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50)화 (150/176)

150.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빌 브라운의 얼굴이 능글맞다 느꼈다. 나는 녀석을 한참 뜯어보다 허 웃었다.

지금은 어딜 보아도 건강하고 건장한 놈이다. 금방 죽을 놈 같지는 않아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만나보니 어떻더냐.”

“딱 생각한 그대로예요. 형님이랑 친해지게 되어서 아주 기뻐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마차의 푹신한 쿠션에 등을 기댔다.

“네가 건강해져서 참 다행이다.”

“다 형님 덕분이죠. 평생 충성할게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네가 노력한 덕분이지, 내 덕은 아닌 것 같구나. 지금 내게 고마워하지 말고, 내가 나중에 뜻 깊은 일을 하거든 그때 고마워 하도록 해.”

“⋯이런 형님이라 더 좋아해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이런 투로, 이것과 닮은 말을 한 루베르가 문득 생각이 난 탓이었다.

나는 빌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순박한 소처럼 큰 눈을 바로 뜬 표정에 붉은 기운 없이 순진한 것에 안심했다.

“그래, 그래. 나도 네가 참 좋구나.”

한숨처럼 대꾸하고, 다시 치대오는 녀석의 어깨나 좀 토닥여주었다.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는 브라운 남작가 식구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브라운 남작가 사람들이 죄다 서글서글하고 성격이 좋아 어울리기 좋았다.

빌 브라운은 천연덕스럽게 나를 형님이라 부르며, 제 어깨 위에 미하엘을 얹어두고 내려놓지 않아 웃음을 샀다.

미하엘은 내 무릎 위에 앉아있거나 빌의 어깨 위에 올라있거나 하며 발이 땅에 닿을 일이 없으니 신이 났다.

아스델은 새침을 떠느라 내 옆구리에만 붙어있고 빌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다. 까르르 웃는 미하엘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가슴에 훈기가 돌아 그냥 두었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외에는 목련 기사단과 어울리는 데 시간을 썼다.

빌이 호기롭게 기사들의 훈련에 참여하고 싶다 말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검을 배워 생을 연장하게 되었다는 말이 가슴에 깊이 박힌 탓이었다.

목련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인 이안 벤터스는 그런 빌 브라운을 무척 가까이 여겼다. 제 동생인 것처럼 빌을 챙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하기야 생긴 것이 꽤 닮았다. 너른 어깨나 울룩불룩한 생김,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까슬하니 짧은 머리칼이 꼭 부자(父子)같았다.

빌은 기사들의 훈련을 고스란히 따라한 뒤, 내게 몇 차례 지도대련까지 받고 진이 쪽 빠져 연무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 큼직한 팔과 다리를 쩍 벌리고 드러누운 빌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중급 검술 수업도 듣는 녀석이, 겨우 이 정도에 힘들어하면 어쩌려고.”

“아, 세상 사람들이 다 형님 같은 줄 알아요?”

껄껄 웃는 녀석의 손을 잡아 일어나 앉게 했다. 그래그래, 네가 다 옳다 하고 역성을 들어줬더니 환하게 웃는 녀석의 얼굴이 보기 좋았다.

땀과 먼지로 엉망이 된 녀석의 얼굴을 보고 손수건을 건네주자 응석을 부려, 그 뺨과 이마를 닦아주기도 했다.

“소문대로네요, 정말. 목련 기사단 훈련 강도가 장난이 아니라고 그러더니.”

“도대체 그런 소문은 어디에서 얻어듣는 것이냐?”

“글쎄요⋯? 엄마가 티 파티 할 적마다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오셨다고 얘기해 주시던데.”

브라운 남작 부인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어찌 듣고 다니는지가 궁금해졌다.

지금도 브라운 남작 부인은 내 어미 세이른과 둘이 티 타임을 갖고 있을 터인데, 세이른이 혹여나 이상한 물이 들지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빌이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조금만 쉬었다가, 한 번 더 상대해주세요.”

“그래, 그러자.”

“형님도 앉아서 좀 쉬고요.”

아해의 응석에 당할 재간이 없었다. 빌의 곁에 나란히 앉아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오전 훈련이 끝나 기사들이 죄다 빠져나가 썰렁해진 빈 연무장은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꾸준히 훈련한 태가 나는 기사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흐뭇했다.

잠자코 있으려니 빌이 살갑게 말을 붙여왔다.

“형님은 조용한 걸 좋아하신다고 했죠.”

“그랬지.”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좋아하신다고도 했고요.”

“음.”

“황궁 기사단이 되실 거라고요?”

“아마도?”

“여행을 다니고 싶지는 않아요?”

“⋯여행?”

뜻밖의 말에 빌을 돌아보려 했더니, 씩 웃은 아해가 내 어깨에 툭 머리를 기댔다.

워낙 자연스럽게 굴어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땀에 젖어 축축한 머리칼에서는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짙어진 분내가 났다.

다 큰 놈인 것 같아도, 이런 때엔 아이인 태가 났다.

“건강해지면요,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싶었거든요. 세상의 끝에도 한 번 가 보고 싶고, 산처럼 거대하다는 신의 흔적들도 궁금해서요.”

“이제 충분히 건강해졌으니, 가면 되지.”

“저 졸업하고, 형 시간 남으면요. ⋯같이 여행 가지 않을래요?”

고민은 잠시였다.

“그래, 그러자.”

“좋아요! 약속하신 거예요.”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보기 좋았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늘 웃기만 했다. 처음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웃지 않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어찌 이렇게 해처럼 밝을까. 달처럼 처연한 루베르의 낯이 잠시 생각났다. 고개를 털어 생각을 지웠다.

“그러려면 실력을 더 기르는 편이 좋겠다.”

“아, 그럼요. 물론이죠. 저도 소드 마스터가 될 거라구요.”

잠시 기감을 돋구어 아이를 살펴보았다.

“지금처럼 하면 팔 년은 걸리겠구나.”

“⋯예? 그렇게 오래 걸려요?”

“그러니 더 열심히 해라.”

너른 등짝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아이가 경악해서, 이것보다 더 열심히 어떻게 하면 되냐고 쫑알거리는 소리가 싫지 않아 크게 웃었다.

* * *

즐거운 시간은 유독 빠르게 지난다.

가족들과 꼬박꼬박 얼굴을 보고 식사를 하고, 아카데미에 가기 전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에른하르트 소백작저를 가득 메운 분홍 꽃의 이름도 알게 되었다. 프로딜 아스터. 공교롭게도 내 기숙사 방의 화분에 심겨져 있던 꽃과 같은 이름이었다.

자세히 보니 모양새도 닮았다. 그러나 작고 가련하던 화분의 꽃과 달리 본가의 꽃은 꽃송이가 훨씬 크고 풍성하여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을 이제야 깨닫고 깜짝 놀랐다.

환경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꽃이라더니 그 크기와 윤기도 달라지는가 하는 말을 했더니 아비가 크게 웃었다.

“프로딜 아스터는 사랑이 많은 집에서 더 짙고 어여쁜 색을 피운다는 속설이 있단다.”

“그럼 분홍색보다 붉은 것이 더 좋은 게 아닙니까?”

어미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대답해주었다.

“그래서 가끔 몇 송이 붉은 꽃이 피면 무척 설레고 행복해진단다.”

“설렌다고요?”

“응. 네 아버지 눈색을 꼭 닮아서.”

간지러운 말을 들은 아비의 얼굴에 홍조가 꽃처럼 피는 것을 보고 나 또한 크게 웃었다. 정말 귀엽기 짝이 없었다. 정다운 한 쌍의 원앙처럼 어여쁘고 다정했다.

그 옆에서 어린 새처럼 저는요, 나는요, 하는 미하엘과 아스델을 달래는 일도 무척 재미있었다.

너희 눈동자가 하늘 같고 구름 같고 꽃 같다 몇 번을 어여쁜 말을 하며 아이들을 달래주었다.

이렇게 매일을 살아도 포근하고 좋을 것이다.

나중의 나중에도 어여쁘고 귀여운 부모와 동생들의 곁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평생 혼인하지 않아도 살만 하지 않겠는가 싶었다.

행복한 것은 행복한 것이고, 해야 할 일은 해야만 했다.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나와 헤어져도 다시 또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 미하엘은 이제 떼쓰고 울지 않았다. 대신에 마차를 옆에 세우고 내 품에 찰싹 안겨서, 내 목에 걸린 로켓을 만지작거렸다.

“형아, 내가 보고 싶으면 이 초상화를 보고 잘 참아야 해. 알겠지? 나도 그럴 테니까.”

“그럼. 미하엘이 보고 싶어도 초상화를 보고 참을게.”

“그래도 보고 싶으면 어떡하지?”

“편지를 써야지.”

“편지를 열 번 쓰면 어떡해?”

“답장을 열 번 써 줄게.”

잠시 고민하던 미하엘이 내 목을 와락 끌어안고 귀여운 소리를 했다.

“응. 형이 보고 싶을 때마다 편지 쓸게.”

“그래.”

아이의 귀엽고 판판한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떼고, 품에 안았던 미하엘을 내려놓았다.

제 차례를 기다리던 아스델이 쪼르르 오는 것을 번쩍 들어 다음 순서로 안았다. 통통한 뺨을 들이대기에 입술을 꾹 눌렀다 떼어주었다.

“다음 방학에는 우리가 수도로 갈게. 내가 보고 싶어도 울면 안 돼.”

“그래, 우리 아스델이 보고 싶어도 안 울고 잘 참을게.”

“진짜야. 울면 엉덩이에 뿔 나.”

“그래.”

아이가 새침하게 웃고는 내 뺨에 쪽 입맞춤을 되돌려주었다.

아스델까지 내려놓고 나니 부친과 모친이 와서 나를 한 번씩 더 안았다 놓았다. 나이를 몇을 먹었든 혈육의 정이란 두텁고 따스한 것이라, 마음 한켠이 짜르르 울렸다.

제 가족들의 배웅을 받고 내 곁에 선 빌이 웃으며 제 뺨도 내게 내밀었다.

“형님, 저도 여기에.”

“징그럽다.”

혀를 차며 그 뺨을 손바닥으로 쭉 밀었더니, 두 가족이 와르르 웃었다. 하여간 넉살이 좋은 녀석이다. 빌과 둘이 마차에 올라서도 창문을 열고 한참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길은 내내 평화로웠다.

서두를 일 없이 정한 일정이었다. 빌은 종종 답답하다며 함께 말을 타자 졸랐다.

마차 안에서 앉아만 있는 것은 내게도 고역인 일이라, 에른하르트의 기사들과 함께 속도를 내어 달리는 것을 놀이로 했다.

숙소에 들릴 적마다 전투적으로 음식을 먹는 빌 덕분에 나 또한 입맛이 돌았다. 녀석이 시끄럽게 굴어 피곤했던 일이 까마득한 옛일로 느껴졌다.

벌써부터 함께 여행을 다니는 기분이라고 넉살을 부리는 아이와 간간이 제국검법의 초식을 가지고 논검비무(*말로 초식을 겨루는 비무)를 하다 보니 금방 수도에 도착했다.

이런 말벗과 함께라면 먼 거리를 다녀도 지루할 일이 없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어런 아카데미 정문 앞에서 에드윈 키아드리스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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