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44)화 (144/176)

144.

오늘 하루는 루베르와 보내기로 작정한 터라 급할 것이 조금도 없었다. 아해가 말을 고르는 동안 가만히 기다렸다.

내가 별말 없이 바라보자, 머뭇거리던 루베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건 그냥, 에른하르트 영식이 궁금하다고 해서 따로 알아보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정말로 그런지는 잘 모르고⋯.”

“예.”

“어릴 적부터 컴바인 영식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테너 영식이 따라서 좋아했다는 말이 있어. 옷이나, 장난감이나, 애완동물이나⋯. 그러면 보통 컴바인 백작이 컴바인 영식의 것을 테너 영식에게 주고는 했대.”

“음?”

“그러니까, 올리버 컴바인 영식이 그걸 원하지 않아도 말이야.”

일전에 글로틴과 올리버를 함께 만났을 때, 애완동물 이야기를 참 오래 했던 기억이 있었다. 글로틴이 몇 년을 아끼고 예뻐했다는 그 개도 원래는 올리버의 것이었을까.

쉐이든과 데미안의 목소리도 함께 떠올랐다. 둘이 함께 마리앤을 좋아할 수도 있는 것 같다고.

글로틴 테너가 좋아하는 사람은 마리앤인가? 아니면, 올리버가 좋아하는 마리앤인가?

내가 심란한 표정을 하고 있자 루베르가 나를 달래려 굴었다.

그래도 글로틴이 다른 이에게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더라, 성적도 좋고 태도도 좋은 편이라고 하더라, 그렇게 해도 컴바인 영식이 다 받아주니 그러는 것이 아니겠느냐, 결국 친하고 가깝게 지내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빈말로 들렸다.

“뭐, 그런 이야기는 역시 본인이 아니면 모르는 거잖아. 평생을 함께 했고, 앞으로도 평생을 함께 할 사이인데.”

“⋯저는, 혹시 마리앤이 그 과정에서 슬퍼할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건⋯. 그렇네⋯.”

내가 심란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자, 루베르가 옷을 추스르며 일어섰다.

“우리, 단 것 먹으러 갈까?”

“⋯예?”

“그럼 기분이 좀 좋아질 것 같아서.”

“아, 음⋯. 그러지요.”

아직 배가 꺼지지 않았으니 길을 걷자 하기에 그러자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거리를 거닐었다. 지난해에는 무엇을 보아도 새롭기만 했는데, 이제는 무엇을 보아도 눈에 익었다. 익숙한 고깔모자를 발견하여 잠시 멈춰 섰다.

병아리 인형을 팔았던 마법사가 반가운 낯으로 나를 향해 코끼리 인형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그 앞에 섰다.

병아리 인형과 꼭 닮은 둥그렇고 까만 것이 있어 턱짓했다.

“이거 선배 닮았네요.”

“나? ⋯이게?”

“예.”

“이건 까마귀 인형입니다! 삐약삐약 대신에 깍깍 하고 울지요. 세 번 누르면 노래도 불러요.”

이전에도 그러더니, 물건 팔 줄 아는 사내였다.

까맣고 동그란 것이 내 손에 들어왔다. 말캉한 손맛이 이번에도 좋았다. 내가 인형을 몇 번 주무르다가 양쪽으로 당겨 볼을 늘리는 것을 보더니, 루베르가 곧장 제 지갑을 꺼내 값을 치렀다.

내심 살 생각으로 손에 쥔 것이라 거절하지 않았다.

“선배도 하나 사 드릴까요.”

“⋯응.”

“무엇으로?”

“어, 음⋯. 에른하르트 영식이 골라줬으면 좋겠는데.”

좌판 위를 한참 살폈다. 내가 날짐승 인형을 받았으니 네발짐승 인형을 골라 주고 싶었는데, 마땅한 것이 없었다.

둥글둥글한 몸체에 귀가 둥근 하얀 곰인형을 가리켰다.

“이건 어떻습니까?”

“어⋯. 나는 분홍색이 좋아.”

“제가 골라주는 것이 좋다면서요.”

아이의 손에 분홍색 곰인형을 쥐여 주고 값을 치렀다.

긴 꼬챙이에 꿰인 닭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곱게 갈아 낸 얼음 과자도 하나씩 손에 들었다. 얼음 사이사이에 꽂아 둔 과자와 크림, 시럽 따위가 달큰해서 맛이 좋았다.

나란히 거닐며 이런저런 것을 구경했다. 마법 아티팩트를 구경하는 일도 즐거웠지만, 루베르가 잡아끄는 길로 걷는 것이 더 즐거웠다.

무얼 그리 자꾸만 해 주고 싶어하는지, 왜 그리 분주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루베르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돌아볼 적마다 웃음이 났다.

어여쁜 소리를 듣고 광장으로 향했다.

별과 달을 꿰어 만든 듯 빛나는 마법등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마법등 중 몇몇은 저들끼리 우르르 날아다니고 몇몇은 실에 꿰어 매달려 파득거렸다.

고운 노랫소리가 아주 멀리, 아주 먼 곳까지 번지고 있었다.

현악기 하나를 품에 안은 여인이 광장 한가운데에 앉아 노래했다. 고운 목소리가 높게 올라갈 적마다 마법등에서 황홀한 빛가루가 보슬보슬 떨어져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 위에 얹혔다.

눈과 귀가 함께 즐거워 먹먹한 기분에 취해있기를 한참.

루베르가 조심스럽게 내 손바닥에 제 손끝을 밀어 넣었다.

우리가 허리를 감싸 안고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틈에 서 있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나는 손을 피하지 못했다.

저를 마주 쥐어주지 않는 나를 알면서도, 내 검지와 중지에 손가락 하나 겨우 걸고 귀끝을 붉히는 아이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가슴 한켠이 쿵, 내려앉았다.

노래하는 이가 바뀌었다. 내가 잠자코 있으니 루베르 또한 꿈쩍도 않았다. 내가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돌아보지 않는 아해의 머리 위에 빛가루가 소복히 얹혔다.

여전히 귓가에 얹히는 음률이 달았다. 손아귀 안쪽이 불에 데인 듯 뜨겁고 얼얼했다.

* * *

까만 밤, 등불도 켜지 않아 어둑한 방에 홀로 누웠다.

무슨 정신으로 돌아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힘들 일이 없었는데도 힘이 들었다.

여전히 손안에 말랑한 것이 잡혀 있었다. 힘주어 주무르면 주무르는 대로 푹푹 패이는 까마귀 인형의 어설픈 생김새에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인형을 가슴팍에 얹어두고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여러 차례 들었다.

굳이 기숙사 문 앞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따라와서, 오늘 참 즐거웠다 기뻤다 쑥쓰러운 얼굴로 말을 쏟아내던 말간 얼굴을 떠올렸다.

다시금 기가 막혔다. 허, 하고 뱉는 것은 웃음이 아니라 한숨이다.

아이를 어르겠다는 핑계로 손을 맞잡고 야시장을 여기저기 쏘다닌 일이 새삼 민망했다.

바로 지난 겨울방학까지도 루베르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마음 쓰지 않겠다 다짐했거늘,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정이 고파 이런 일이 생겼는가. 옆으로 돌아누워 노래하는 인형의 주둥이를 꽉 쥐어 보았다.

손아귀 안에서 보드랍게 뭉개어지는 죄 없는 인형을 한참 노려보다가 좁쌀같은 눈과 눈 사이를 엄지로 문대어 주었다.

새 땅에 태어나 만난 새 혈육과 새로 알게 된 아해들 모두 제게 잘 대해주었다. 불면 날아갈까 놓치면 깨어질까 애지중지하는 것을 저도 잘 알았다.

허나 그것이 어디 무인의 정이던가.

아비보다 외숙부를 더 가까이 여기는 것처럼, 다른 아이들보다 루베르를 더 아꼈다.

실력이 뛰어나고 성격이 다정하여 잘 맞는 동무라 여겼다. 나중에 크게 될 놈이다 생각하여 도움을 구하는 일도 거리낌이 없었다.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저를 보고 있는지 생각지도 못하고.

“⋯하.”

오늘 있던 일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그득 들어차 나갈 줄을 몰랐다.

긴 꼬챙이에 꿰어 둔 고기를 나누어 먹을 적에 유독 망설였던 흰 낯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얼음 하나 입에 물고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안달이 나 동동거리던 모습을 그저 귀엽다 여겼다.

저 닮았다는 인형을 내 품에 안기고, 제 곰인형에 내 이름자를 따다 이름을 붙여 노는 것을 보면서도 이상한 줄을 몰랐다.

잘 생각해보면, 루베르는 늘 제게 유난스럽게 굴었다.

내가 저 이뻐하는 것을 알고 더 예쁘게 굴기 위해 애를 썼다. 책과 노트를 끌어와서 하루 종일 곁에 붙어 재잘거렸다. 저 뽐내는 대신에 머리 한 번 쓰다듬어달라 아양을 떨었다.

방학 전에 얼굴 한 번 못 봤다고 앵돌아 토라진 일도, 둘이 놀 수 없게 되었다고 울적하여 입을 꾹 다무는 것도 찬찬히 따져보면 전부 이상한 일인 것을 이제야 알았다.

뜻 없이 마차에서 내리는 아이의 손을 잡아주었을 적에,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제 손을 놓지 않는 루베르를 보고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가.

너 좋을 대로 하자 손을 잡고 걷는 동안 귓전을 따갑게 울리던 루베르의 심장 소리가 지금 이 까만 밤에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제 보였다.

루베르의 흰 뺨도 예쁘고, 고운 목소리도 예뻤다. 곱게 뻗은 눈썹을 찌푸리며 서운한 태를 내는 것도 예쁘게 보였고, 환하게 웃을 적마다 반짝이는 까만 눈도 어여쁘기만 했다.

제 앞에 놓인 일은 죄다 성실하게 해내려 노력하는 것도, 저를 볼 적마다 안달이 나 귀를 발갛게 붉히고 동동거리는 것도 예뻤다.

예쁜 것을 예뻐하지 않는 법은 두 번을 살아도 알 수가 없다.

아이가 이 몸을 마음에 담았구나. 문득 든 생각이 도로 빠져나가지 않고 뻗대어 가슴팍에 큰 자리를 차지했다. 어쩐지 목이 말랐다. 재채기가 나올 것처럼 흉통 안이 간질거렸다.

가당치 않은 소리였다. 고개를 저었다. 푹신한 침상이 물처럼 흔들거렸다.

칼립스가 발터를 볼 적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어여쁘고 귀여워도 아이가 너무 어려서, 혹여 다칠까 무서웠다. 걱정부터 들었다. 루베르가 이전에 마음에 둔 이가 없었다 하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첫정을 나 같은 놈에게 들여서 어찌 하려고.

겁이 났다.

저는 정을 들이기에 좋은 사내가 아니었다.

시어런 사람들이 그리 중히 여긴다는 사랑 이야기가 몇 번을 거듭 들어도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다.

게다가 남녀 간의 정도 아니고, 이 땅에서도 대하기 서툴다는 동성 간의 연정이라니. 황제가 되겠다는 놈이 어찌.

슬퍼할 루베르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아릿했다.

발터 오르겐, 그놈이, 무의 길을 걸어야 할 무인이 사랑 하나 잃을 것이 두렵다고 나아갈 길을 나아가지 않고 주저앉아 떼를 쓰던 일을 떠올렸다.

녀석은 한심하고 가여웠으나,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낯을 볼 적에는 조금 부럽기도 했다.

지난 생의 자신이라면 꾸짖어도 크게 꾸짖었을 일이었다. 당장 네 목과 내자의 목이 떨어질 큰일을 앞에 두고 작은 일을 쏘삭거린다 흉을 보았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엔 도무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불을 들썩여 어깨까지 덮었다. 오리 속털이 듬뿍 들어 가볍고 포근한 이불이 몸에 착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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