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48)화 (148/176)

148.

금시초문이었다. 시어런에도 점을 보는 이가 있던가?

“사랑점?”

“안 해봤어? 꽃잎 하나씩 떼면서 날 사랑한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 하고 세어보는 거.”

“⋯들어는 봤다.”

꽃의 잎을 헤아려서 그런 간지러운 일을 한다니, 괜한 꽃을 괴롭히는 일이 아닌가 싶었으나 기억에 있었다.

제갈 아무개가 어느 날 다탁 위에 꽃을 소복하게 쌓아두고 혼자 웅얼거렸던 일이 생각이 났다. 무엇을 헤아리는가 싶었더니, 사랑점을 본 것이었나.

중원과 시어런에 같은 짓을 하는 놈들이 있다는 것이 우스웠다.

나 웃는 얼굴을 보고 따라 웃은 쉐이든이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툭 물었다.

“요즘 2황자는 어때?”

“⋯루베르?”

“응.”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루베르의 이야기를 끌어오는 것은 의도된 것일까?

나는 잠시 당황하여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여전히 쉐이든은 화분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나는 쉐이든에게 너 또한 루베르의 마음을 아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렀다.

쉐이든에게 모든 인간관계를 떠맡기고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마리앤의 일로 배운 나였다. 나는 고민하다 답했다.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아. 왜?”

“그냥, 걱정하는 거지, 뭐.”

쉐이든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웃는 얼굴로 물었다.

“지금도 걱정스러워?”

“조금은. 네가 괜찮다니 다행이다.”

쉐이든은 제 방으로 돌아가면서, 이 꽃이 저물면 영글 씨앗을 챙겨도 되겠냐고 물었다. 이 어여쁜 꽃도 그러길 원할 테지 싶어 기꺼운 마음으로 허락했다.

* * *

오크 가죽으로 된 책은 만질수록 그 감촉이 새로웠다. 소가죽 같기도 하고 악어껍질 같기도 하여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일개 짐승이라 생각하고 보면 차르르 녹색 빛의 윤기가 도는 다갈색 가죽이 튼튼하고 멋스럽게 느껴질 만도 했다.

그러나 책에 그려진 그림으로 본 오크가 두 발로 서서 걷는 모습이 사람과 지나치게 흡사하여 인피면구(*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위장용 가면)를 처음 봤을 적의 꺼림칙한 기분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스티븐은 오늘도 자상한 목소리와 다정한 태도로 책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지금 여러분이 손에 쥐고 있는 책처럼, 많은 몬스터는 귀한 부산물을 남깁니다. 유일 산맥 너머로 몬스터를 완전히 밀어내고 높은 방벽을 세우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중간고사 이전에는 몬스터의 크기에 따른 분류와 몬스터의 신체구조에 대한 것을 배웠다. 요즈음엔 몬스터의 약점과 부산물의 가치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몬스터를 사냥할 때에 많은 기사들이 투입되는 것은 안전을 위한 것이기도 했으나, 더 많은 이득을 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트롤의 약점은 머리와 심장이다. 목을 단숨에 베어 머리와 심장의 연결을 끊어도 죽었지만, 머리와 심장을 순차적으로 으깨어도 죽었다.

머리가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심장을 파괴하던가, 심장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머리를 파괴하던가, 아예 싸그리 불태워버리면 되살아나지 못하는 놈이었다.

그러나 기사고 용병이고 할 것 없이 트롤을 상대할 때에는 일검에 목을 베었다.

트롤의 피가 중요한 마법재료이자 연금재료로 쓰이기 때문이었다. 피륙에 상처를 내는 것은 귀한 피를 낭비하는 일이라 선호하지 않았다.

몬스터를 완전히 사냥감으로 여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오만한 짓이었다.

3m 남짓한 크기의 트롤이 중원에 떨어졌다면 일류 무인 스물이 달려들고서도 한 개 성은 충분히 부수어 놓았으련만, 시어런 사람들 눈에는 녹용과 다를 바 없는 보약 취급을 받는 것이 우스웠다.

짧게 웃었더니 루베르가 내 손등을 제 손등으로 툭 건드려왔다.

‘그냥.’

왜 웃느냐는 의미인 것이 빤해 그의 노트 구석에 짧게 적었다.

처음 필담을 할 때에는 내 노트 구석에 낙서를 했는데, 루베르가 제 노트에 적어달라 부탁을 해서 녀석의 노트에 이런저런 말을 적게 되었다.

필담의 대부분 별 시답잖은 이야기들이었다.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 것이냐, 방금 교수가 무슨 말을 했느냐, 지금 뒤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다, 뭐 그런 것들.

아이가 몇 번 더 이유를 물으며 수업 듣는 것을 방해하기에, 그 손을 내 손으로 덮어 감추었다.

루베르의 손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나 그 손을 감싸 쥔 직후 당황하여 내심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간 루베르가 재차 손을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해이해져 있었다.

꼼짝 않고 잠잠해진 손을 놓아주자 루베르가 제 책상 위로 손을 끌어갔다. 그 붉은 귓바퀴에 시선을 두지 않기 위해 한참을 노력했다.

아이가 내 노트 귀퉁이에 글자를 적었다.

‘이번 주말에도 도서관에 있을 거야?’

‘다른 아이들과 시험 공부를 할 것 같습니다.’

아이의 노트에 적어두고, 혹여 서운할까 싶어 서둘러 첨언했다.

‘보고서 과제 초안도 함께 정리하기로 해서.’

루베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이의 눈에서 서운한 기색을 읽어내지 못했다.

지금까지 몇 차례나 이런 일이 있었는데, 새삼 마음을 쓰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 까만 눈을 들여다보는 것이 머쓱하여 스티븐 교수에게 시선을 두었다.

교수는 고블린 등 가치 없는 부산물을 내는 몬스터를 화망에 가두어 한 번에 몰살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하여간 얌전한 생김새를 해서는 내뱉는 말마다 스산한 것이 퍽 흥미로웠다.

이제 곧 5월이었다.

2학년도 중반이 지났다. 나는 아카데미 생활에 충분히 익숙해졌다.

더 이상 시험 기간에 전전긍긍하는 일이 없었다. 지난해에는 암기 과목이 있는 날마다 괴로워 머리를 싸맸으나, 이제는 매주 꾸준히 예습하고 복습한 덕분에 대부분의 시험이 어렵지 않았다.

데미안이 일러준 대로 모든 시험에 공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덕이기도 했고, 루베르가 지난해 노트를 꾸준히 구해다 준 덕분이기도 했다. 이제 아해들이 하는 말이 낯설게 들리는 일이 줄었다.

덕분에 동무들과 도서관 소회의실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시험 예상 답안을 준비할 적에는, 이제 나도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해에 아무것도 모르고 앉아 아해들이 불러주는 것을 받아적기만 하던 때에 비하면 많이 자랐다.

어휴, 한숨을 폭 쉰 제니가 투덜거렸다.

“차라리 중간고사 때가 나았어요.”

“음?”

“유일 산맥과 시어런 제국에 대한 건 이미 알고 있던 게 많았거든요. 하지만 섀턴 사막이랑 다섯 왕국은, 제가 가 본 적도 없고 가 볼 일도 없는 곳이잖아요.”

“이렇게 인접해 있는 왕국인데도?”

“네, 별로 가 보고 싶은 마음도 안 들고⋯. 율란은 휴양지가 아름답다고 해서 궁금하긴 하지만요, 나머지 왕국들은 위험하고⋯. 저는 제 안전이 아주 소중한 사람이거든요.”

하기야, 내전이 꾸준히 계속된다던 오웬이나 사막 사람들이 많아 치안이 좋지 않다던 필릭스는 여행을 가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나마 시어런과 엇비슷한 풍습을 가진 플로이드는 1황자의 본거지라 나와 가까운 아해들 전부가 묘하게 꺼리는 구석이 있었다.

“비반은 율란이랑 풍속이 흡사한데, 비반도 싫어요?”

“바다랑 호수는 좀 다르죠. 전 사라스 강 인근에서 태어나서, 흐르는 물을 좋아해요. 고요하고 잔잔한 호수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초조하고 불안해져요.”

사라스 강은 시어런 수도와 세르벨 백작가 틈에서 시작하여 옐디더스 공작가를 길게 가르고 지나가는 거대한 강이었다.

그저 큰 정도가 아니라, 그 안에 마을 몇 정도는 우습게 들어가고도 남는 것이 황하에 버금갔다.

강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나는 것이 있어 입에 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름에 1황자가 혼인을 한다고 하더니, 그 이야기가 아직도 없네요.”

“1황자가요? 누구랑?”

“옐디더스 공작가 영애랑.”

“예에?”

깜짝 놀란 건 마리앤뿐이었다. 데미안과 쉐이든은 어깨를 으쓱했고, 이반과 벤자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게 묵묵했으며, 제니는 세르벨 남매에게 저번 겨울에 슬쩍 언질을 받았다고 했다.

제니가 제 노트에 동그라미를 서너 개 그리더니 입을 열었다.

“무언가 문제가 생겨서⋯ 겨울로 미뤄졌다는 이야기는 저도 들었어요.”

“무슨 문제가?”

“키아드리스 공작가에서요.”

키아드리스? 그 집에 적자는 웨슬리와 에드윈뿐이라고 알고 있었다. 내가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않자 데미안이 해설해 주었다.

“키아드리스 공작이,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 중에도 여아가 있는데 왜 옐디더스만 바라보냐고 해서 약혼 상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으음.”

“사생아라고는 하지만, 확실히 공작이 직접 낳았으니까⋯. 게다가 그 아이들의 부친도 공작저에 같이 살고 있잖아요. 공작이 직접 혼인을 위해 단승작위를 내려준다고 하면 말릴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 둘은 시어런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았지만, 귀족가와 혼인하기 위한 교육 정도는 받았다고 해요. 옐디더스 공작 영애와 나이도 엇비슷하다고 하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생각하는 것은 또다시 루베르였다.

루베르가 내게 고백하지 않으리라는 쉐이든의 말이 도로 생각이 났다.

황제의 혼인은 일반 귀족가의 혼인과 달랐다. 서로 비등한 세력이 조금이라도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하여 황제의 옆자리를 탐내고 있는 것을 보니, 루베르 그 아이도 그런 혼인을 해야 마땅하겠거니 싶었다.

그래서 아이도 내게 마음을 쏟아내는 대신 자중하겠다, 마음을 접겠다 이야기 한 것이 아니겠는가.

외숙부가 일찍 발을 뺀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두 공작가가 서로 대립하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인데, 발렌티아까지 그 경쟁에 끼어들었다가는 좋은 모습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잠시 이런저런 사교계 가십 이야기를 나누다가, 쉐이든이 탁탁 테이블을 두드려 대화를 멈추게 했다.

“그건 우리 방학 때 좀 더 얘기하고, 지금은 공부하자.”

옳은 말이었다. 나는 내가 필기한 세계 지리 노트를 제니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나를 뿌듯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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