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46)화 (146/176)

146.

월요일.

필기시험을 따로 치르지 않는 중급 검술 수업은 휴강도 없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연무장에 나가자마자 익숙한 얼굴들과 마주했다. 저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팔을 붕붕 내젓는 빌의 너른 등을 두어 번 도닥여주고, 저를 향해 까닥 고갯짓으로 인사하는 벤자민과도 인사했다.

아침 식사를 함께 한 쉐이든이 제 동무들과 말을 섞는 모습을 보다가, 제 쪽으로 곧게 걸어오는 루베르에게 시선을 두었다.

어색하지 않게 인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개를 까닥여 아는 체하자 루베르가 나를 말끄럼 내려다보다 슬쩍 고개를 숙였다.

⋯쓰다듬어달라는 것이다. 엊그제까지였다면 스스럼없이 아이의 매끈한 머리칼을 쓸어주며 얼렀을 것이다. 그러나 손끝이 굳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루베르는 가만히 기다렸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의 머리꼭지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그러자 아이가 와락,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품에 파고들었다.

목덜미에 닿아오는 숨이 뜨거웠다.

“⋯나 피하지 마, 안 그럴게.”

아.

내 귓가에 닿는 목소리가 건조했다. 아이가 주말 내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손끝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당혹한 내가 넋을 놓고 가만히 서 있자, 나를 끌어안은 팔에서 힘을 빼고 바로 선 루베르가 씩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예쁘고, 예쁘고, 예뻐서⋯.

나는 어떤 답도 되돌릴 수 없었다.

중급 검술 수업이 시작되었다. 집중하지 못해 여러 차례 지적을 받았다.

이렇게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늘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기쁜 일이었고 매일이 충실한 삶을 소중히 여기며 살던 나였다.

그러나 오늘은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중급 연금술 강의실에 앉아, 지난주 제출한 보고서에 대한 피드백을 듣는 내내 루베르 그 아이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맴돌았다.

안 그런다니, 무엇을 안 그런다는 말인가? 아해의 마음이 다친 것만은 알겠는데, 그로 인해 아해가 어떤 결심을 내렸는지 감히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

마리앤이 생글생글 웃으며 여전히 인기가 많아 심란하냐 나를 놀렸다. 적당히 아니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루베르의 일을 여기저기 떠들어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많이 아끼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새삼 알게 되었다.

화요일.

고급 검술 시간이었다. 루베르는 여상한 낯으로 인사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대련을 관람했다.

그러나 나는 내 뺨에 늘상 닿아오던 시선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마음이 쓰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해가 늘 나를 바라보던 것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오후에 있는 세계 지리와 응급처치 기초 수업 모두 지난주에 시험을 보아 휴강이었다.

오후 시간이 내내 비는데, 루베르에게 함께 놀러가자 말을 꺼낼지 말지를 한참 고민했다.

한 번만 나와 함께 놀아 줄 거냐, 그렇게 물었던 아이였다. 제 시간표를 익히 알고 있을 루베르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 함께 나가자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래서 오후나절 내내 연무장에 나가 검을 그었다. 많은 아해들이 쉬이 오가는 대연무장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노을이 연무장 가득 붉은 빛을 드리울 적에야 제가 루베르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 있으면 아해가 먼저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마음이 헛헛했다.

수요일.

매일 아침 머리를 쓰다듬어달라 기대어오던 루베르가 치대는 일이 없어졌다.

아쉬운 손끝이 움찔거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얼빵한 낯으로 인사해오는 빌 녀석의 머리나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까끌하고 보송한 밤송이 같은 머리터럭이 루베르의 것과는 확연히 달라 만족스럽지 않았다.

엉겁결에 머리에 뿔이 서서 어리둥절하던 빌이 해사하게 웃으며, 형님이 오늘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댔다. 그 뺨이나 한 번 꼬집어주고 말았다.

이켠을 바라보는 루베르의 시선에 치밀어오르는 한숨을 꾹 눌러 참았다.

나는 나를 관조하는 것에는 익숙하다 여겼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의 길을 걸어가는지에 대한 확신이 늘 있었다.

허나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제국의 계보 수업 내내 칼립스 아그리젠트를 넋 놓고 바라보게 되었다.

쉐이든이 내 어깨를 흔들어 유인물을 살펴보라 조언해 주었으나 그때뿐이었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나 칼립스의 뒤를 쫓아 걸었다.

칼립스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불편함이 그득 담긴 것을 알았다. 허나 물어볼 자가 이 자뿐이었다. 그래도 교수라고 이것저것 일러주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사내였다.

나는 조용히 물었다.

“교수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오르겐 선배를 마음에 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기분이셨습니까?”

“뭐요?”

칼립스가 당황한 표정을 채 가리지 못하고 나를 보고,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에른하르트 영식이 그게 왜 궁금합니까?”

“저를.”

“⋯.”

“⋯.”

“저를, 그리고?”

“⋯많이 어린 사람이,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예?”

칼립스가 천장을 바라보며 심호흡했다. 나는 그가 답을 내어 줄 것을 기대하고 가만히 있었으나, 내게 떨어진 목소리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지금 저랑 장난합니까?”

장난이 아니라 답해도 내 나이가 아직 열넷이니 스무 살은 더 먹고 와서 그딴 질문을 하라며 꾸중하는 것에 대답할 길이 없었다.

여전히 마음이 복잡하고 혼란한 와중에 답을 구할 방도를 잃어 기운이 쪽 빠졌다.

때문에 실전 비도술 수업에도 집중을 하지 못했고, 수업이 끝난 후에 윌턴과 개인 교습을 할 적에도 힘이 없었다.

그러지 말아야지,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애써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쉽지 않았다. 당연히 그런 나를 쉽게 알아챈 윌턴이 보법에 대한 조언을 그만두고 내 안색을 살폈다.

“오늘 무슨 일 있나?”

“⋯제가 지금 그렇게 이상합니까?”

“무척.”

“아니, 그.”

“⋯.”

“⋯제가 아직 어린 탓인가 봅니다.”

“⋯?”

윌턴에게 깍듯하게 사과하고 교습을 일찍 마치기로 했다. 내 어깨를 도닥여 준 윌턴이 침착한 목소리로 조언 한 마디를 덧대 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일은 시간이 해결해주기 마련이다. 침착한 마음을 갖고, 숨죽여 기다리다 보면 답이 보일 것이다. 그때를 놓치지 마라.”

“⋯예. 감사합니다.”

그의 조언이 마음에 깊게 와닿지 않아, 힘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목요일.

고급 검술 시간 내내 루베르와 한 번도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서늘한 표정을 한 루베르의 뺨을 한참 보았다.

바로 저번 주에 아이가 해사하게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던 일이 꿈만 같았다. 갑갑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글라스는 오후에 다시금 피를 토했다. 그간 꾸준히 단련하여 기혈이 두껍고 튼튼해지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내공은 기혈을 감싸며 흘렀으나, 마나는 기혈을 긁으며 흘렀다.

다른 일로 심란한 와중에도 걱정이 되었다. 다시 한번 직접 단전을 만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 조언했더니, 더글라스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내심 이번이 마지막 시도일 것이라는 생각은 했어요. 그래도 어느 정도 원리는 깨달았으니 제가 알고 있는 마나운용법과 접목하여 인체에 적용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내 보려고 해요.”

“그러면.”

“네, 이제 한동안 다시 골렘으로 실험해 보려고요.”

옆에서 눈치를 보던 볼더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그동안 골렘을 세 대 더 만들어 두었거든요. 하나는 머스탱 교수님의 방법으로, 하나는 제 방법으로,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에른하르트 영식이 구상한 혈도를 따라 심법을 운용하도록 세팅해 둘 생각입니다.”

“⋯이번 것도 투명합니까?”

“예? 당연하죠.”

무척 심란하여 잇새로 내민 한숨이 태산과도 같았다.

* * *

금요일.

지난밤 내내 심력을 쏟아 고민하여 답을 내긴 했으나, 그것이 옳은 방도인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장 이런 기분으로 일주일을 더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중급 검술 시간 내내 틈을 보았으나 루베르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내가 루베르 쪽을 힐끔힐끔 보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수업이 끝나자마자 벤자민과 빌 등 다른 아해들을 이끌고 자리를 피해 준 쉐이든이 없었다면 아이를 붙잡지도 못했을 터였다.

아침에 눈인사만 겨우 하고 구슬땀을 흘려가며 제국검법에 몰두했던 루베르였다. 내가 손목을 붙잡아 달아나지 못하게 하자, 아이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나를 돌아보았다.

“⋯에른하르트 영식?”

“우리.”

목소리를 내는 일이 이렇게 힘든 것인 줄 몰랐다. 나는 루베르의 낯을 똑바로 보았다.

“놀러 가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어?”

루베르는 눈을 두 번 깜빡였다. 놀란 듯 크게 뜨인 눈에, 동공이 크게 번졌다.

새까만 눈에 더 새까만 구석이 있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 눈에 스민 것은 분명히 기쁨이다. 속이 울렁거렸다.

루베르가 대답하지 않는 동안, 그 손목을 쥐고 가만히 기다렸다.

희고 냉막한 얼굴에 서서히 붉은 물이 들었다. 그 얼굴에 스민 붉은색은 내가 익히 아는 것이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찬찬히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 동그란 귀끝에 내 손이 스칠 적에 아이가 크게 놀라, 나도 멈칫했다.

그러나 후회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가만히 숨을 죽였다. 아이는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웃는 낯이 이제야 익숙했다.

“⋯응. 그랬지.”

“오늘 오후 수업이 휴강이고⋯. 주말도 괜찮습니다. 이번 주까지는.”

“맞아, 시험이 끝났으니까⋯.”

“예.”

나는 여전히 미동을 곁에 끼고 다니는 취미가 없었다. 그런 일은 옳지 못하다 여겼다. 이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매일 아침 시무룩한 낯을 애써 가리고 멀거니 서 있는 루베르를 보는 일이 너무 괴로워 참아낼 수가 없었다.

그냥, 친하게 지내는 것은 괜찮지 않겠나 싶었다.

이 아해의 마음이 자연히 스러질 적까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금요일 오후에 루베르와 길게 산책을 했고, 토요일에는 둘이서 식물원에 한 번 더 다녀왔다. 일요일에는 함께 공부를 했다.

그러는 동안 다시 손을 맞잡는 일은 없었다. 루베르가 충분히 밝게 웃었기 때문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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