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43)화 (143/176)

143.

루베르가 갑자기 달아나 당혹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나서야 어찌 된 일인지 찬찬히 따져 볼 수 있었다.

아이가 서투른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민망해하며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겨우 알았다.

저와 놀기로 해 두고 다른 아이를 불렀다고 투정을 부리는 게지. 그리 생각하니 다시금 아이의 나이를 떠올리게 되었다. 어른인 체해도 그럴 수 없는 나이였다.

아이가 어물어물하며 말을 않기에, 그 어깨나 감싸 안고 아이를 어르기 위해 애를 썼다.

“선배를 빼고 놀러 가겠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빌 그놈이 눈치는 없어도 선배에게 나쁘게 대하는 것은 보지 못했으니, 함께 어울려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이지.”

“⋯응.”

“다 같은 동무들 사이에 누구를 밀어내고 누구를 더 끌어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니까요.”

“⋯알아. 아는데⋯.”

“응. 아는데?”

“⋯둘이서, 놀고 싶었나 봐. 그냥, 시험 끝나기를 오래 기다렸으니까⋯.”

우스운 말이었다. 이런 투정이 귀여워 보인다는 것이 이상하다 여기면서도, 어쩐지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아이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잠깐 웃었다.

민망한 것인지 놀란 것인지, 바짝 굳은 어깨에서 좋은 향내가 났다.

아이는 아무 말 못하다가, 겨우겨우 또 목소리를 냈다. 쥐어짜내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 에른하르트 영식에게 떼를 쓰고 있다는 건 아는데⋯.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어⋯.”

“그래요.”

“⋯.”

동무에게 하기에는 지나친 행동이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저도 문제가 있었다. 루베르에게 마음과 곁을 많이 내어 준 것이 남들 보기에도 티가 많이 났다.

아이란 저 이뻐하는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채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에 묵묵히 아해를 어르기만 했다. 얌전히 숨소리만 내던 아해가 어깨의 힘을 빼고 제게 기대려 굴기에, 순순히 품을 벌려 꼭 안아 주었다.

곱게 정성 들여 갈아낸 먹물처럼 까만 머리칼이 간질간질하게 뺨에 닿았다.

덜 자란 어깨와 등허리를 다독여 주었더니, 간지럽다 웅크리기에 루베르를 놓아주었다.

대신 손을 잡아달라 졸라서 손을 내어 주었다.

문득 뱃속이 간지러웠다.

이 시어런에서는 사내끼리도 연정을 나눈다지. 그 생각이 들자마자 찬 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깨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 어리고 고운 것을 두고 무슨 삿된 생각을 하는 것인지.

서둘러 마음을 털어냈다.

“⋯일단, 시험을 치르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응. ⋯미안해. 나 때문에 밥도 못 먹고⋯.”

“기껏해야 한두 시간 늦어지는 정도입니다. 시험이 끝나고 바로⋯.”

망설임은 잠깐이다. 루베르가 이렇게 서러워하는데 굳이 다른 아이들도 데리고 나가자 이야기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아이가 여전히 꼭 쥔 내 손을 흘깃 보았다.

“야시장에 가서 군것질이라도 하면 되겠지요. 선배와 저, 둘이서.”

루베르는 대답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발갛게 물든 뺨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난처한 마음을 누르며 시험 문제로 나올 법한 것들 몇 가지를 물었더니, 루베르가 냉큼 이런저런 해설을 덧붙여 설명을 해 주었다.

아이가 말해 준 것이 그대로 문제로 나와 쉽게 풀었다.

* * *

새로 태어난 뒤로 배를 곯는 일이 없었기 때문일까, 유난히 속이 헛헛했다.

내가 이런데 루베르는 어떨까 걱정이 되어, 시험장을 나서자마자 교복 차림의 아해를 끌어다 마차에 탔다.

야시장이 여는 날에는 놀러 나가는 아이들이 많아 아카데미 문 앞을 기웃거리는 마부가 많았다. 기다릴 필요가 없어 좋았다.

무엇을 먹고 싶으냐 물었더니 바로 저 아는 음식점을 여럿 늘어 놓으며 여기도 가자, 저기도 가자 하고 상기된 표정을 하는 루베르가 귀여워 다시 웃었다.

서운했던 것은 이제 다 풀린 모양이지. 참 다행인 일이다.

“⋯어, 어어. 왜, 웃어?”

“아뇨, 그냥. 한 곳만 고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른하르트 영식은 어디가 좋아?”

“제가 먹을 것은 가리지 않아서⋯. 새로운 것을 맛보고 싶기는 합니다.”

“그럼 오웬식 식사를 하러 가자. 야채도 많고 건강한 느낌이래.”

“그럽시다.”

이제 익숙해진 대로변에 마차가 섰다.

나는 마차에서 훌쩍 내려 루베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차를 탈 적마다 미하엘과 아스델을 챙기던 것이 버릇이 들었다.

야영 수업 동무들도 먼저 마차에서 내린 아해가 다른 아해를 돕는 것을 당연시 여겼기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않았다.

그러나 그 중 누구도 한 번 잡은 손을 다시 놓지 않으려 꼭 쥐는 일은 없었다.

나는 당황하여 루베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이가 주춤 망설이다가 입을 열어 조용조용 이유를 읊었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실수로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저를요? 선배가?”

“응. 기껏 나왔으니까, 식당까지만 이러고 가자.”

의아한 일이었다. 루베르와 나는 일류 무인이었다. 실수로 루베르를 놓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 틈에서 그를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나였다. 루베르 역시 그럴 터였다. 누굴 어떻게 잃어버린다는 소리인가.

아이가 부리는 응석을 제때 거절하지 못하여 손을 잡고 거닐었다.

어깨가 부딪힐 만큼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라, 더욱 기묘했다. 빠르게 뛰는 루베르의 심장소리를 귀로 듣고, 루베르의 벌겋게 익은 목덜미를 눈으로 훑었다.

맞잡은 손이 습하여 더웠다. 손에 힘을 빼자 아이가 내 손을 고쳐 쥐었다.

루베르는 잘 자란 남아였다.

둘이서 있을 적이야 어여쁘다 귀엽다 쓰다듬고 어르고 해도 터부시할 일이 아니었다. 아이 취급을 받는 루베르가 워낙 좋아하니 그러려니 싶어 별 생각을 않았다.

하지만 사람 많은 길거리를 손 꼭 쥐고 걷는 이들 대부분이 단비와 그의 연인처럼 애틋해 보이는 것이 문제였다. 이 거리를 이 아이와 이런 식으로 걷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아이의 뒤통수만 멀거니 보며 따라 걸었다.

그래도 음식점에 도착해서는 손을 놓아 다행이었다.

식당의 기둥마다 나무로 조각하여 세워놓고 밝은색으로 칠을 하여 장식해 둔 것이 눈에 띄었다.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시어런의 문화와 달라 잠시 놀랐으나, 정작 상판 아래에 다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네모낳게 우물처럼 파 둔 것을 알고 혀를 내둘렀다.

방석을 깔고 움푹한 바닥에 다리를 넣으니 좀 딱딱한 의자에 앉은 것과 같았다. 상 위에 가득히 나오는 음식들이 정갈하게 각 사람의 몫만큼 놓여져 있었다.

곱게 빚은 떡 위에 꽃을 얹어 눌러 지진 것도 있었고, 여러 종류의 채소와 고기를 같은 모양으로 일정하게 썰어 새큼한 소스를 끼얹은 것도 있었다.

그 찬이 서른 가지가 넘는 것을 보니 황제의 식탁이 부럽지 않겠다 싶었다.

이것도 먹어 보아라, 저것도 먹어라 하고 아이를 거들기도 하고 챙김 받기도 하며 식사를 했다. 아까운 음식을 남기지 않기 위해 루베르가 먹지 않겠다 하는 향채 몇 가지를 더 먹어치웠다.

잘 먹는 아해를 보니 마음이 낙낙해져 기분이 좋았다.

시어런 사람이 계피를 유난히 좋아하는 것인지, 오웬 음식이 원래 그러한 것인지. 식사를 마치고 나서 계피로 향을 낸 단 차를 받았다.

식사한 것을 정리해 주기에 앉은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루베르와 나눌만한 이야기라 함은 대부분 아카데미의 일이었다. 나는 윌턴 로버츠에 대한 몇 가지를 물었고 답을 들었다. 루베르는 내게 발터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오르겐 선배 말이야.”

“예.”

“⋯그, 음, 잘생겼다고 생각해?”

“예?”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시어런 아해들의 얼굴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그들이 잘났는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었다.

루베르도 한창 외모에 관심을 가질 나이인가 싶어 웃으며 대꾸했다.

“잘 생기시긴 했지요. 꾸미는 것도 좋아하시는 것 같고.”

“에른하르트 영식은⋯. 긴 머리를 좋아해?”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아니, 키아드리스 영식도 그렇고 오르겐 선배도 그렇고⋯. 머리가 긴 편이니까, 혹시나 해서.”

손잡이가 없는 찻잔을 한 손으로 들어 입을 축였다.

시어런에서야 화려하고 굽이치는 머리칼을 미인의 기준으로 삼는다지만, 나는 여전히 삼단같은 길고 윤기나는 머리칼을 아름답다 여겼다.

한참 어린 것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민망하긴 했으나 내 겉 나이가 대충 혼인적령기에 이르렀으니 대답 못 할 것도 없었다.

“굳이 짧은 것과 긴 것을 댄다면⋯. 예. 긴 머리가 좋습니다.”

“그럼⋯. 나도 길러볼까? 어울릴 것 같아?”

“⋯예? 선배가 왜?”

“그냥, 아니, 그냥⋯. 뭐⋯.”

⋯어쩐지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았다. 말을 더 잇지 않았더니 루베르가 서둘러 화두를 돌렸다.

요즘 맷 니코가 수업에 집중을 못 하는 것 같더라, 고급 검술 수업을 할 때에 자꾸 다른 곳을 보더라 하는 말을 들었다.

루실라가 이번에 깨달음을 얻은 것 같더라 하는 이야기도 했다.

루베르가 제 실력이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아 걱정이 된다 하기에,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달래주었다.

마리앤의 연인인 글로틴 테너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일전에 쉐이든은 나와 비도술 수업을 한 번 같이 들은 적이 있는 올리버 컴바인과 글로틴 테너가 무척 가까운 사이라는 말을 했었다.

올리버는 컴바인 백작가의 장남으로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글로틴의 아비는 단승작위를 갖고 컴바인 백작가를 보좌하는 것에 평생을 바쳤다. 글로틴 또한 그렇게 살기 위하여 아카데미에 입학을 했다.

그러니 일반적인 경우라면 글로틴이 올리버에게 쩔쩔매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 둘의 관계는 수평적이었다. 아니, 오히려 올리버가 글로틴의 눈치를 보거나 불만을 품거나 하는 형국이었다.

내게 쏘삭거릴 정도라면 그 불만을 앞에서 정당히 입에 올릴 만도 한데, 올리버는 글로틴 앞에서는 표정을 굳힐지언정 쓴소리를 하지 않았다.

내가 이들의 관계가 어찌 이런지 궁금해 하자, 루베르는 이렇게 해설해 주었다.

“글로틴 테너 영식이 영리한 편이기도 하고⋯. 올리버 컴바인 영식이 조금 소심한 편이기도 해. 둘이 워낙 어릴 적부터 형제처럼 함께 자랐다고 하더라고. 컴바인 백작가가 크지 않은 편이라 작위에 대한 위계가 강한 편도 아니기도 할 테고.”

“둘이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냥 제 의형제에 대한 불만을 입에 올린 것이다?”

“그게 또 그렇지만은 않은 게⋯.

루베르는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뜸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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