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빠르게 날아간 비도가 윌턴 로버츠의 미간을 노렸다.
오러를 실어 던진 비도는 윌턴의 코앞에서 살짝 휘어졌다. 그러나 윌턴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검지와 중지를 사용해 비도를 잡아챘다.
그 얼굴에 스민 짙은 미소를 마주 보며 나 또한 빙긋 웃었다.
“만점. 잘 했다, 에른하르트.”
“감사합니다.”
함께 수업을 들은 아해들이 크게 박수 치고 휘파람을 불며 축하해주었다.
조금 민망했으나, 무척 뿌듯하여 그 축하를 감사히 받았다. 지난 학기부터 해서 꼬박 일 년을 사용하여 자유로이 비도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나이가 들어도 배움에는 끝이 없다더니, 과연 그랬다. 내가 비도를 이리 잘 다루게 될 것이라고는 앞날을 읽어내릴 줄 안다던 제갈 아무개도 예상치 못했을 터였다.
오늘 시험을 끝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 방학 기간 내내 아카데미를 떠나기 때문에, 오늘은 방과 후 교습을 해 줄 수 없을 것이라고 윌턴이 미리 귀뜸해 준 바 있었다.
대신 다음 학기에는 비도술 수업을 듣지 않고서도 지금처럼 야간에 개인 교습을 해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크게 감사한 일이었다. 나는 깊게 읍하여 윌턴을 배웅했다.
한 학기 내내 비도술 수업을 같이 들은 아해들과 간단히 인사하며 비도술 연습장을 나오다가 익숙한 기척을 읽었다. 저켠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루베르를 향해 곧게 걸었다.
“선배가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내일은 내가 시간이 없을 것 같고⋯. 금요일에는 네가 바로 떠날 것 같아서.”
방학 전에 인사를 하러 왔다는 이야기였다.
몬스터학 개론 수업은 함께 치를 것이면서 유난이다 싶었으나, 지난번에 아이의 마음을 다치게 한 일이 내게도 인상 깊게 남아있었기에 쉽게 수긍했다.
“좀 걸을까요.”
“응, 그러자.”
익숙한 연못가로 향했다. 녀석과 조그마한 다리 위에 나란히 올라서서 난간에 기대어 섰다. 하늘에 별이 빼곡하고 주변에 전등이 많아 낮보다 화려한 밤이었다. 인기척에 놀라 풀벌레도 숨 죽인 밤, 물 위에 뜬 달을 바라보는 일이 운치 있었다.
훌쩍 여름이 가까운 탓인지, 이 조그만 연못가도 물가라고 시원한 것이 좋았다. 서늘한 밤바람이 이마를 쓸고 지났다.
나는 이제 루베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불렀냐고 묻지 않았다. 이제는 그저 같은 공간에 잠자코 있는 것으로도 만족하는 아해임을 알게 된 탓이었다.
그 마음 씀씀이가 다정하고 가련하여, 루베르가 하는 말은 다 들어주고 싶다 생각하는 내가 어색할 뿐이었다.
대신에 다른 말을 꺼냈다.
“이번 여름방학에도 계속 수도에 계시겠지요.”
“⋯그렇겠지. 에른하르트 영식은?”
“저는 본가로, 에른하르트 소백작저로 갈 예정입니다.”
“그렇구나⋯. 같이 가고 싶은데.”
우스운 소리를. 농담으로 받아 짧게 웃었다. 황자인 그가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내내.
“그래도 올해 겨울방학에는⋯. 제가 수도에 있을 테니까요.”
“그러게. 얼마 안 남았네, 에른하르트 영식의 데뷔탕트.”
“그때엔 선배도 덜 심심하시겠죠.”
“응. ⋯벌써 걱정이다, 에른하르트 영식이 데뷔하면 사교계가 소란해질 텐데.”
다시 웃었다. 내 어미인 세이른이 발렌티아 영애이던 시절에 어떤 위인이었는지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 후광을 덧입어 뽐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글쎄요.”
“글쎄요?”
“별로 걱정되지 않습니다. 선배가 도와주실 테니까.”
“⋯. 그건, ⋯그렇네.”
짧게 웃은 루베르가 내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머리를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이전보다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아이의 발간 귓가가 시야에 들어왔으나,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루베르가 이제 됐다며 내 손목을 잡았다.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으나 쉽게 떨쳤다.
* * *
5월 셋째 주 목요일 오후. 더글라스와 볼더에게 제대로 작별 인사를 했다.
지난 겨울방학 전에 실험을 내팽개치고 발렌티아 공작가로 달려간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시험 기간에도 꼬박꼬박 더글라스의 교수실을 찾았던 나였다.
그러나 올 적마다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은 막을 길이 없었다.
더글라스의 교수실에 벽을 보고 골렘 셋이 쪼르르 앉아 있는 모양새가 꼴사나웠다.
지난 겨울방학 내내 골렘을 작동시켜두어 보다 확실한 증거를 얻었기에 이번에도 오래 작동시켜두겠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차라리 마탑에 두자 했더니, 마탑에 두었다가는 어느 호기심 많은 마법사가 골렘을 훔치려 들지도 모르기 때문에 세 골렘 모두 더글라스의 교수실에 두겠단다.
무던하고 성격 좋은 더글라스가 기꺼이 동의하여 이 꼴을 매번 보게 되었다.
그나마 내가 강력히 주장하여 앞을 보고 앉지 않고 벽을 보도록 하여 가장자리에 앉혀 둔 것이 다행이었다.
골렘의 머리꼭지의 높이가 동일하여 흐린 눈으로 보면 어찌어찌 별 것 아닌 수상한 장식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문득 궁금한 마음이 일어 볼더에게 물었다.
“이번 골렘 셋도 전부 메이지 볼더와 같은 얼굴을 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야⋯. 헉, 에른하르트 영식을 본따 만들어도 되나요?”
“안 됩니다.”
“그래서 그렇죠, 뭐. 더글라스 교수님도 그건 허락 안 해주시더라고요.”
⋯충분히 수긍할만한 설명이었다.
더글라스가 온화하게 웃으며 편히 방학을 보내고 오라고, 방학 동안에는 골렘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다독여 주었다.
자신이 운기조식을 할 방도를 좀 더 생각해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앵알거리는 볼더의 목소리보다는 확연히 듣기 좋은 말이었다.
다음 학기에 뵙겠다 공손히 인사하고 교수실을 나왔다.
금요일에 있던 중급 검술 수업이 끝난 이후에, 마엘로 샌슨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했다.
지난해에 쉬는 시간마다 내게 시달렸던 마엘로였다. 이번 학기에는 윌턴 로버츠와 시간을 보내느라 마엘로와 따로 시간을 낸 일이 적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 또한 그런 감상이었는지, 다음 학기에는 여유 시간이 많을 예정이니 푹 쉬었다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찾아오라 다정히 말해주었다. 무척 감사하여 몇 번 더 감사 인사를 했다.
몬스터학 개론 시험이 끝나자 빌 브라운이 시험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여름 방학 동안 브라운 가 사람들이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 놀러오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내 어미는 생각보다도 더 브라운 남작부인과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었다. 브라운 남작가에서 함께 여름방학을 보내자는 전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들뜬 것이 편지 너머로도 빤히 읽혔다.
빌 브라운은 한 학기 동안 꽤 공손하고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보았을 적에는 꼬리를 붕붕 흔들어대는 어린 강아지 같더니, 이제는 나름 덩치에 맞는 위엄을 갖추었다.
빌 브라운이 공손하게 허리 숙여 루베르에게 인사하자, 루베르도 자상하게 웃으며 좋은 말을 해 주었다.
“그럼 다음 학기에 뵙겠습니다, 선배님.”
“그래, 브라운 영식도 방학 잘 보내고.”
루베르가 또 투기하지 않는지 알아보려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티 없이 웃는 얼굴에서 다른 것을 읽어내지 못했다.
나는 빌을 데리고 마차를 타러 갔다. 걷는 도중에 자꾸만 빌이 치대어 불편했다. 그 넓은 등을 두드려 똑바로 걸으라 꾸중했다.
빌과 시간을 보낸 것은 대부분 중급 검술 수업에서였다. 아이와 둘만 남은 것이 처음이라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였는데, 빌이 워낙 살갑게 굴어 그럴 새가 없었다.
마차에 마주 앉아 원래 그렇게 살가운 성격이냐 물었다가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가 지금은 이렇게 튼튼하고 건강하지만, 사실 태어날 때에는 아주 약하게 태어났거든요.”
머쓱한지 제 뺨을 긁거나 뒷목을 문지르거나 하면서도, 빌은 꼭 하고 싶었던 얘기라며 수줍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고 해요. 그래서 다섯 살 생일파티도 작게 했어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뭐, 동생도 있었고⋯.”
“⋯.”
“그땐 저도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나는 금방 죽을 사람이구나, 뭐 그렇게⋯. 아무리 어려도 알 건 다 아니까요. 저 한 번 안아주고 나면 엄마가 방 밖으로 얼른 뛰어나가서 울고⋯.”
그 대단한 마법도 원래의 체질을 바꿀 수는 없었다.
외상을 해결하는 일은 부자연스럽고 갑작스러운 것을 원래대로 돌리는 것이라 마법으로 해결이 가능했다. 그러나 태어나기를 약하게 태어난 체질이나 새로운 질병을 낫게 하는 데엔 마법이 별 소용없다는 것을 지난 수업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내가 묵묵히 듣고만 있자 빌이 씩 웃었다.
“그런데, 형님이 다섯 살에 검을 잡았잖아요.”
“⋯음.”
“그게 소문이 좀 크게 났어요. 처음에는 다섯 살에 검을 잡았다고 소문이 났는데, 나중에는 다들 다섯 살 소드 마스터라고 불렀어요. 형님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전혀 몰랐다. 나는 침음했다.
“그것도 그 윌리엄 에른하르트와 그 세이른 발렌티아의 장남이시잖아요. 아주 엄청났죠. 세이른 고모님이 혼인 후에 사교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탓에 더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 ⋯그래서?”
“그 얘기를 듣고 나니까 너무 궁금한 거예요. 나는 이제 곧 죽을 건데, 다섯 살짜리도 하는데, 나는 여섯 살이니까⋯. 나도 죽기 전에 검 한 번 휘둘러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건.”
“그래서 검을 휘두르다 보니 건강해졌고, 건강해지고 나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형이랑 더 친해지고 싶었고⋯. 뭐, 그런 얘기예요. 그래서 엄마도 형을 엄청 좋아해요. 형이 저 살렸다고.”
“나는, ⋯전혀 몰랐는데도.”
“그래도요.”
빌은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나는 작게 탄식했다. 아이가 빙글빙글 웃으며 다시 고개를 숙이기에 그 까끌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 녀석이 나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믿기지 않았다.
빌은 내가 머리를 쓸어줄 때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형이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는 형을 본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냥 검술 훈련만 한다, 이번에도 검술 훈련을 한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것 같다⋯. 그런 이야기만 좀 들었거든요.”
“⋯.”
“그런데 형이 시어런 아카데미에 입학한 다음부터는 막, 아주, 막. 엄청나던데요.”
“⋯그런.”
“그래서 얼른 만나보고 싶었어요.”
씩 웃은 녀석이 가까운 거리에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민망한 기분이 들어 그 이마를 떠밀어 바로 앉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