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주말에는 도서관에서 루베르를 만났다.
미리 약속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학기와 꼭 같이 중급 검술 수업과 고급 검술 수업을 모조리 루베르와 함께 듣고 있었으나, 요사이 나는 루베르와 속닥거리는 일이 없었다.
지난 학기 둘이 야시장에 다녀온 그날 이후로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서기 멋쩍었던 탓이었다.
자연히 이번에는 어디에서 만나자 하는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어 약속을 정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토요일이 되자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루베르의 탓이 아니다.
지난 학기 내내 이 아해를 만난 일이 습관이 되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멋쩍은 마음을 숨기고 같이 공부를 하자 말을 걸었다. 함께 공부하고 식사하고 아이를 보냈다. 내일도 같은 시간에 나올 것이냐 묻는 아이에게 그렇다 답하여, 일요일도 같았다.
큼지막한 도서관 책상에 마주 보고 앉아 빈 노트에 지난 수업 내용을 옮겨 적으면서 간간이 루베르를 살폈다. 자꾸만 시선이 갔다.
이 녀석이 그렇게 잘난 외양을 가지고 있다고 수선을 부리는 아해들의 목소리 때문이라고 남 탓을 하였다가, 눈이 마주칠 적마다 사르르 웃는 표정 때문이라고 루베르 탓도 했다.
루베르의 검술이 빼어나고 그 성정이 성실하고 곧으니 내년이면 절정의 무위를 바라볼 수 있을 터인데. 곧 이 아해가 졸업을 하여 검보다 펜을 쥐게 된다는 것이 어쩐지 믿기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쉽다. 그래, 아쉬웠다. 가슴 한켠이 수런거렸다.
내가 루베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자, 저 보는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든 녀석이 또 시들시들하게 웃었다. 그 눈가에 슬며시 붉어지는 홍조를 보다 문득 물었다.
“졸업하시면은.”
“⋯어? 응.”
“바로 황궁으로 돌아가십니까?”
“어어⋯. 아마도?”
잠시 잠자코 있던 루베르가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에른하르트 영식은?”
“⋯글쎄요. 저는 졸업하자마자 유일 산맥으로 향할 생각입니다.”
“⋯아⋯. 언제쯤 내려올 건데?”
“저도 웨슬리처럼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되어야 내려오지 않겠습니까.”
“⋯!”
루베르의 눈이 크게 뜨였다. 깜짝 놀라 눈도 입도 동그랗게 벌어지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 나는 이제야 속이 싱숭생숭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발터 오르겐이 유일 산맥에 가기 싫어하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 했다.
겨우 방학 동안 멀어져 있었다고 아이의 안색이 많이 차분해졌다.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내다 보면 루베르가 내게 가진 미약한 감정은 금방 스러져 사라질 것이었다. 지금 이 아해의 마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자주, 쉬이 볼 수 있는 것은 올해가 마지막이리라.
제가 사랑이 궁금하여, 제게 정을 들인 듯 보이는 아이를 은근슬쩍 탐을 냈던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오래 품고 방학 내내 이 어여쁜 것을 떠올리며 궁리한 일이 민망하고 멋쩍었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멀어질 것이라면 당장에 밀어낼 필요가 없었다. 당분간은 이전처럼 아이를 대해도 괜찮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웃었다.
나이 어린 아해가 숙부를 동경하여 따르는 일은 종종 봐 왔다.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그래도 내년까지는 방학에도 뵙고 할 터이니, 큰 걱정은 없습니다.”
“⋯어, 응⋯. 그렇지⋯. 그렇네⋯.”
“이번 중간고사가 끝나면, 식물원 말고도 찾아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같이 가지요.”
“⋯응. 그러자.”
내내 심란하던 이유를 알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다시 펜을 들었다.
오후 나절에는 내내 공부가 잘 되어 예습도 꽤 많이 해 두었다. 어쩐 일인지 루베르가 평소보다 힘이 없어 보여 조금 걱정이 되었다.
역시 시어런에도 인삼정과가 있는지를 찾아보아야겠다.
* * *
월요일, 중급 검술 시간.
제국검법의 형과 식을 처음부터 다듬고 있자니 마엘로 샌슨이 안 되겠다며 학생들 틈에서 나와 루베르, 벤자민을 꺼내놓았다.
이미 다 아는 것을 반복하여 몸에 새기는 것도 좋지만 다른 것을 배우는 것이 낫겠다 하는 말에 순순히 수긍했다.
제국검법 대신에 배우게 된 것은 세이렌 검법이었다. 루실라가 애용하는 검법이기도 했고, 일전에 샌슨과 일대일로 몇 차례 강습받은 적도 있어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내보다는 여인에게 맞는 검식이라 여겨 그간 날카롭게 다듬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너희 둘이 직선적인 검법에 재능이 있고, 그런 것만 연습하고 연구했단 걸 알아. 미카엘도 섬세한 검법을 사용하지만 날카롭고 빠른 속검을 사용하지. 돌아갈 줄을 모르고.”
“⋯.”
“하지만 검법이란 건 하나로 정해져 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익혀보지 않았던 검식을 훈련하고, 토론하고, 검법에 적용하는 과정을 거쳐보는 것이 좋겠어.”
“예, 교수님.”
과연 옳고 마땅하다. 크게 감탄하여 얌전히 그 말에 따랐다.
배운 대로 일정한 시간 훈련하고 일정한 시간 휴식을 가졌다.
루베르와 둘뿐이었다면 아이의 응석이나 받아주었을 것이고, 벤자민과 둘이 있었다면 동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터였다.
그러나 루베르와 벤자민 두 소년을 양옆에 끼고 셋이 앉으니 무슨 이야기를 할지 막막했다.
침묵이 길었다. 한참을 얌전하던 루베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살갑고 다정했다.
“클라우디안 영식도⋯졸업을 하면 유일 산맥에 가겠지?”
“예? 그렇습니다.”
무척 당연한 이야기인지라, 갑작스러운 물음을 들은 벤자민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루베르는 그렇구나, 하고 시들시들하게 대답하고 다시 말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깨어진 틈을 타 벤자민이 내게 물었다.
“에른하르트 영식도 그렇겠지요?”
“예, 뭐. 당연한 소리겠지만은⋯.”
“기왕이면 같은 조에 배정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랜 기간 협력해야 하기 때문에, 동기들끼리 미리 신청을 하면 같은 조에 넣어준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죠. 아마 우리 친한 동기들 중에 유일 산맥에 가고자 하는 이들은 우리 둘뿐일 테니.”
“예, 로제 영식은 검술보다는 경영 쪽에 더 흥미가 있으니까요.”
“빌도 졸업하고 나면 유일 산맥에 가겠다고 각오가 아주 대단하던데.”
내 말에 저쪽에서 열심히 검을 연습하는 빌 브라운 쪽을 건너다 본 벤자민이 기분 좋게 웃었다. 힘을 조절하는 법을 배운 뒤로 벤자민은 종종 여유 있는 표정을 했다. 그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좋네요. 빌 브라운 영식 정도면 환영할만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내 어깨에 툭 닿아오는 것이 있었다. 내내 조용하던 루베르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숨을 죽였다. 어쩐지 목덜미가 간질간질했다.
저 빼고 이야기를 한다고 샘이 난 모양이지. 귀엽게 구는 것이 흡족하기까지 했다. 멀어지기 전에 좀 더 예뻐해 주고 싶어 밀어내지 않았다.
벤자민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휴식시간이 금방 동났다. 내내 하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을 루베르가 심심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뒤늦게 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루베르의 손등을 가만히 감싸 쥐고 달래 주었다.
“다시 시작하죠.”
“⋯으응⋯.”
몬스터와 철학 수업이 끝날 때까지, 오후 나절이 한참 넘도록 루베르가 기운이 없었다.
그 까닭을 물었으나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할 것도 공부할 것도 많다고 하여 월요일인데도 기숙사 식당에서 끼니를 챙겨 먹이고 들여보냈다.
하도 힘없이 기대기에 몇 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는데도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 무척 걱정스러웠다.
다음날인 고급 검술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루베르가 워낙에 바로 서 있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것이 걱정되어, 힘이 들면 기대 있어도 된다 권했다. 원숭이마냥 내 등에 매달리는 녀석이 안쓰러워 몇 번 도닥여주었다.
“정말 의무실에 가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아니,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루베르의 흰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은 없었다. 그래도 일전에는 손 한 번 잡을 적마다 안달복달을 하더니, 이제 이 정도까지는 괜찮은가 싶어 안심이 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했다.
일단 아이를 다음 수업에 보내고, 영지 경영 수업을 듣기 위해 쉐이든을 찾았다. 아무렴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나보다 몇 배는 더 야무진 쉐이든이라 조언을 구해보기로 했다.
“요사이, 기운이 없는 아이가 하나 있는데.”
“어? 응, 있는데?”
“어찌해야 달랠 수 있을지를 도통 모르겠다.”
내가 루베르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는데도 쉐이든은 더 묻지 않고 진지하게 고민해주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꺼내놓는 말에서 사람을 많이 다뤄 본 태가 났다.
“뭐뭐 해 봤는데?”
“뭐를 해 보다니.”
“그 사람을 달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해 봤는지 생각해보고, 그중에 어떤 게 반응이 가장 좋았는지를 봐야지. 사람마다 달래는 방법이 다르니까.”
“⋯.”
루베르에게 내가 무엇을 해 주었더라.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어깨를 다독여주고, 잠시 끌어안고⋯. 입 밖으로 내자니 남우세스럽고 민망하여 잠자코 있었더니, 쉐이든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곧장 답을 내어 주었다.
“그중에서 가장 효과가 좋았던 걸 딱 세 번만 더 해 보고.”
“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한 번에 다 해 줘. 그럼 보통 풀릴걸.”
“음. ⋯그래.”
너무 낯간지러운 일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했으나, 다른 방도가 없어 마른 손으로 내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당장에는 아니더라도 상태를 보아 한 번 시도해보겠다, 고맙다 하고 인사를 했다.
영지경영 기초 수업에서는 서류철을 처리하는 방법부터 영지의 수익과 지출을 셈하는 법까지를 차근차근 배웠다.
존 맥베스 교수는 영지의 어느 사업이 가장 우세하고 어느 사업이 가장 빈약한지를 따져보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몇 번을 강조했다. 맥베스 교수는 맥베스 영지를 예시로 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에드윈이 어찌 그녀의 사업에 손을 댔는지를 알게 되었다.
맥베스 영지는 키아드리스 공작가 산하에 있는 남작가였다.
존 맥베스는 에드윈 키아드리스가 적통의 피를 잇고 태어난 것을 확인한 그 날부터 그를 노리고 준비했다. 무역에 충분할 만큼 길을 닦고, 터를 내고, 건물을 지어 올리고, 인근 영지들의 양해를 구했다. 당시 맥베스 가의 형편으로는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존 맥베스는, 에드윈 키아드리스가 제 이름으로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제일 먼저 가장 멋들어진 사업계획서를 들이밀 수 있었다.
맥베스 영지는 부유해졌고, 존 맥베스는 영지경영계에 큰 획을 그어 2년 전 교수 자리를 얻었다.
“이처럼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을 알고 활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달 말일까지, 각자 자신의 영지에 무엇이 있는지 조사하여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중간고사를 대체하겠습니다.”
에른하르트 영지를 미하엘에게 물려주기로 마음먹었던 내게는 이보다 당혹스러운 일이 또 없었다.
얼빠져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쉐이든이 소리 내어 웃자, 데미안이 한 마디 작게 속삭였다.
“과제 잘 해서, 나중에 미하엘에게 물려주세요.”
⋯실로 옳은 소리였다.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