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스티븐 맥클리프는 희고 하늘하늘한 드레스 셔츠 위에 꽉 조인 베스트를 입고 왔다.
날이 추울 적에도 그 끝자락이 넓게 퍼지는 코트를 입고 왔던 것이 기억이 나서, 꽤 멋을 부리는 모양이다 이야기 했더니 루베르가 또 저런 것이 멋있냐고 물었다.
아니다, 너는 지금이 딱 좋다 대답을 하면서도 어쩐지 아해를 바로 보기 어려웠다.
“몬스터학 개론에서는 몬스터 각각의 생체구조와 습성, 그리고 부산물의 값어치에 대한 것을 강의했습니다. 이 수업을 듣는 여러분은 이제 몬스터가 마력 변이 생명체라는 것을 알고 있겠죠.”
스티븐이 단정한 목소리로 책의 네 번째 페이지를 펼쳐 보아라 말하였다.
“우리는 이 몬스터를 사냥하고, 분해하고, 판매합니다. 이런 과정들이 과연 얼마나 인도적일까 고민하는 사람은 늘 있어왔죠. 사람은 늘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받는 존재니까요.”
시어런 제국은 사람에게 계급을 부여했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았다.
발터 오르겐의 경우처럼 작위를 빼앗겼다가 되찾는 일도 있고, 제니의 경우처럼 없던 작위를 제 능력껏 노력하여 받아내는 수도 있었다. 물론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작위를 빼앗긴 귀족들도 허다했다.
짐승을 대하는 태도 또한 때마다 달랐다. 어린애 어르듯 조심조심 살갑게 다루다가도, 인간에게 해가 된다 싶으면 병 든 곡식을 걸러내는 것처럼 툴툴 털어냈다.
“몬스터 또한 생명체라고 본다면, 한 종에 대한 도살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우리는 이 수업에서 해당 안건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일례로 요즈음 연금술 재료로 쉬이 사용되고 있는 슬라임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또 한 번 놀랐다.
모든 시어런 사람들이 내게 정확한 정보의 공유와 적절한 통제가 옳은 것이라 말했고, 나는 대부분 순응했다. 그 결과로 빚어낸 세상이 중원보다 시어런이 낫다 여긴 탓이었다.
모두가 옳다 말하는 일의 선악을 판별하는 일은 내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몬스터를 쉬이 죽이는 일은 그른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꾸준히 있어왔다는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을 해치는 짐승을 토벌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라 여기고 평생을 살았던 나였다. 이들의 온정은 어디까지 닿아있는가, 내가 이를 따라갈 수가 있을까 막막하였다.
내 손에는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
사나운 짐승의 피도, 사나운 사람의 피도 많이 묻은 손이었다. 나는 억울하고 슬픈 사연들이 있는 곳마다 찾아가서, 악한 이들의 목을 베어 그 수급을 원수에게 넘겼다. 내가 베어 넘긴 치들이 악하게 굴었기에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태어나기를 악하게 태어난 괴물들도 가여워하고 아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나는 나 스스로가 잔정 많은 놈인 줄 알았다. 허나 그렇지 않았다. 시어런의 인물들이 나보다 백배 천배 더 자비롭게 살았다. 그간 내게 없던 인정을 활자로 배우며 얕게 침음했다.
슬라임은 과연 통각이 없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 수업에 쉽게 몰입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루베르의 숨소리가 더 이상 선명히 들리지 않았다.
인도적인 방법으로 고통을 주지 않고 몬스터의 생명을 앗는 법에 대해 배우며 내가 떠올린 것은 사파의 악적이고 마교의 주구였다. 사람을 몬스터보다 거칠게 다루던 그 치들을 생각하니 문득 분기가 치밀어 올랐다.
인의와 도리에 대한 수업은 배우고 배워도 끝이 없었다. 깊게 경탄했다.
덕분에 수업을 마치고 나서 루베르의 얼굴을 보았을 때에는, 나도 모르던 내 머릿속의 험한 생각을 읽어낸 아이가 나를 이 자리로 인도했는가 싶었다.
감사한 마음이 울컥 일었다. 먹먹하여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루베르가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오늘 저녁 뭐 먹을까?”
“글쎄요.”
아직 학기의 극 초반이었다. 바쁠 일도 없었다. 루베르가 무엇을 바라는지 이제는 빤히 읽혔다. 둘이 함께 나가 식사라도 하자는 얘기일 테지.
저 원하는 것을 제 입으로 말하지 않고 내가 말해주길 기다리는 모습이 안쓰럽고 가엾고 어여쁘게만 보이는 것은 내 탓이다.
나는 아주 잠깐 생각하다가, 어렵게 대답했다.
“선배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 나가서 먹지요.”
루베르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를 잡아 타고 나가는 길. 익숙하게 아이의 맞은편에 앉았다.
일전에 시간표를 정하면서 루베르와 마주 앉아 방학 때 있던 일을 잔뜩 늘어놓은 탓에 더 나눌 이야기가 없어 조용했다.
찬찬히 녀석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이제 루베르가 열일곱이 되었지. 이 얼굴이 잘난 것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들어대던 친우들의 말을 듣고 찬찬히 살펴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슬슬 사내의 태가 날 때도 되었다.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니 루베르가 제 얼굴을 쓸어 만지며 물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닙니다. 그냥⋯.”
“⋯그냥?”
나는 말을 아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제 아해도 충분히 제 마음을 정리한 것 같은데, 내가 새삼 어색하게 구는 것도 이상하다 싶었다.
“보기 좋아서.”
어여쁘단 말보다는 낫겠지 싶어 뱉은 말이었는데, 루베르가 너무 민망해해서 서로 머쓱해졌다. 아직 이런 이야기는 하면 안 되는 때인가 보다.
황급히 의미 없이 한 말이니 민망할 필요 없다 하고 손을 내저었다. 루베르는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 * *
화요일, 고급 검술 시간.
발터 오르겐이 마엘로 샌슨의 옆에 서서 정식으로 제 경지가 한 단계 상승했음을 알렸다.
절정의 실력, 즉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 되었다는 말에 그럼 그렇지 싶었다. 이미 다 알고 있었을 샌슨이 시침 뚝 떼고 서서 박수를 쳐라 축하를 해라 하는 것이 우스웠다.
이제 정말로 이번 학기가 발터 오르겐의 마지막 학기가 될 것이다. 졸업 전후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즉 소드 마스터가 되는 것이 발터의 목표라 했다.
중원 무림맹에서 나는 쉰여덟 번째 순번의 고수였다.
내 뒤로 초절정의 인물이 서넛 정도 더 있었으니, 그 너른 중원에서 정사마를 다 합하여 백여 명이 넘고 이백여 명이 되지 않는 소드 마스터가 존재한 셈이었다.
나야 운이 좋아 죽기 전에 초절정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으나, 대다수의 무인들은 일류 무인이 되기도 전에 삶을 마쳤다. 화경은 고사하고 절정의 경지도 산처럼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시어런 아카데미에서는 오러를 깨우친 아이들 모두가 죽기 전에는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쉬이 입에 올렸다.
섬세한 오러의 수발로 아이들을 일깨워주는 더글라스 머스탱이 있고, 차분히 그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마엘로 샌슨이 있었다. 수십이 넘는 초고수가 저 스스로를 돌보는 것보다 아이들을 옳게 기르는 데 힘을 쏟았다.
중원무림에 화경의 강자가 열은 되었는데, 시어런에는 마엘로와 웨슬리 둘 뿐인 이유가 그 탓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 눈에는 홀로 경지를 깨치는 것보다는 많은 아해들을 이끄는 것이 더⋯.
아니,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문제였다. 고개를 털어 잊었다.
이번 학기 고급 검술 첫 수업은 마엘로 샌슨과 발터 오르겐의 대련으로 시작되었다.
발터는 자유롭게 오러를 수발하는 모습을 선보이며 아직 덜 깨친 아해들 앞에서 제 실력을 뽐냈다. 샌슨이 그가 제 실력을 모두 보일 수 있도록 도왔다.
나는 그의 오러가 중단전을 크게 돌아 전신에 번지는 모습과, 그의 검 위를 황홀하게 감싸 도는 모습을 보았다.
아직 검기상인(*검기만으로 능히 사람을 해하는 경지)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지만 한 학기 이내에는 벽을 넘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샌슨이 일러준 것을 들어 아는 것이 아니라, 내 눈으로 보기에도 깨달음만 있다면 쉬이 벽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요즈음 간간이 오러를 활용하는 방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단전에 웅크린 내공이 기를 쓰고 난리를 부려 영 쉽지 않았다.
어찌 마나는 받아들이면서 오러는 그리 치를 떨며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하고 내 단전을 들여다보았으나, 당연하게도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창궁대연신공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 없이 지금의 내가 이 정도 경지에 오를 수 있었을까 따져보면 더욱 그러했다.
나는 내심 시어런에서 만난 모든 검수들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옳은 가르침을 받는다고 다 옳게 자라겠는가. 다들 나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렇게 생각하면 자만하거나 쉬어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발터는 나를 따로 불러 내 덕분이라고 다시 한번 좋은 말을 쏟아놓았다.
지난 학기에 몇 차례나 식사를 얻어먹은 적이 있어 감사 인사를 듣는 것도 질리는 와중이라 축하의 말만 전하고 손사래 쳐서 쫓아내고 말았다.
오후에 있는 영지경영 기초 수업은 쉐이든과 데미안, 두 아이와 함께 듣는 수업이었다.
경영학을 가르치는 존 맥베스 교수는 은발 은안의 여성이었다. 멀리서 보면 그 눈동자가 보이지 않아 내심 놀랐으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수업을 듣는 아이들 모두 자연스러이 그녀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 원래 이 세상에는 색이 참 많구나 하였다.
또래 여성들에 비해 키가 훌쩍 큰 맥베스는 높은 신발에 바지 정장을 유려하게 차려입고 단상에 섰다.
“영지를 경영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돈, 그리고 신뢰입니다.”
또박또박 올곧은 발음이 음공(*음성과 음악을 사용하는 무공)의 고수라고 해도 믿을만했다. 그 말마따나 신뢰가 가는 목소리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맥베스는 신뢰는 사람과 통하는 것이니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한 번 더 강조한 뒤 말을 이었다.
“이 수업을 듣는 여러분은 이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영지를 물려받을 확률이 무척 높겠죠. 따라서 대를 이어 온 교우 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자산의 규모가 어찌 되었든 간에, 반드시 기억하세요. 그 교우 관계야말로 여러분이 지닌 가장 큰 자산입니다.”
과연 맞는 말이었다. 나와 같이 수업을 듣는 쉐이든과 데미안이 가장 좋은 예였다. 내가 크게 노력하지 않고 대를 이어서 받은 친구였으나, 지금은 그보다 더 소중하고 가까운 동무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돌아본 쉐이든이 문득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아니, 그냥 갑자기 신기해서.”
수업 시간에 계속해서 잡담을 하는 것은 실례인 일이라 말을 더 잇지는 않았으나, 내가 동무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멋쩍고 민망하여 차림새를 가다듬었다.
수업이 끝나자 언제나처럼 쉐이든이 교수에 대해 간단히 첨언해 주었다.
“맥베스 남작가는 지난 대까지는 아주 작은 가문이었어. 당대에 이르러 크게 번영하게 되었는데, 그게 저 존 맥베스 교수의 업적이지.”
“어떻게?”
“그림스베인 공작가와 비반 사이의 무역을 도맡았거든. 너도 알다시피 사라스 강을 통한 무역은 당연히 인더스 만에 닿게 되어서, 비반보다 율란이 늘 우선권이 있었거든. 그걸 해상 무역이 아니라 마차 무역으로 뚫어낸 거지.”
“허어.”
“에드윈 키아드리스랑 관련 있는 사람이야. 기억해 둬.”
얌전히 듣다가 깜짝 놀랐다.
“그 아이가 이제 열일곱 나이인데, 어찌 그럴 수가 있어?”
“정확히는 존 맥베스 교수님이 에드윈을 통해 키아드리스 공작가의 줄을 잘 잡은 거지. 당장 성적에 영향이 있을 일은 아니야. 나중에 발렌티아 공작가와 키아드리스 공작가 사이에 문제가 있을 때, 가장 유의해서 보아야 할 사람이야.”
“⋯그래, 알았다.”
문득 앵앵거리던 에드윈을 떠올렸다.
녀석이 좀 차가운 인상의 사람들과 잘 맞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떼를 쓰고 응석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은데⋯. 하여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