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칼립스는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시선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내 얼굴을 살피며, 손에 쥔 것을 던지듯 내려놓고, 자신의 손끝 마디를 꾹 눌러 압박하는 모습에 시선을 둘 뿐이었다.
가늘고 긴 손마디였다. 그의 마른 어깨에서부터 내려온 불안과 초조가 손끝에 고였다. 있지도 않은 손 거스러미를 괜히 떼어내려 하기에 교수님, 하고 그를 불렀다.
그제야 칼립스가 제 손을 괴롭히는 것을 그만두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고, 칼립스가 입을 열었다. 먹먹하게 잠긴 목소리에 스민 질척한 감정이 낯설어 귀가 간지러웠다.
“헤어질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왜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칼립스 교수는 나를 내쫓고 싶어하는 듯 보였다. 그가 자신의 입술을 깨물어 괴롭히는 것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꾸도 없이 다시 생각에 잠겨있기에 고개를 돌려 시계나 흘긋 올려다보았다. 비도술 수업에 늦지 않으면 좋으련만.
칼립스 교수가 그런 나를 빤히 보더니 저 앉은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발터가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는 알겠는데, 일단 오해부터 풀도록 하죠.”
그는 제일 먼저, 발터 오르겐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를 칼립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데없이 제 자랑을 하는 것인가, 그리도 내가 아이를 빼앗아갈까 겁이 났는가 싶어 말문이 턱 막혔다.
내 표정이 괴상하긴 했던 모양이지. 그가 언성을 높였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예, 말씀하십시오.”
“⋯발터 오르겐이 사랑⋯ 때문에 멍청한 선택을 하게 된다면, 그게 전부 제 탓일 것이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책임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중의 언젠가 그와 헤어지게 되었을 때.”
그의 눈가는 건조했고, 안색은 파리했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숨기지 못하고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저와 함께 한 시간마저 후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발터는 젊고, 실력이 뛰어난 기사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남는 시간의 조금만 제게 주어도 저는 충분하고⋯. 그러면 적어도 제가 그의 후회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헤어질 생각이 없다면서요.”
“그걸 제가 정합니까?”
나는 입을 닫았다. 칼립스는 신경질적인 태도로 제 미간과 눈 앞머리를 꾹꾹 눌렀다. 나는 한 번 더 시간을 확인하고 물었다.
“칼립스 교수님께서 강제당하고 있지는 않으시단 말씀이시죠.”
“예. 에른하르트 영식의 도움도 물론, 당연히, 필요 없습니다.”
“제가 아닌 다른 이의 도움이라도?”
칼립스 교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 얼굴에 미처 숨기지 못한 깊은 피로가 묻어났다.
내심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내가 어린 탓에 저어하는 것일까 싶어 찬찬히 살펴보았다. 칼립스는 단호한 말로 내 시선을 막았다.
“제가 교수가 아니었다면 굳이 제 사랑을 영식에게 납득시킬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음.”
“에른하르트 영식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
그의 경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는 잘하면 조기 졸업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겠죠.”
“발터 선배가 먼저 유일 산맥에 가 계시면, 제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습니다.”
“⋯뭐?”
“저는 어리고, 좋은 외양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웃었다. 어린아이의 당과를 빼앗아 먹는 체하는 장난은 좋아하지 않았으나, 따로 떨어져 마음앓이 하는 것들을 붙여놓는 법은 잘 알았다.
이 생의 어미와 아비가 그러했듯, 이 녀석들도 속으로만 전전긍긍 하고 있는 꼴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비져나오는 웃음을 굳이 참지 않았다.
“저는 다음 수업이 있어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
칼립스는 한 마디도 더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아연한 시선은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기가 차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다음날 고급 검술 시간, 발터 오르겐이 내 목을 끌어안았다.
“후배님!”
“예.”
“후배님, 진짜 고마워. 아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된 거야?”
“제가 드릴 말입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검사관 말고 수도에서 할 다른 일 찾아보자던데? 괜찮은 데 알아보겠다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신이 난 발터가 예뻐 죽겠다며 나를 번쩍 들어다 뱅글뱅글 돌리기에, 진정하라 그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발터는 나를 힘 있게 꽉 끌어안았다가 내려놓아 주었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아예 시간 내자. 내가 진짜 맛있는 거 사 줄게.”
“예, 그럽시다. 다음부터는 그런 괴상한 짓 하지 마세요.”
“그럼, 그럼. 당연하지.”
“욕설도 줄이고.”
“아⋯. 아 당연하지. 어쨌든 고맙다, 미카.”
발터의 얼굴에 싱글벙글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멀거니 보고 있던 루베르가 슬쩍 옆으로 다가와 내 어깨를 툭 두드렸다.
여전히 내 얼굴에도 잔웃음이 스며 있었다. 아해가 그런 나를 말끄럼 내려다보며 아무 말 않기에 물었다.
“왜요?”
“아니, 오르겐 선배가⋯. 오르겐 선배랑 언제 이렇게 친해졌어?”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밖으로 돌릴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는 좋아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발터에게 시선을 두었다.
발터는 오늘 대련에서 처음으로 온전히 제 실력을 뽐냈다. 더 이상 실력을 숨기지 않겠다는 선언인 듯 보였다. 우습지도 않았다. 저리 좋을까. 그간 발터가 실력을 숨긴 것을 모르던 아해 몇이 깜짝 놀랐다.
저렇게 망둥어처럼 뛰어다니는 놈보다는 역시 얌전한 이놈이 낫다 싶어 루베르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선배는 계속 이렇게만 자라 주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더 귀여워서?”
“예.”
루베르가 고운 입술을 달싹거리며 어물거리다가, 그러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에 턱과 뺨을 부볐다.
보들보들한 머리칼을 쓸어 만지니 가슴 안쪽이 묵직하게 꽉 들어차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사내고 여인이고 무슨 상관이겠나. 이 땅의 법도가 그러하고, 저들끼리 이렇게나 애닳아 하는 것을.
어찌되었든 이제 저들끼리 잘 살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 * *
3월 3주차 금요일.
세드릭의 약물 제조 실습은 실습 보고서로 시험을 대체했다.
제국의 계보 쪽지 시험은 이제 충분히 익숙해진 덕분에 별 문제 없이 보냈다.
실전 비도술은 작년에 본 그대로 실기 시험을 보았고, 더글라스와 볼더는 여전히 운기조식 연습에 몰두했다.
시험다운 시험을 보는 것은 단 세 과목뿐이었다.
세계지리 시험은 서술형이었으나 루베르가 예상문제를 짚어주어 나쁘지 않게 보았다.
응급처치 기초 시험은 예상했던 것보다 쉽게 나와 괜찮은 성적을 받았다.
오늘 오후에 치러야 할 몬스터학 개론 시험만 치르면 중간고사가 끝난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들떴다.
다른 아해들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어, 금요일 시험을 마치면 무엇을 하고 놀아야 할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루베르와 식물원에 가기로 약속했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기에, 아이가 또 서운해하기 전에 그 일부터 입에 올렸다.
“선배는 언제 시간이 납니까?”
“나도 몬스터학 개론만 끝나면, 다음 주 수업은 휴강하는 게 더 많아. ⋯그런데, 하루만 놀아 줄 거야?”
“예?”
“오늘, 야시장이 열리는 날이잖아. 혹시 괜찮으면⋯.”
“와, 형님 오늘 야시장 가세요?”
힘내어 말하는 루베르의 말 틈새로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빌 브라운, 그놈이었다. 익숙하게 제 머리부터 들이대는 꼴에 웃음이 났다.
언제부터 이놈이고 저놈이고 나만 보면 머리를 들이대게 되었는지. 까끌한 정수리도 쓸어주고, 너른 어깨도 도닥여 주었다.
“그럴까 하고. 왜?”
“저 아카데미 입학해서 수도 다녀본 적이 없어서요. 같이 가도 돼요?”
“그럴까.”
근 한 달을 얌전히 말도 잘 듣고 훈련도 열심히 한 아이였다. 빌 브라운이 큼직한 어깨를 구겨가며 내 품 안에 파고드는 일에도 익숙해진 터라,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요 근래 루베르도 빌에게 잘해 주려고 하는 것이 티가 났으니 다 함께 놀면 재미있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여 대꾸한 것인데, 루베르가 얌전히 대답을 않기에 의아해졌다.
“선배?”
“아니, ⋯아니야. 나 잠깐, 그, 연무장에 뭐 좀 놓고 온 것 같아서. 금방 다녀올게.”
“예?”
중급 검술 수업에서 사용하는 검과 방패는 수업이 끝나면 놓고 나오는 것을 다 빤히 아는데, 두고 올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식사만 마치면 바로 시험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르러 가야 했다. 여유 시간이 별로 없는 것을 빤히 알아 당혹스럽기만 했다.
정말로 무엇을 놓고 온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들어 바로 뒤쫓지 않고 망설였다. 쉐이든이 빌의 어깨에 팔을 걸어 당기며 내게 턱짓했다.
“다녀 와, 미카. 시험 잘 보고.”
“⋯어어. 고맙다.”
아이들과 인사한 뒤 연무장으로 되돌아갔다. 처음에는 황당했는데, 아이의 낯이 하얗게 질리던 것이 떠올라 걱정스러웠다. 분명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무언가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반쯤 돌아가니 벤치에 홀로 앉은 루베르가 보였다. 망설이지 않고 아이를 향해 바로 걸었다.
내가 온 것을 빤히 알고 있을 아이가 바닥만 보고 고개를 들지 않는 것이 어쩐지 갑갑했다.
“두고 온 물건이 있다더니.”
“⋯아니었나 봐.”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었다. 녀석의 옆자리에 앉아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 점심시간만큼의 여유가 남아 있기에 서두르지 않았다.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어 가만가만 다독여 주었다. 루베르는 금방 양손으로 얼굴을 숨겼다.
“⋯바보 같아.”
“뭐가요.”
“그냥, ⋯내가 너무 멍청해진 기분이야.”
“저도 그렇습니다.”
“⋯에른하르트 영식은, 왜?”
“도대체 선배가 왜 이렇게 서러워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
아이의 하얀 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문득 이 꽃잎 같은 귀를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으나 서운해하는 아이를 두고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은 알았다. 꾹 참고 그 등이나 가만가만 다독여 주었다.
새근대는 숨을 삼키며 잠자코 있는 까만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왜 도망친 겁니까?”
“⋯도망이 아니라.”
“선배.”
“⋯.”
아이가 필사적으로 제 얼굴을 가리는 모습을 보다가,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쩐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