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가만히 들었다. 마리앤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얼굴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나는데. 손이 여기까지 올라갔다가 참았어요. 그래도 그 새끼가 백작가 영식이라서.”
“⋯허어.”
“그 대신에 소리를 좀 질렀어요. 욕도 하고. 나한테 정떨어지라고, 완전 미친년처럼 막 책상도 던졌어요. 도망가는 거 보고 나왔는데 그 뒤로는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울고 싶은데 울면 지는 것처럼 보일까 봐 안 울었어요.”
어룽어룽 눈물이 맺힌 얼굴이 안쓰러웠다.
나는 한숨을 눌러 참으며 마리앤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마리앤은 손수건을 받고 제 얼굴을 슥슥 닦더니, 쿨쩍, 코를 먹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너무 너무 너무 화가 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유일 산맥에 가려구요.”
“⋯뭐? 아니, 결론이 왜 그렇게 됩니까⋯?”
“내가 지금 필로덴도르 남작가 영애라서 이딴 짓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내가 강해져서 올리버 컴바인 개새끼한테 글리 오빠를 뺏어 올 거예요. 오빠가 다른 여자랑 결혼하기 전에, 내 힘으로, 내 손으로.”
“⋯허어.”
“그걸 도와줄 사람이 미카엘밖에 없어요.”
“예?”
마리앤의 벌겋게 젖은 눈이 선명하게 빛났다. 나는 속절없이 아이의 목소리에 홀렸다. 마리앤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아이가 덥썩 내 손을 붙잡는 것을 밀어내지 않았다.
“염치없는 거 알아요. 그렇지만 우리 친하잖아요. 어차피 갈 유일 산맥이면, 나도 데려가요.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어요.”
“⋯이제 일 년 하고도 삼 개월 겨우 남았는데도.”
“괜찮아요.”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내가 매일 아침 연무장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마리앤은 그렇게 펑펑 울었던 일이 거짓말인 것처럼 깔깔 웃으며, 저도 함께 하겠다고 쉽게 대답했다.
어찌 되었건 아이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어 기뻤다.
그러나 자리를 파하기 전에 문득 궁금한 것이 있어, 바닥에 깔았던 옷을 탁탁 털며 물었다.
“그런데⋯. 글로틴 테너 영식의 말은 믿을 수 있습니까?”
“아뇨.”
“⋯아니, 그럼 어찌⋯.”
“그냥 믿고 싶은 거예요. 사랑하니까.”
나는 입을 닫았다. 사랑. 알면 알수록 어려운 화두였다.
기실 나와 같은 검술부 학생들이야 일류무사, 소드 익스퍼트 상급 이상의 수준이라면 유일 산맥에 오르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마법부 학생들 중에서 유일 산맥에 가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충분한 마석을 지원받을 수 있고, 서클의 한계까지 닥친 극한 상황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 실력 향상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나 문제는 체력이었다.
그 에드윈 키아드리스도 기숙사에서 마법부까지 조금 빠르게 걸었다고 헐떡거리지 않았나.
유일 산맥은 아무도 그 정상에 올라본 적이 없는 높은 산이었다. 웬만한 결심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때문에 마법부 학생들 중 유일 산맥을 목표로 하는 아이들은 일찍이 체력단련을 하거나 아티팩트를 모으는 등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단 하루도 아깝고 소중했다.
바로 다음 날인 금요일 아침부터 마리앤은 퉁퉁 부은 눈을 하고 나와 함께 연무장을 돌았다.
평소 혼자 달릴 적에는 내키는 대로 숨차게 달렸지만, 오늘은 마리앤을 곁에 끼고 구령을 붙여가며 나란히 뛰었다.
운기조식 하는 법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때문에 내가 마리앤에게 알려준 호흡법은 윌턴 로버츠의 것이었다. 호흡을 길게 갖고 마음을 다스리며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일이다.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도, 마리앤은 이를 악물고 곧잘 해냈다.
마리앤을 다시 돌려보내고 간단히 씻고 중급 검술 수업에 나갔다.
저쪽에서부터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내 안색을 살피며 다가선 루베르가 의아한 듯 눈을 둥글게 떴다.
“어어⋯. 기분⋯좋아 보이네⋯?”
“⋯으음. 예, 조금.”
혹시 소식을 못 들었는가 전전긍긍하는 태도의 루베르가 귀여워 짧게 웃었다.
“마리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힘든 일을 계기로 삼아 큰 꿈을 꾸겠다기에.”
“큰 꿈?”
“예. 저와 함께 유일 산맥에 가겠다고, 아침부터 연무장을 다섯 바퀴나 돌고 들어갔어요.”
“⋯필로덴도르 영애도, 유일 산맥에?”
어쩐지 크게 놀란 기색이었다. 루베르가 몇 번이나, 필로덴도르 영애도 같이 간다고? 하고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두 번째 물음에는 답해주고 세 번째 물음에는 답해주지 않았다.
또 저를 빼놓고 논다 서운한 마음을 먹은 것인가 싶어 무언가 달랠 말을 꺼내려는데, 루베르가 조금 더 빨랐다.
“⋯혹시, 키아드리스 영식은⋯.”
“그 선배는 마탑으로 바로 간다고 하지요. 워낙 깔끔떠는 사람이라 유일 산맥에 올라갈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하던데요.”
“아, ⋯그렇구나.”
루베르가 휴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녀석이 시무룩한 낯을 하는 것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손을 들어 아이의 좁혀진 미간을 가벼이 눌러 문질러주며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제가 얼른 강해져야 선배도 지켜주고 하겠지요. 선배는 황제가 되실 몸 아닙니까.”
“⋯응.”
곱게 대답한 루베르는 오늘따라 더욱 열심히 수련을 했다.
무척 흐뭇했다.
* * *
이번 학기 내내 주말에는 대부분 루베르와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 루베르와 이렇게 놀 일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니 아까워서 그랬다. 유일 산맥에 다녀오고 나서는 서로 맞존대를 해야 할 사이가 될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이 들 적마다 마음이 쓰였다.
나는 오랜 세월을 견뎌 본 사람이었다. 무척 가깝던 이가 멀어지는 일이야 수도 없이 겪었다. 영원을 함께할 것 같던 동무들도 나이가 들어 가정을 꾸리면 멀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어 자꾸만 아이를 챙기게 되었다.
때문에 시험이 끝나자마자 날을 정해 루베르와 외출을 나왔다. 내가 가려고 하는 곳을 듣고 루베르는 의아한 듯 보였으나 몸을 빼지는 않았다.
반듯한 처마에 잘 빚은 약재를 주렴처럼 드리워 둔 약재상에 도착했다. 지난 학기 중급 연금 수업에서 가격에 맞춘 훌륭한 약재 보따리를 내준 뒤로, 나와 동무들이 매달 꼬박꼬박 찾아 든 곳이었다.
시험 일이 오기 전에 미리 이런저런 것을 요청해 둔 덕분에 준비된 꾸러미를 바로 받을 수 있었다.
익숙한 낯의 서글서글한 여인이 크게 웃었다.
“아니, 이렇게 먹는 건 또 어디서 배워 왔대? 말한 대로 원물째 오래 달여 끓이기는 했는데, 이게 몸에는 좋을지 몰라도⋯. 어휴, 이런 냄새는 내 사십 평생 처음 맡아본다니까.”
“한 번 맛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럼, 그럼. 이쪽 봉투에 든 게 각각 일회분이야.”
나는 봉투 하나를 열었다. 중원에서는 매 끼니 약재를 달여 사기그릇에 담아 먹는다 하였으나, 루베르에게 매 끼니 약을 달여 줄 수는 없을 테니 미리 부탁을 좀 했다.
봉투 하나를 열어 맛을 보았다.
제갈 아무개가 식사 때마다 달고 먹던 탕약과 맛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달큰하고 씁쓸한 것이, 양기를 띠고 있어 몸에 좋겠다. 천천히 음미하여 삼키고 흡족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괜찮아?”
“예. 부탁드린 딱 그대로입니다. 감사합니다.”
멀뚱히 서 있는 루베르를 불러 다른 봉투를 열어 건넸다. 그 냄새를 맡더니 루베르가 아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걸, 먹어⋯? 내가⋯?”
“예. 선배 주려고 일부러 주문해 둔 것입니다. 맛보세요.”
“⋯그, 이거, 뭘 넣은 건데⋯?”
“자라에 약초 몇 가지를 더했습니다.”
“자, 자라⋯?”
“예.”
아이가 망설이는 동안 봉투 여럿이 든 찬합을 손에 들었다. 아이가 먹지 않고 한참을 망설이기에 재촉했더니, 루베르가 눈을 딱 감고 단숨에 삼켰다.
좀 찬찬히 마시지, 급히 먹다 체할까 걱정이 되어 그 표정을 살폈다. 봉투 하나를 다 비운 루베르가 눈도 입도 열지 못하고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엽고 우스워 미리 준비해 둔 사탕을 입에 물려주었다.
쓴 약을 먹는 아해야 늘 엇비슷한 법이다. 어여쁘다 착하다 크게 칭찬하며 달래 주었다.
“잘했습니다.”
“⋯흑. 콜록, 흡.”
루베르가 작게 몇 번 기침을 했다. 내가 그 등을 두어 차례 쓸어주는 모습을 본 약재상 여인이 웃음을 참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도 몸살 나도록 귀여운 놈이니 저 이가 보기에 오죽 귀여울까. 빈 봉투를 버려주겠다 하기에 루베르의 손에서 텅 빈 봉투를 빼내 여인에게 넘겨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이 약이⋯. 여기 옆에 있는 청년 거야?”
“예.”
“뭐?”
루베르가 놀라 펄쩍 뛰는 것을 보고, 그 손에 찬합을 넘겼다. 일단 쥐여 주는 것을 받은 루베르가 찬합과 나를 번갈아 보기에 다정히 설명을 곁들여 주었다.
“선배가 요사이 몸이 허해 피로한 기색이기에, 신경 좀 썼습니다. 식후에 한 포씩 꼬박 드세요.”
“⋯.”
루베르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또 무어라 말하려 하다가, 또 멈추었다. 얌전해진 아이를 데리고 약재상 밖으로 나왔다.
입 안에서 사탕을 몇 번 굴리던 루베르가 이내 기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에른하르트 가에서는⋯. 이런 걸 먹어?”
“아뇨.”
“⋯그런데 왜⋯?”
“선배가 좀 더 건강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진심이었다. 내 답을 들은 루베르가 잠시 고민하다가 찬합을 소중히 다른 손에 옮겨 들었다. 몹시 뿌듯하고 기꺼웠다.
루베르가 가련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날 생각해서, 나에게만 주는 거지?”
“예.”
“⋯응. 고마워⋯.”
걷는 길에 문득 루베르가 무척 억울한 목소리로 저는 그렇게 허약하지 않다 종알거렸다. 칭얼대는 소리도 새 지저귀는 소리처럼 귀엽고 어여쁘기만 하여 적당히 넘겼다.
약재상만 들르고 바로 들어가기 아쉽다 조르는 아이를 달래기 위하여, 둘이 함께 연극도 보러 갔다.
일전에 내가 백작 부인에 대한 연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번 투덜대는 것을 들은 적 있는 루베르였다. 미리 보고 싶은 극을 마음속으로 정해 왔다며 권하기에 순순히 따랐다.
세 명의 신이 한 인간을 두고 울고 싸우고 매달리는 극이었다. 아홉 신 이야기에 대한 것은 많이 들었으나 이렇게 눈으로 보니 또 새삼스러웠다.
동료 신을 둘이나 죽이고 나서 시체가 된 사랑을 끌어안고 절규하는 아홉 번째 신의 모습이 무척 절절했다.
멀찍이 서 있는 여섯 신이 은밀한 목소리로 노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