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4월이 되었다.
중급 검술 수업에서 2월에 제국검법 기초, 형과 식에 대한 것을 배웠다면 3월에는 제국검법을 응용하는 법을 배웠다.
4월이 되자 마엘로 샌슨은 이제 제국검법으로 제국검법을 상대하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선언했다. 지금껏 사용한 모든 검식을 버리고 다급한 상황에서도 제국검법을 펼칠 수 있도록 몸에 익혔다.
제국검법으로만 이루어지는 대련은 직선적이고 심심한 맛이 있었지만, 안 좋게 박힌 습관을 고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나는 걸음과 걸음 사이의 틈이 너무 빨라 힘이 충분히 실리지 않는 것을 지적받았다.
창천무애검을 사용할 때에는 검법에 실린 힘, 크게 내치는 힘으로 간극을 메꾸어 모르던 단점이었다.
약물 제조 실습, 즉 연금술 수업에서는 피부와 머릿결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향유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2월에는 햇빛 차단 연고를, 3월에는 흉터제거 연고를 만드는 법을 배웠던 탓에 겉모습을 가꾸는 데에 열중하는 것이 중급 연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의문을 세드릭에게 전했더니, 세드릭이 깔깔 크게 웃더니 친절히 대답해주었다.
“연금은 돈이야, 친구야.”
“⋯예?”
“연, 금. 금을 만드는 학문이라는 말은 즉 돈이 되는 것을 만든다는 거지. 돈은 죄가 없고,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사치재를 만드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야. 이렇게 번 돈을 옳게 쓰느냐를 따져 봐야지.”
“옳게 쓴다 하심은⋯.”
“너희는 지금 바로 연금술로 희귀병을 치료하는 연구를 할 수 있는 실력이 없지. 그런 중요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정말 많이 필요하단다. 지금 배우는 것들이 그 중간 계단이 되어 줄 거야.”
나는 얌전히 수긍했다. 옆 조의 아해 하나가 짓궂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돈을 벌어서 그런 위대한 약을 개발하지 못하면요?”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좋은 물약이든 나쁜 물약이든 판매할 곳이 있어야 팔 수도 있고, 만들 수도 있는 법이니까. 너희 같은 꼬마들도 연금 시장을 넓히는 데 한몫 하고 있단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것을 흘긋 보았다.
⋯새삼스럽게 세드릭이 다시 보였다.
나는 해이한 마음을 가졌던 것을 반성하고, 앞에 놓인 재료들을 정성스럽게 빻아 기름에 녹여내는 작업에 몰두했다.
브리아나 카사블랑카는 이번 달에는 섀턴 사막과 다섯 왕국의 지형지물에 대해 강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일전에 유일 산맥에 대한 것을 제일 먼저 강의한 것과 같이, 섀턴 사막에 대한 것을 강의 첫 목록에 올렸다.
“섀턴 사막의 이름은 사막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식으로 지어졌어요. 아홉 신 창세신화에서는 첫 번째 날에 바다가, 두 번째 날에 대지가, 세 번째 날에 태양과 달이 각각 생겨났다고 하죠. 사막인들은 이 세 번째 날에 달보다 태양이 먼저 태어났다고 주장해요.”
신화에 대한 것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나도 빤히 아는 옛이야기였다. 브리아나는 칠판에 그려진 지도의 왼켠에 점 몇 개를 찍었다.
“급하게 태어난 태양은 너무 뜨거워서 먼저 태어난 대지를 완전히 태워버렸고, 태양을 만든 여신은 서둘러 그 치맛자락에 열기를 가두고 서쪽에 숨겼다고요. 실제로 섀턴 사막은 서쪽으로 갈수록 온도가 높아, 어떤 모래는 지글지글 끓어오르죠.”
학생 하나가 손을 들었다. 브리아나가 질문을 허락했다.
“섀턴 사막을 횡단한 사람이 있나요?”
“물론이죠. 신의 흔적을 찾는 광신도들은 그 땅을 성지라고 부르는걸요. 태양의 성지까지 다녀오는 데에는 필릭스 왕국의 가장자리에서 출발해도 편도로 한 달은 꼬박 걸리지만, 꾸준히 왕래가 있어요.”
다섯 왕국 중 플로이드를 제외한 나머지가 섀턴 사막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그 중에서 사막다운 사막을 안고 있는 것은 필릭스 왕국 뿐이라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비반과 율란은 높은 산으로 섀턴 사막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웬은 유일 산맥의 그늘을 더 짙게 뒤집어썼다는 설명이었다.
브리아나가 지도에 그린 점들이 섀턴 사막의 오아시스를 표시한 것이라는 것은 조금 후에 알았다.
그러나 사막은 늘 변하는 법이고, 오아시스의 위치도 늘 변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하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문득 궁금해져서 쉐이든의 손등을 깃펜으로 건드렸다.
“왜?”
“특수 제국기사단은 섀턴 사막에도 나가?”
“어어, 오웬 근처로는 갈걸. 지금 얘기 나온 성지까지 가는 일은 없어.”
“그래.”
그럼 나와도 큰 관련이 없을 터였다. 기말고사를 대비하여 필기는 꼼꼼히 했다.
브리아나는 오아시스의 위치와 각 성물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신이 남긴 흔적이 인세의 것이 아닌 것처럼 거대하다 하니 언젠가 한 번은 구경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응급처치 기초에서는 레이 깁슨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갈대를 물고 물속으로 들어가게 할 적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각종 조난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응급처치에 대한 생각을 되돌리게 되었다.
이 자가 아해들이 조난되기를 바라는 사람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듣다 보니 유용한 이야기가 많았다. 먹을 수 있는 이끼와 먹으면 안 되는 이끼에 대한 것은 적어도 통나무에 붕대 감는 것보다 재미있었다.
실전 비도술 수업은 수업 그 자체도 여전히 재미있고 흥미로웠으나, 수업이 끝난 뒤 윌턴과 둘이 보내는 시간이 더 좋았다.
중원 식은 아니었으나 시어런 식으로 은신하는 법을 배웠다.
중원에서는 내공을 운용하여 주변의 기감을 흐리게 하였다. 그러나 시어런의 은신술은 그림자 뒤에 숨어 호흡을 조절하는 방식이었다.
겨우 이런 것으로 고수의 눈을 속일 수 없을 것이라 여겼지만, 윌턴이 잠시 눈을 감으라 하고 시범을 보였을 적에 나는 크게 놀랐다.
내 등 뒤의 나무 위에 올라간 것을 모르고 일각이 넘도록 그를 찾아 헤매고 난 뒤, 나는 그의 비법을 배우고 싶어 안달이 났다. 비도술과 마찬가지로 단숨에 배울 수는 없었다.
언젠가 나 또한 경지에 오를 날을 그리며 성실히 굴었다.
목요일에는 상대적으로 한가했다.
골렘에게 운공법을 인식시킨 이후로는 내가 손 댈 일이 딱히 없었다. 더글라스나 볼더가 운기조식을 할 때에는 다섯 시간이 넘도록 앉아있고는 했지만, 이제는 한두 시간 정도나 질답 시간을 갖고 돌아와 개인 공부를 했다.
목요일 오후에는 대개 쉐이든과 시간을 보냈다. 루베르는 그 시간에 제왕학과 외교학을 배워야 해서 무척 바쁘다고 했다. 내 여유 시간을 모조리 차지하고 싶어하는 아해가 걱정이 되어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듣는 수업 중에 마엘로 샌슨의 강의를 제하고는, 몬스터학 개론 수업이 가장 즐거웠다. 루베르와 화해한 덕분에 그와 둘이 앉아서 이런저런 필담을 나누고는 했다.
녀석은 여전히 가끔 내게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 조르고는 했지만, 대체로 담백한 태도를 유지했다.
특히 수업시간에는 딴짓하지 않고 열심히 필기에 몰두하고, 주말 내내 몬스터를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 나와 토론하는 일을 즐겼다.
트롤을 상대할 때에 제국검법의 몇 번째 식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궁리하는 등의 일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제니가 준 화분에 꽃봉오리가 영글었다.
가장 먼저 꽃봉오리를 발견한 것은 당연히 쉐이든이었다. 샛노란 봉오리가 생긴 뒤로 쉐이든은 아침저녁으로 내 응접실에 출입했다. 아침 식사 전에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아 어색할 일은 없었다. 덩달아 나 또한 화분을 잦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4월 끝물의 어느 날, 아침부터 쉐이든이 달뜬 기색으로 속삭였다.
“오늘이야. 오늘 피겠다.”
“그걸 어찌 알아?”
“봐, 여기 꽃봉오리 앞쪽이 벌어져 있잖아.”
내가 보기에는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으나, 아이가 그렇다기에 그런가보다 싶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와 꽃이 피어나는 것을 구경하자 수선을 떨기에 그러자 하고 저녁 식사를 일찍 마치고 들어왔다.
해가 진 이후로 응접실에 들어올 적에는 늘 마법등을 환하게 켜 두었다.
오늘은 커튼을 걷어 달빛도 응접실 안으로 끌어왔다. 반틈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서늘한 밤바람에 창가 가까운 선반에 얹힌 꽃대가 산들거렸다.
나는 쉐이든과 가볍고 높은 의자를 끌어다 앉아 화분을 들여다보았다.
이 나이 먹도록 이런 일을 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미 피어난 꽃을 휘 둘러보고 저 할 일을 찾아 터벅터벅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이 작은 생명이 피어나는 순간을 기다리며 숨을 죽이는 일이 무척이나 간지럽게 여겨졌다.
그러나 그 꽃송이가 탁, 터지듯 벌어지는 순간이 오자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보게 되었다.
아름다웠다.
말로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은은한 달빛을 머리에 이고 진 꽃봉오리가 샛노란 병아리 같기에 피어난 꽃도 샛노랄 줄로만 알았는데, 불그스름한 속잎은 맑고 연한 분홍빛이었다. 노란 수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꽃분이 유난히 많아 꽃잎이 보송보송하게 보였다.
쉐이든은 갓 태어난 어린 짐승을 앞에 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꽃의 이름이 뭔지 알겠어?”
“⋯아니.”
“프로딜 아스터. ⋯주변 환경에 따라 색이 변하는 종류의 꽃이야.”
그렇구나. 나는 신기하여 손끝으로 여린 꽃잎의 끝을 톡 건드려 보았다. 약간 촉촉한 꽃잎이 파르르 떨며 꽃분을 흘렸다. 내 손끝에 노랗게 꽃분이 묻어난 것을 보았다.
쉐이든은 이 꽃이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에 피는 꽃이고, 여름이 오기 전에 꽃을 볼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본래 식물을 키우는 것을 좋아했느냐 물었더니 그건 아니라고, 하지만 예쁘지 않냐며 웃었다.
한참 꽃을 들여다보며 아이가 먹먹한 표정을 하기에 슬쩍 물었다.
“이 꽃에도 꽃말이 있어?”
“있지.”
“뭔데?”
“⋯서툰 첫사랑.”
다시 꽃을 건드리려 굴었더니, 쉐이든이 내 손을 걷어냈다. 나는 꽃을 더 괴롭히지 않고 쉐이든의 얼굴을 살폈다.
아이가 얼마나 열렬히 꽃을 들여다보고 있는지, 그 눈동자에 분홍 꽃이 박혔다.
“⋯대부분의 아스터들은 사랑에 대한 꽃말을 가지고 있어. 분홍색은 서툰 첫사랑, 노란색은 사랑의 기쁨, 붉은색은 정열적인 사랑⋯. 그래서 이 꽃을 가지고 사랑점을 보기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