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내가 왜 이 땅에 태어났을까.
문득 볼더의 쟁쟁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마나의 본질에 대해 떠들어대던 중에 스치듯 언급한 말이 마음 한켠을 차지하고 제 덩치를 부풀렸다.
사물의 본질은 기능에 있고, 사람의 본질은 사랑에 있다고 했던가.
그러는 볼더는 독신이지 않느냐 물었을 때, 그가 크게 웃으며 답한 말이 비죽비죽 기억을 비집고 튀어나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시어런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에 정성을 쏟는지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과연 그 말이 옳았다.
저 또한 벌써, 하루에 한 번은, 사랑, 그 단어를 떠올리고 있지 않은가.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 살 적에는 이렇지 않았다. 그냥 나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던 대로 살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작은 세상에서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크게 듣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나 너른 세상에 나와 이 땅의 법칙과 사람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저는 변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사랑 사랑 노래를 불러대니 중심을 잡으려 해도 쉽지 않았다. 부럽기도 하고 애타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내 평생 은애하는 마음일랑 가져 본 일이 없어, 어디 한번 너도 해 보아라 하고 천지신명이 상으로 나를 옮겨 심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이 또한 내가 전생에 지은 업이 많아 벌을 받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리 갈급하게 원하고 구해도 끝내 이르지 못할 멀디 먼 길인가보다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화경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가야 할 길은 멀고 아득하기만 했다.
본래의 자신이라면 겨우 이런 일로 흔들리는 일이 없었을 터였다. 곁가지로 따라붙는 것이 많아 자꾸만 약해지는 제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이런저런 얼굴이 스쳐가고, 감은 눈 안쪽으로 루베르의 환한 낯이 다시 떠올랐다.
제 형이 황제가 되더라도 저는 안녕할 것이라고, 그렇게 심약한 소리를 하는 아이였다. 그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어도 그 꿈만은 제가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자꾸만 아이에게 손이 가는 것부터 어찌해야 할 일이다.
나이 찬 여아에게 손을 대면 안 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루베르 그 녀석에게도 쉬이 손대지 않아야겠다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오랜 시간 뒤척였다. 새벽 내내 잠이 오지 않았다.
* * *
주말 동안 루베르를 보지 않았다.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토요일 아침 일찍 방으로 찾아온 쉐이든이, 시험이 끝났으니 동무들끼리 한 번 모여 노는 것이 어떻겠냐 말을 꺼낸 탓이었다.
혹여나 루베르가 맥없이 나를 기다리는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 사용인에게 부탁하여 말도 전해두었다. 이번 주말은 동기들과 시간을 보낼 것이니 편히 쉬어라 하고.
덕분에 토요일은 떠들썩하게 보냈다. 쉐이든, 데미안, 마리앤, 제니, 이반에 벤자민까지 보탠 대인원이었다.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며 시험 보기 좋은 과목과 끔찍한 과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 마리앤은 응급처치 기초 수업을 절대 듣지 말라 피력했는데, 벤자민은 고난을 극복하는 세 가지 방법 수업을 다음 학기에 꼭 들으라 강권했다.
지난해 2학기에 벤자민이 홀로 듣고 진땀을 뺀 과목인 것을 알아 속지 않았다.
늦은 시각에 기숙사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헤어지기 아쉬우니 일요일에도 다 함께 시험 본 것의 오답노트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냐는 데미안의 말에 수긍해 고개를 끄덕였다.
동기간에 함께 듣는 과목이 많아 서로 돕기 좋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켠이 내내 무거웠다.
이러면 제가 루베르를 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나는 마음에 사람을 품어 본 적도 없고, 누군가 나를 마음에 품은 것을 본 일도 없었다.
시어런에 와서 낯선 일이 어디 한두 가지겠냐만은, 이번 일은 그 중에서도 손에 꼽게 혼란스러워 난처하기만 했다.
루베르가 속이 상해 또 차갑게 굴까 걱정이 되었다가, 그렇다고 그 아해의 마음을 받아 줄 수도 없지않느냐 저를 꾸짖었다가, 아해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맞기는 한가 하고 기가 막혔다.
일각에 십수 번도 마음이 바뀌었다.
은연중에 그런 모습이 티가 났던 것일까.
한참 시험 문제와 교과서를 펼쳐두고 옳은 답안을 끄적거리던 마리앤이 불쑥 내게 물었다.
“미카엘, 고민 있어요?”
“⋯아닙니다.”
“아까부터 계속 한숨 쉬고, 책은 한 장도 안 넘어가고, 눈을 요렇게. 요렇게 처연하게 내리깔고 속눈썹 그늘을 요오기까지 드리우고 있는데요.”
“⋯제가 그랬습니까?”
“네. 제니도 봤지요?”
“두 시간 동안 아홉 번 한숨 쉬셨어요, 미카엘.”
고개를 들고 보니 소회의실에 모인 아해들이 전부 나를 보고 있었다.
저들 공부할 것은 내려놓고 왜 날 구경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싶어 실소했다. 손에 쥐고만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물어볼까, 말까. 입 밖에 내어도 되는 이야기인가.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예를 들어, 만약. 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네에.”
“누가 저를 좋아하는 것 같다면은⋯.”
“네에?”
유심히 듣던 아해들이 하나둘 웃기 시작했다. 왜 웃는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가만히 앉아있자, 깔깔 웃으며 책상을 두드리던 마리앤이 수선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미카엘 좋아하는 사람이 이 아카데미에 어디 한둘이에요?”
“아니, 그런. 친우로서가 아니라.”
“으응. 미카엘 좋아하는 사람 열 명 이름 알아요.”
“저는 스무 명.”
장난스럽게 떠들어대는 말투에 속이 상했다. 그저 가벼이 입에 올릴 수 있는 마음이라면 이렇게 심란할 일도 없을 터였다.
입을 다물고 얌전히 있자 이반이 슬쩍 물었다. 평소 이런 일에 입 대는 일이 없던 놈인데도, 눈매에 웃음이 그득했다.
“상대는 누구입니까?”
“⋯제 이야기가 아니라니까요.”
“예, 미카엘 이야기가 아니라고 치고. 누구길래 이렇게 마음을 쓰나 궁금해서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아해들의 눈이 반짝반짝한 것이 민망하여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성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자니 옆자리에 앉아 있던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받아주고 싶지 않은 거라면 선을 긋는 게 좋겠죠.”
“선을?”
“뭐,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미리 이야기를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잠시 루베르를 불러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게 너는 아니다 하고 말하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아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말간 낯이 어떤 식으로든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으면요.”
“그럼 지금은 마음을 받아줄 수 없을 것 같다, 네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게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게 최선이죠, 뭐.”
“⋯내가 지금 여유가 없다.”
데미안의 말을 되뇌듯 따라하자, 쉐이든이 단박에 끼어들어 말을 막았다.
“아니, 내 생각에는 그냥 모르는 척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어. 나왔다, 나쁜 남자.”
“조용히 해요, 마리앤.”
여전히 장난스러운 어투로 발을 동동거리는 마리앤에게 한 차례 쏘아붙인 쉐이든이 나를 똑바로 보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미카가 눈치 없는 건 이 아카데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 그냥 가만히 있으면 상대가 먼저 고백을 하든, 포기를 하든 할 거란 말이야.”
“⋯.”
내가 눈치가 없다니, 연륜이란 것이 있는데. 기가 막혔지만 일단 들었다.
“고백을 받기 전까지는 솔직히 모르는 거잖아. 상대가 널 좋아해도 사귀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입장이란 것도 있으니까⋯.”
“⋯.”
“고백을 받으면 그때 잘 생각해보고, 받아주고 싶으면 받아주고, 거절하고 싶으면 거절하고 하는 거지. 상대가 별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도 괜찮아. 관계가 틀어지고 싶지 않은 거잖아.”
⋯솔깃한 의견이었다. 얌전히 듣고 있자니 옆에서 제니가 끼어들어 물었다.
“쉐이든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요?”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미카엘도 지금까지 몰랐던 것 같은데.”
나는 쉐이든의 얼굴을 멀거니 보았다. 그 하얀 얼굴이 시침 뚝 떼는 모습을 보고, 아, 이 녀석은 알고 있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발터와 칼립스가 그런 관계인 것을 몰랐던 때에도 쉐이든은 먼저 알고 있었지. 루베르가 나를 좋아하는 것도 이 녀석은 먼저 알고 있었을 터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울컥 궁금한 마음이 솟는 것을 참아 눌렀다.
먼저 거절하고 선을 긋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일이 쉬운 일이기는 했다.
쉐이든이 조심스러운 것은 루베르가 황자이기 때문일 터였다. 쉐이든은 일전에 황자와 내가 가까운 것이 좋은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로 루베르와 멀어지고 싶지 않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쉐이든의 말이 옳게 들렸다.
그렇게 잠자코 있었더니 쉐이든이 금방 화살을 마리앤에게 돌렸다.
“그러는 마리앤은 테너 선배랑 좀 어때요. 요즘은 테너 선배 이야기를 잘 안 하던데.”
“아, 뭐. 교양 수업 하나 같이 듣고, 저녁 먹고 가끔 데이트 하고, 주말엔 같이 공부하고⋯. 그 정도예요.”
“이번 주말에는 왜 같이 안 있고요?”
“아니, 내가 내 친구가 그리워서 같이 놀고 싶다는데! 날 쫓아낼 생각이에요?”
마리앤이 책상을 탕 치고 일어나 분개하자 와르르 웃음꽃이 피었다.
여기저기서 아니요, 잘못했어요, 얌전히 사과하는 소리를 내는 아해들을 매서운 눈으로 한 번 살펴본 마리앤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새침하게 콧소리를 냈다.
“어디 쫓아내기만 해 봐요. 다들 가만 안 둘 거야.”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손들고 벌 설까요?”
“흥. 연애를 한다고 해도, 세상에 그 한 사람만 남는 건 아니잖아요. 난 글리 오빠를 아주 사랑하고, 아주아주 좋아하지만, 글리 오빠가 제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러분도 아주 소중하다구요.”
귀엽고 앙큼한 소리였다. 한참 울적하던 나도 덕분에 웃었다.
제 허리에 양손을 얹고 위엄을 부리는 척, 귀여운 짓을 하던 마리앤이 배시시 웃으며 다시 펜을 손에 쥐었다. 그 모습을 재미있게 보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마리앤은 어떻게 그렇게 연애를 잘합니까?”
내 말을 들은 마리앤이 까르르 유쾌하게 웃더니 깃펜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글쎄요, 타고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