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59)화 (159/176)

159.

사랑, 사랑, 또 사랑에 대한 예찬을 들을 적마다 그림자 속에서 배우가 하나씩 제 모습을 드러냈다. 여섯 신은 여섯 인물에게 각각 관을 씌워주었고, 아홉 번째 신은 그 여섯 왕을 하나씩 꼼꼼히 살피다 무대 뒤로 사라졌다.

어쩐지 그림자가 숨어든 자리에 오래 시선을 두게 되는 구성이었다.

극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황홀경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재미있었어?”

“예. ⋯이런 연극이라면 몇 번을 더 보아도 괜찮겠습니다.”

날이 좋았다. 돌아가는 길에는 마차를 타는 대신 걸어서 돌아가기로 했다.

연극에 대한 이야기로 도란도란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어느 신의 의상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여섯 왕들이 쓴 왕관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루베르가 물었다.

“만약에, 에른하르트 영식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이뤄질 수 없을 것 같으면⋯. 어떻게 할 거야?”

“⋯음.”

뜻 없이 묻는 것일까. 무어라 대답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선배는요?”

“나는, ⋯글쎄.”

루베르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깨와 어깨 사이에 주먹 하나 들어갈 만큼 거리를 두고 걸었다.

손이 맞닿는 일은 없었다.

잠시 적막하다가 루베르가 다시 말을 붙여왔다. 대부분의 물음이 어렵지 않아 쉽게 답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이가 어쩐지 한 손으로 제 입을 계속 가리고 있었다. 무척 의아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연극을 보는 동안에도 그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저 턱을 괴고 있는 줄로 알았는데, 걸으면서 턱을 괼 일이 있겠는가.

기숙사로 돌아갈 적에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왜 입을 가리느냐 물었더니 그 답이 무척 걸작이었다.

“⋯그, 아까 그 약 냄새가, 계속 나는 것 같아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크게 웃다가 아이가 토라져 한참을 달래 주었다.

* * *

10월 첫째 주 금요일.

드디어 학생들이 가진 알이 모두 부화했다.

지난달, 알을 틔우는 데 실패한 많은 아해들이 저들끼리 도와 한 달을 꼬박 노력한 덕분이었다. 내가 에드윈에게 도움을 받은 것과 같았다.

그 덕분에 강의실 안에는 쨍알거리는 새 소리가 가득했다.

첫 달에 태어난 라넌큘러스들은 주먹만 했고, 새로 태어난 라넌큘러스들은 손가락만 했다. 보송보송한 것들이 저도 새는 새라고 부리로 깃을 고르느라 분주했다.

어째 이번 생에는 새와 닮은 것들과 연이 깊은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쉬이 정이 들었다.

나는 에드윈과 나란히 교실에 앉아, 자꾸만 달아나려는 파란 새를 붙잡아 내 손안에 가두었다. 내 것은 파란색이고, 에드윈의 것은 적금색이다. 단풍잎처럼 벌건 놈도 있고, 은행잎처럼 노란 놈도 있었다.

모든 라넌큘러스가 각각 저마다의 색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처럼, 라넌큘러스는 자신이 섭취한 마나의 색을 닮습니다. 이후 꾸준히 섭취하는 마나의 빛에 따라 깃의 색이 변합니다.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사의 라넌큘러스가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앨런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라넌큘러스는 사람의 머리통보다도 거대한 새였다. 그 꼬리깃이 앨런의 허리에 닿을 만큼 길고 윤기가 났다. 자개처럼 반짝거리는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여겼다.

“이런 습성을 사용하여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마법사들도 종종 있습니다. 라넌큘러스에게 자신의 서클과 다른 빛의 마석을 꾸준히 섭취하도록 하면, 이렇게 여러 색이 뒤섞인 라넌큘러스를 볼 수 있지요.”

라게르 교수는 포함한 마법 생물의 여러 속성과 습성에 대하여 자세히 해설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라넌큘러스가 섭취하는 마나의 양에 따라 성장 속도가 달라지며, 앨런 라게르의 어깨에 얹힌 것만큼 자라려면 족히 사 년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정도로 나이가 들어찬 라넌큘러스여야 주인의 곁을 떠나 메시지를 원활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내심 내가 일깨운 녀석을 탐내고 있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라넌큘러스를 과제로 제출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옅어졌다.

“그럼 이제, 라넌큘러스에게 언어를 학습시키는 법에 대하여 알려드리겠습니다.”

앨런의 설명은 자세하고 상세했다. 라넌큘러스는 태어난 직후부터 4년간 끊임없이 마나와 목소리를 먹어치운다고 했다.

많이 먹이고, 많이 들려주는 것. 듣기에는 쉬워 보였지만, 이미 알 하나를 마나를 지나치게 많이 먹여 돌로 만든 전적이 있는 내게는 영 막막하기만 했다.

수업이 끝나고 필기한 것을 들춰보며 고심하고 있자니 에드윈이 먼저 친절을 베풀었다.

“왜. 도와줘?”

“예.”

“⋯너는 길게 대답하면 죽니?”

“예? 그럴 리가요.”

“⋯아니다, 내가 앓느니 죽지.”

“⋯예?”

“아, 됐다고!”

또 괜히 성질을 부린다 싶었다. 가만히 두면 또 저 나름대로 마음을 풀 것을 알아 신경 쓰지 않았다. 한숨을 폭폭 내쉬던 에드윈은 내가 얌전히 뒤따르자 곧 우쭐한 표정을 되찾았다. 그 곁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아무래도 마나를 써야 하니 제가 아는 방어 마법이 걸린 강당을 대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에 도움을 청하기 잘했다 싶었다.

그러나 강당에 거의 다 왔을 적에, 나는 눈앞의 인영을 보고 잠시 당황했다.

마법동에 루베르 저 아이가 올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선배?”

“에른하르트 영식.”

설마 나를 찾아다닌 것인가? 내 금요일 오후 수업은 마법생물 수업인 것을 모를 리 없는 루베르였다. 당장 내일도 도서관에서 마주칠 녀석이었다.

급한 일이 있나 싶어 루베르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눈으로 봐서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잠깐, 얘기할 것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루베르의 시선이 에드윈을 향했다. 에드윈은 황자를 대하는 예의에 걸맞게 얌전히 묵례하며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욱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와서 이렇게 에드윈을 쫓아낸다고?

내가 아는 루베르는 그렇게 무도한 놈이 아니었다.

“바쁜 일입니까?”

“그런 건 아닌데⋯.”

“그렇다면 내일 이야기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많이 바빠?”

루베르가 가련한 목소리를 자아내자, 에드윈의 시선이 잠시 루베르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다음 내어놓은 에드윈의 목소리는 겨울바람처럼 소슬하다.

“나도 해야 할 과제가 있는 걸 잊었네. 난 오늘 먼저 들어간다.”

“⋯.”

“이미 태어난 라넌큘러스는 배가 부르면 알아서 마나를 못 먹겠다고 난리를 칠 테니까, 위험할 일은 거의 없을 거야. 아침저녁으로 적당히 마나를 풀어내 보고⋯. 혹시 못 하겠으면 찾아와.”

“예, 선배.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다음 주에 봐.”

내게 짤막한 인사말을 남긴 에드윈이 루베르를 향해 공손히 읍했다. 루베르는 마주 묵례하여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내가 입을 대지 않아도 저들끼리 위계에 따라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신기했다.

또한 무척 갑갑하여 탐탁잖았다. 내 일정을 왜 제 맘대로 정한단 말인가?

불만스러워 바로 입을 열지 않고 에드윈이 가는 모습을 멀거니 보고 있었다. 곧 위엄 있는 낯에서 평소처럼 쩔쩔매는 얼굴이 된 루베르가 나를 불렀다.

“⋯에른하르트 영식?”

“무슨 일이십니까?”

아까와 꼭 같은 물음이었다. 답을 듣지 못한 물음이었다. 내 태도가 차가운 것을 알아챈 루베르가 난처하게 눈썹을 끌어내렸다.

그 고운 아미에 서운함이 주렁주렁 매달리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별일이 아니긴 한데⋯.”

“예.”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내가⋯. 영식에게 춤을 가르쳐 주고 싶거든.”

“예?”

난데없는 소리에 얼이 빠졌다.

새로이 태어나서 팔다리를 제대로 가눌 수 있게 되자마자 내 주변 모두가 춤 이야기를 참 많이 꺼냈다.

그러나 중원에서 춤은 가인들의 일이었다. 무예를 닦는 몸을 흥청망청 휘두르고 내돌리는 것을 놀이 삼아 할 리 있겠는가 싶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다급하게 이런 것을 요청하는 까닭이 있을 터였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루베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이의 얼굴에 장난기가 없이 진중한 것을 보고 답했다.

“무슨 이유로?”

“그게⋯. 이제 에른하르트 영식의 데뷔탕트가 정말 얼마 안 남았잖아.”

“예.”

“데뷔탕트의 시작을 열 때에는, 그 해의 열다섯 된 소년 소녀들이 다 함께 춤을 뽐내는 자리가 있거든. 물론, 본인이 정 싫다면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

“사교댄스는 일종의 매너⋯같은 거라서. 발렌티아 공작가와 에른하르트 백작가의 피를 이은 영식이, 전혀 춤을 못 춘다고 한다면⋯.”

“아.”

루베르가 이렇게 급하게 나를 찾아온 까닭을 알게 되자 속절없이 마음이 녹았다.

아카데미에 처음 입학한 내가 배곯을 것을 걱정하여 쉐이든이 찾아온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남들 눈에 내가 부족하게 비칠 것이 걱정되어 이 늦은 시각에 허겁지겁 찾아왔단 말이었다.

기특한 마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아해의 우물쭈물하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루베르가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내었다.

“물론, 영식이 춤을 싫어한다는 건 아는데⋯. 만약, 만약 괜찮다고 한다면⋯. 주말에 도서관 말고, 내 응접실에서⋯.”

“좋습니다.”

“아, 미안, 역시 좀⋯어?”

“좋다고 말했습니다, 선배.”

그렇게 중한 행사라면 내가 고집을 부리는 것도 멋쩍고 미안한 일이었다.

낯선 여인네의 허리에 손을 얹고 빙글빙글 도는 것보다, 루베르와 연습하는 것이 더 겸연쩍을 일이 없을 것이었다. 찬찬히 생각할수록 괜찮게 여겨졌다.

“허나 제가 배워야 할 것은 아마 남성의 춤일 텐데.”

“괜찮아!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연습한 거라, 어느 쪽이라도.”

“음.”

그렇다면 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다. 긴장한 아이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선배의 방으로 찾아가면 됩니까?”

“⋯응. 어, ⋯언제쯤 올 거야?”

“글쎄⋯. 점심 식사를 하고 바로 찾아가겠습니다.”

“응⋯.”

저 할 말을 마쳤다고 또다시 시들시들해진 아해가 귀여워 웃음이 났다. 루베르를 3학년 기숙사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내 방에 들어서자마자 내 어깨 위에 얹혀있던 라넌큘러스가 삑삑, 아까 들은 단어를 입에 물었다.

“좋습니다.”

“그래, 너도 좋으냐.”

어찌 그 단어만 쏙 골라 재잘거릴까. 무척 귀엽고 우스운 마음에 조그마한 라넌큘러스의 보들보들한 털을 헤집듯 쓰다듬어주며 어르듯 답했다.

삑 하고 높은 소리로 지저귄 라넌큘러스는 퍼드득 날갯짓을 하고 또 말했다.

“좋습니다!”

“그래, 그래.”

재잘대는 라넌큘러스에게 마나를 조금 풀어 먹였다. 벌써 내일이 기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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