전하지는 못했고, 에드윈의 까탈스러움은 소문이 자자했으며, 볼더는 늘 해괴한 짓을 하고 다녔다. 아이들을 잘 보살펴야겠다, 속으로 다짐을 했다.
* * *
금요일 오후. 제 갈 길 가려던 에드윈을 붙잡았다. 라넌큘러스에게 마나를 먹이는 것을 도와달라는 핑계였다.
사실 몇 번 해 보니 라넌큘러스에게 마나를 먹이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볼더가 사고 친 것을 보고 깊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이 아이가 아직 어려 머리가 굳지 않았을 적에 좀 더 사람처럼 대해 두어야겠다 하는 생각이 있었다.
내 속내를 모르는 에드윈은 허 하고 웃더니, 역시 저 아니면 못 하겠냐고 뽐을 냈다. 아이를 앞장세워 방어 수식이 새겨진 강당으로 향했다.
에드윈이 하는 말마다 그래그래 네 말이 다 맞다 하고 응석을 들어주었더니, 녀석은 저를 우습게 보냐며 또 빼액 소리를 질렀다.
“제가 선배를 왜 우습게 봅니까?”
“아니, 너 지금 눈 반만 뜨고 있잖아! 내 말을 듣고는 있는 거야?”
“예?”
“하⋯ 진짜. 똑바로 해.”
“예.”
아니다 달래는 일이 퍽 힘들었다. 하여간 까다로워 기분 맞추기가 어려웠다.
강당에 도착해서, 라넌큘러스 두 마리를 각자 앉혀두고 마나를 먹이는 법이 여럿 있는 것을 배웠다.
수업시간에 들은 것으로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던 서클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길고 상세하게 설명을 들어 알게 되었다.
자그마한 새를 아이 어르듯 품에 가까이 안았다. 쉴 새 없이 짹짹거리던 녀석이, 고 조막만만 부리로 내가 내어놓는 마나를 꿀떡꿀떡 잘도 삼켰다.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러다가, 배가 볼록해진 라넌큘러스가 이제 놓아달라 홰를 치기에 순순히 손을 뗐다. 새들은 저들끼리 놀라고 풀어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것들이⋯ 살아있지 않은 게 맞습니까?”
“갑자기 또 무슨 소리야.”
“노는 것을 즐기고, 뭔가 먹고, 애교를 부리고 하는데⋯.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게 이상합니다.”
“어어, 뭐⋯. 너 정령 본 적 있어?”
“없습니다.”
“이게 또 사고를 하고 말하고 움직이고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러니까 윤리적으로는 살아있다고 보는 게 맞긴 한데⋯. 마법생물과 진짜 생물의 가장 큰 차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느냐, 있느냐 하는 것이거든.”
“⋯죽음에 대한 두려움?”
“어. 정령들은 자기가 죽을 것이란 생각을 안 해. 그건⋯. 그냥 마나의 덩어리 같은 거거든. 상위 정령들이랑은 의사소통이 가능한데, 마나에서 태어나서 마나로 돌아가는 건⋯. 자연 현상의 일부일 뿐이라고 하더라. 뭐, 개체차는 있지만.”
“⋯으음.”
“마법생물도 그래. 저 죽으라는 명령을 듣고도 무서워할 줄을 몰라. 마나만 있으면 살 수 있으면서도, 괜히 사람처럼 잠도 자고 놀기도 하는데⋯. 필요해서가 아니라 재미있어서 행동을 모방할 뿐이야.”
“⋯모방?”
“어. 익숙하니까 따라 하는 거지. 곁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니까. 사실 녀석들은 마나가 떨어지지만 않으면 수십 일을 전속력으로 날고도 싫은 일이란 생각이 없어.”
새삼 곡예 하듯 강당 여기저기를 쏘삭이며 날아다니는 두 녀석에게 시선을 두었다. 적금빛과 푸른빛을 가진 라넌큘러스들은 언어가 되지 못한 탄성을 쏟아내며 눈을 반짝였다.
“그 덕분에, 위험한 지역으로 가 달라는 명령도 거절하는 법이 없지. 그래서 메시지 전달도 할 수 있는 거고⋯.”
“⋯흠.”
나는 앨런 라게르의 어깨 위에 얹혀있던 큼직한 새의 형상을 떠올렸다.
지금 내가 맡아 기르는 작은 녀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게 크고 또렷하게 말을 할 수 있는 녀석이라면 높은 산도 쉬이 오를 수 있으리라 싶었다.
“그러면, 선배. 제가 유일 산맥에 있을 적에⋯. 도시를 떠나 있을 때.”
“어.”
“발렌티아나 에른하르트에 문제가 생기면, 라넌큘러스를 사용해서 말을 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 뭐, 그 정도야.”
어쩐지 미덥지 못해 에드윈의 표정을 가만히 살폈다. 에드윈이 또 도끼눈을 떴다.
“뭐야, 너 나 못 믿어?”
“아니⋯. 아닙니다. 마탑에 든 마법사들이 바깥소식에 어둡다는 말을 들어서.”
“어이없네, 진짜. 그러면 부탁을 하지 말던가.”
“선배는 정치에 능하실 것 같아 믿음이 갑니다.”
“칭찬이야, 욕이야?”
“칭찬입니다.”
에드윈이 또 화를 낼 것 같은 기색이기에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런데, 유일 산맥에 가는 것이 마법사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은 맞습니까?”
“하⋯. 고농도의 마나를 접하는 일이니까, 힘든 만큼 보상은 확실한 편이야. 쉴 새 없이 유일 산맥에 들락날락하는 마법사들은 좀 더 이르게 대마법사가 된 사례가 있기도 하고.”
“⋯음.”
“대신에 죽을 확률이 좀 많이 높아.”
“예?”
마리앤을 끌고 유일 산맥에 올라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그보다 무서운 말이 없었다. 놀라 자세히 따져 물었더니 에드윈은 교복 위에 곱게 차려입은 망토를 여미며 설명해 주었다.
“기사와 마법사의 가장 큰 차이가 뭐라고 생각해?”
“⋯체력?”
“글쎄. 나는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왜요?”
“기사는 무슨 일이 생기면 반사적으로 몸을 쓰고, 마법사는 무슨 일이 생기면 반사적으로 머리를 쓰거든. 그런데 실전에서는 생각만 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 패닉에 빠지면 그 생각도 못 하고.”
“⋯아.”
“낙오되는 일만 없게 해. 뭐, 필로덴도르라면 그래도 잘 버틸 것 같긴 한데.”
내가 마리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도, 이미 내가 왜 이런 것을 물었는지 알고 있는 투였다. 나는 가만히 입을 닫았다. 에드윈은 조소하며 한 마디 덧붙였다.
“줄을 잘 잡았네, 그 애. 이렇게 지켜 줄 기사님도 있고.”
⋯이런 식으로 말을 하니 친구가 없지.
“아니, 또 뭔데 그런 표정이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에드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치 빠른 아이가 또 성질을 낼 것 같기에 일어나자 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기숙사 앞에서 헤어질 때까지 궁시렁거리는 놈이 비 맞은 땡중보다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