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모든 날 모든 순간이 순리대로 흘렀다.
일주일 남짓 시들시들하던 루베르는 쉐이든의 조언대로, 꼭 껴안고 괜찮다 잘하고 있다 다독여주었더니 정신을 차렸다. 알겠다, 힘을 내겠다 하는 다짐을 몇 번을 받고 나서야 루베르를 달래는 일을 그만두었다.
시뻘건 낯을 보고 있자니 어린 아해를 가지고 노는 기분이 들어 탐탁지 않은 기분이 들었으나, 매양 시들거리는 것보다는 낫다 여겼다.
영지경영 수업의 과제를 위해 부친에게 편지를 보내어 영지의 사업 근황을 물었다.
내 숙제가 아니라 부친의 숙제가 된 것 같아 민망했지만, 부친에게서 거의 완성된 서류철을 받아 생각보다 쉽게 보고서를 완성했다.
칼립스 아그리젠트는 간간이 휘청거렸으나, 이전처럼 지독한 멍을 달고 다니는 일은 없었다. 발터 오르겐이 날마다 휘파람을 불고 다니는 까닭이 그 탓인가 싶었다.
발터는 내가 칼립스의 목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름 조심하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정인에게 손을 올리지 말아라 단단히 주의를 해 두었다.
메이지 볼더의 골렘도 제법 그럴듯한 단전을 만들었다. 더글라스와 볼더는 이제 점혈법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를 시작했다.
나는 아혈을 짚어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수혈을 짚어 사람을 재우는 일은 자주 해 보았으나 그 외의 것에는 서툴렀다. 또다시 지난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마법 생물의 성장과 이해 시간에 과제로 받은 라넌큘러스의 알은 부화하지 못했다. 삼 주가 지나 배가 뚱뚱하고 울퉁불퉁하게 부푼 알을 보이자 에드윈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거, 마나 과잉 현상인데.”
“마나 과잉⋯?”
“어. 너 지난번에 서클 여는 법 배우지 않았어? 왜 이렇게 무식하게 마나를 때려 붓고 난리야. 이거 못 써, 배 터져 죽었어.”
“⋯.”
삼 주나 꼬박 정을 들인 알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에드윈의 어깨 위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작달막한 새를 부럽게 보았더니, 에드윈이 내 손을 이끌어 앨런 라게르에게 데리고 갔다.
앨런 라게르는 싫은 티 내지 않고 죽은 알과 새 알을 맞바꾸어 주었다.
“한 주에 두 번⋯. 잠깐, 시간표 좀 봐.”
“예.”
“화요일, 금요일이 가장 좋을 텐데⋯. 시간이 안 맞네. 수요일 이 시간엔 돼?”
“그 뒤로 개인 교습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
“예. 그 시간에.”
“도대체 뭘 어쩌고 사는 거야⋯. 그럼 그냥 화요일, 금요일 하자. 점심시간에 시간 잠깐 내. 도와줄게.”
“음.”
“또 뭐가 음, 하고 끝나! 감사하다고 해!”
“아. 예, 감사합니다.”
에드윈은 한참 투덜대면서도 주에 두 번 라넌큘러스의 알에 마나를 덧입히는 것을 도와주었다.
내공심법에 익숙해진 내가 한 번에 몸을 통과하는 마나의 양을 가늠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 하여, 마법식을 자아낼 때처럼 얇고 가늘게 마나를 끌어내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8월이 지났다.
* * *
9월, 마리앤은 시어런 아카데미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가 되었다.
시험이 끝난 뒤 마지막 주 목요일 오후였다.
오늘도 나는 더글라스와 볼더를 붙잡고 내가 아는 혈도와 그 기능들에 대해 설명하느라 녹초가 되어 터덜터덜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나가는 아해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닿았다.
“필로덴도르 영애도 너무했다. 좀 더 침착하게 거절할 수도 있었잖아.”
“나였으면 거기서 뺨이라도 때렸을걸. 사람들 다 보는 데서 그게 뭐야.”
“그런가? 와, 그런데 이제 어쩌려나. 글로틴 테너 영식 말이야⋯.”
평소 시어런의 이런저런 일들을 듣고 보는 것을 좋아하던 나였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 아이가 무슨 일을 겪었단 것인지 조금도 알 수 없어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말을 붙이려고 다가서니, 수군거리던 아해들이 꾸벅 인사하고 빠르게 달아났다. 나는 이유를 몰라 아연했다. 그런 일이 몇 차례나 있었다.
그중에 달아나지 않은 어느 한 녀석을 붙잡고 물어보니, 내가 마리앤과 친한 것은 아카데미의 모두가 알고 있으니 본인에게 직접 묻는 것이 좋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발걸음을 돌려 2학년 여자 기숙사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마리앤은 기숙사 앞 정원에 나와 있었다. 낯선 여아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던 마리앤은 나를 보자마자 반짝 고개를 들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내 손목을 거머쥐었다.
새삼스럽게 이 아이가 가장 처음 내 소매를 잡았던 날을 떠올렸다. 그간 많이 친해지긴 한 모양이지. 거친 손에 망설임이 조금도 없었다.
“미카엘, 나랑 잠깐 얘기 좀 해요.”
“⋯그럽시다.”
당혹스럽기는 했으나, 아이가 제 말 들어 줄 사람을 찾는 것을 알아 그냥 두었다. 순순히 마리앤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러나 몇 군데를 들러도 사람이 차 있어 아이가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다음에는 내가 앞서 이끌었다. 윌턴 로버츠와 훈련할 적마다 찾는 작은 연무장이었다.
나와 윌턴이 수없이 즈려밟은 탓에 더 이상 풀 한 포기 나 있지 않은 황량한 공간이었다. 마리앤은 그 한가운데에 선 뒤에야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분을 토해냈다.
“나, 나 너무 화가 나요.”
“무슨 일입니까, 대체.”
“아니, 아니이⋯.”
마리앤이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워낙 잘 웃고 잘 떠들어대는 아이였으나, 눈물을 본 일은 없었다. 당황하여 가슴팍에 매달려오는 아이를 피하지 않았다.
마리앤은 한참을 울었다.
마리앤의 등을 몇 차례 도닥여 주었다. 흠뻑 젖어 퉁퉁 부은 눈을 한 아이가 힘이 들까 겉옷을 깔아 자리에 앉혔다. 마리앤은 한참을 엉엉 소리 내어 울더니 씹어 뱉듯이 말했다.
“올리버 그 개자식, 진짜 징그러운 새끼예요.”
올리버 컴바인은 마리앤의 연인인 글로틴 테너와 가까운 동무 사이라고 했다. 나는 말을 보태지 않고 아해가 편히 말을 쏟아낼 수 있게끔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마리앤은 망설이지 않고 마음속에 쌓아 둔 것을 와르르 헐어냈다.
“오늘, 그 새끼가 저한테 결혼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컴바인이? 아니, 글로틴 테너는 어디 두고.”
“그러니까요! 그게 정말 어이없는 게, 지난 학기에도 한 번 이런 일이 있었거든요.”
올리버 컴바인이 나를 붙잡고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마리앤에게도 글로틴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제가 생각하는 글로틴 테너의 악행을 끌어모아 마리앤에게 마음을 돌리는 것이 어떻겠냐, 내가 더 잘 해 줄 수 있다, 그런 말을 늘어놓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악행이라는 것이 올리버의 것을 모조리 빼앗았다는 이야기뿐이라 처음에는 큰 감흥이 없었다고 했다. 나중에 글로틴에게 물어보고 사과나 하라고 할 생각이었다고.
“그런데 걔가, 글리 오빠는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냥 자기가 날 좋아하니까, 따라서 좋아한 것뿐이라고. 자기 것을 뺏고 싶어서 안달이 난 놈이라고⋯.”
“⋯.”
“그 말을 들으니까 너무 서럽고, 화가 나고, 분해서 한동안 잠을 못 잤어요. 한 사흘 버티다가 글리 오빠를 붙잡고 물어봤죠. 정말 그렇냐고, 날 좋아해서 나랑 사귀는 거 아니냐고. 그랬더니 하는 말이 그래요. 자기가 올리버에게 많이 잘못한 건 맞대요, 그런데.”
“응, 그런데?”
“⋯날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도 맞대요.”
마리앤이 숨을 시근댔다. 나는 잠자코 들었다.
“글리 오빠는, 태어나자마자 정해져 있는 운명이라는 게 싫었대요. 올리버 컴바인이랑 친하게 지내라는 이야기를 너무 들어서 질리고 짜증이 났대요. 그래서 사이가 나빠지면 가신 집안인지 뭔지 그냥 때려칠 수 있을 줄 알았대요.”
그렇게 이어진 말은 정말 여러 차례 곱씹고 생각한 것처럼 숨도 고르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글로틴 테너는 자신이 자라서 다른 것에 눈 돌릴 틈 없이, 기껏해야 저와 동갑내기인 올리버 컴바인을 모시고 받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떼를 쓰고 패악을 부렸다고 했다.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컴바인 백작의 눈에 들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느라 벌인 일들이었다.
그러나 컴바인 백작은 아이의 떼를 모두 받아주었다. 글로틴의 아비가 능력 있는 가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글로틴은 분이 나도 어찌할 바가 없었다. 다툼이 있으려면 부딪혀야 마땅한 것을, 한쪽에서 오냐오냐 받아주는데 어찌 싸움이 있겠나.
그래서 후에는 올리버의 것을 탐내기 시작했다. 사이가 나빠지면 책임에서 달아날 수 있을 줄 알고 올리버의 물건이라면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고 했다.
그러자 올리버는 점점 더 글로틴이 빼앗지 못할 것들을 원하기 시작했다. 값비싼 보석, 살아있는 짐승들⋯. 그리고 글로틴은 그것들도 모조리 빼앗았다.
그렇게 글로틴이 떠맡은 애완동물이 십수 종류가 넘게 되자, 올리버도 더 이상 동물을 탐내지 않게 되어 어찌어찌 숨을 돌릴 새가 나왔다고.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고 했다. 올리버가 마리앤을 좋아하는 것은 알았지만, 저 또한 마리앤을 좋아했다고,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단 소리를 늘어놓았단다.
“⋯내가 오빠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못난 모습을 내게 보였다가는 내가 오빠를 그만 좋아하게 될까 봐 겁이 났대요. 내가 맨날, 글리 오빠는 요정 같고 천사 같고 정령 같고 너어무 예쁘다고 주접을 부려가지고. 자기는 요정도 천사도 정령도 아니라서 무서웠대요.”
“⋯.”
그건 조금 무서울 만도 하다 싶었다. 잠자코 들었다.
“그런데 시발, 이번 여름 방학에 컴바인 백작이 나를 부르더라구요. 아니, 올리버 컴바인도 아니고 그 아빠가요! 미친 거 아니에요?”
“그 무슨.”
“그래요, 만약의 만약에. 내가 글리 오빠가 하는 짓이 꼴같잖고 맘에 들지 않아서 헤어질 수도 있다고 쳐요. 그런데 그렇다고 올리버 컴바인이랑 사귄다는 소리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백작 앞에서도 내가 올리버를 거절하니까, 나 몰래 뒤에서 글리 오빠를 부른 거예요, 그 개같은 부자가.”
“⋯그래서?”
“그러더니, 오빠한테, 그간 많이 양보받았으니까 이번만큼은 양보하라고 했대요. 감히, 나를 가지고 양보를 하라 마라. 지가 뭔데.”
마리앤이 다시 분해서 흐어어엉 우는 소리를 내며 눈물을 쏟았다. 나 또한 어안이 벙벙하여 앉은 채 얼이 빠졌다. 애들 싸움에 어른이 관여하는 일이야 종종 있었으나, 그 방식이 어찌 이리 무도하단 말인가.
“그러고 나서 글리 오빠가 나한테 좀 많이 이상하게 굴었어요. 난 이유도 모르고 그냥 컴바인 백작이랑 나랑 얘기한 것도 있고 해서 속상해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고. 그런데, 오늘.”
“⋯.”
“오늘, 올리버 컴바인이 나한테 청혼하면서, 그런 일이 있었다 얘기를 하잖아요. 나는 글로틴이랑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