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41)화 (141/176)

141.

“화해했다면서요.”

그 말이 제일 먼저 나왔다. 그래, 얼마 전에 발터는 아주 뻔뻔한 낯으로 이미 화해했다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아해를 힐난하듯 바라보았다.

발터의 어깨 아래로 떨어져 내린 긴 머리칼이 때에 맞지 않게 번쩍이며 고운 금빛을 흩뿌리는 것이 더욱 얼척 없었다.

우물쭈물하던 아이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주스잔에 시선을 두고 대답했다. 멀쩡한 사내의 옷깃을 튿어내던 힘은 어디로 갔는지, 목소리에 기운이 쪽 빠져있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잘 안되기에⋯.”

“그렇다고 사람을 납치합니까?”

“⋯얼굴은, 봐야 살겠어서⋯.”

정말 미친놈인가?

이어지는 말은 쉐이든이 일러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발터가 보기에는 칼립스가 저를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고 했다. 다만 칼립스가 지나치게 이성적인 사내이기 때문에 욕심이 나도 탐을 내지 않고, 무언가를 손에 쥐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 문제란다.

그 목소리 끝이 옅게 떨리는 모습을 보니 또 부지불식간에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한숨을 쉬며 찻주전자를 기울여 내 찻잔이나 마저 채웠다.

그 모습을 보던 발터가 내가 열네 살짜리에게 어쩌구 하며 떫은 소리를 내기에, 사람을 앞에 두고 하지 못할 말은 혼자서도 하는 것이 아니다 혼을 냈더니 금방 고분고분해져서 다음 말을 했다.

“⋯형이 내 장래를 생각해서 나를 밀어내려고 하는 것쯤은, 나도 알아. 아는데, 왜 내가 굳이 황궁에 들어가야 해? 그래, 황궁기사단은 멋지고, 돈도 많이 벌고, 은퇴 이후에 보조금이 꾸준히 나오기는 하는데⋯. 알아, 아는데.”

“⋯.”

“⋯형이랑 자주 못 본다고. 업무시간도 일정하지 않고, 특수임무 중에는 외출도 어렵단 말이야. 난 그냥 여기에서 최대한 뻗대다가 귀족 연감 부서 검사관으로 자원하고 싶어.”

내가 검사관이라는 직업을 잘 몰라 설명을 구했더니, 발터는 나름대로 열심히 알아본 것이라며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귀족 연감 관리 부서에는 직접 사람을 추적하는 윌턴 로버츠와 같은 이도 있지만, 이미 벌어진 사건에서 시신을 관찰하여 사고 흔적을 발견하는 부서도 따로 있다고 했다.

박봉에 시신을 보는 일이 많아 더러운 일이란 인식이 있어 늘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에, 시어런 아카데미 검술부 졸업생 정도라면 곧장 얻을 수 있는 일자리라는 설명이 줄줄이 이어졌다.

칼립스 교수 휘하로 들어가면 매양 붙어있을 수 있을 것이고 아카데미와 관련된 일을 주로 맡을 것이니 자신이 있단다.

“난⋯. 솔직히 형도 좋아해 줄 줄 알았거든. 좀 더 오래 같이, 평생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뭐든 좋으니까. 그런데 절대 안 된다고, 검사관으로 자원하면 헤어지겠다는 거야.”

“⋯.”

“난 형이랑 조금도 떨어져서 살 자신이 없는데도.”

철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을까.

탄식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러 가렸다. 모과차의 달달하고 향긋한 내음이 나를 도와주었다.

아이의 눈이 달을 담아 일렁거렸다.

“나는, ⋯형이 자꾸 쉽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게, 솔직히⋯힘들어. 지금도 이런데 일 년에 한 달 겨우 보게 되면 금방 날 끊어낼 것 같거든. 불안해서 못 견딜 것 같아.”

“⋯그래서요.”

“검사관 자원 서류를 재작년부터 제출했는데, 중간에서 형이 다 가로채서 없애버렸다는 걸 알았어. 졸업하면 당장 유일 산맥으로 끌려가게 생겼어서,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졸업유예 신청을 했는데.”

“⋯.”

“그때부터 형이 내 얼굴을 안 보고 피해 다니는 거야.”

“그럼 저번 그날은.”

“아카데미 내에서 형이 오가는 길이야 다 알지. 방학 도중에는 몰라도,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붙잡을 수 있었고⋯. 그날 형이 정말 예쁘게 굴어서, 화해한 줄 알았어.”

예쁘게 굴었다는 사람의 목을 그 지경으로 뜯어놓았나?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뒤로 다시 갑자기 피해 다니고, 사람들 많은 곳에서만 다니고 해서⋯ 돌겠더라고. 그래서, 안 되겠다 하고⋯.”

“납치를 한 것이 오늘입니까?”

“⋯응.”

마음속으로 참을 인을 세 번 그렸다.

“복면은 대체 왜 쓴 겁니까? 그 괴상한 자루는 또 무엇이고.”

“⋯형이 그래도 교수니까, 정체를 들키면 곤란할 것 같아서⋯.”

“그걸 아는 사람이 이런 짓을 합니까!”

탁자를 내려치는 서슬에 고기 파이가 한 번 펄떡 뛰었다. 발터가 당황하여 낯을 붉혔다. 나는 분을 참아내지 않았다. 이 아해가 어떤 마음으로 일을 벌였는지는 알겠으나,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잘못한 것을 알아야지! 어찌 당당히 고개를 처들고, 하늘 부끄러운 줄 모르고!”

“아, 아니.”

“교수님이 선배를 피하시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선배는 무인이고, 교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매양 이렇게 힘으로 강제하고 떼를 쓰면 그것을 어찌 정인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후배님, 그게.”

“어찌 인두겁을 쓰고 매양 욕설을 하고 붙잡고, 목은 또 왜 그렇게 물어뜯습니까? 교수님이 제대로 걷지도 못, 읍.”

당황하던 발터가 제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피하지 못할 속도였다. 이놈이 절정 고수이긴 한 모양이지.

그 손목을 잡아 밀어내니 또 순순히 떨어지기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속이 타 발터의 음료를 가로채 단숨에 마셨다. 얼음 동동 뜬 음료를 마시고 나니 속이 좀 시원했다.

아이를 붙잡고 꾸짖는 일이 내 몫의 일은 아닐 터였다. 이 아이의 말을 들었으니 이제 어른 쪽의 생각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못마땅해 쯧쯔 혀를 찼더니, 발터의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여간 지금은 학생이 나다닐 시간이 아닌 것은 분명하니, 돌아갑시다.”

“⋯응.”

“다시는 이런 일이 없으셔야 할 겁니다.”

“⋯어어⋯. ”

먹은 값을 치르는 발터를 두고 혹시 방값은 어찌 된 것이냐 물었더니, 날을 잡고 일을 치를 생각이었어서 미리 방값을 지불해 두었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 대경하여 다시 한번 꾸짖었더니, 다신 그러지 않겠다 절절매기에 풀어주었다.

그리하여 다음날.

수업을 유독 빨리 마친 칼립스가 면담을 핑계로 나를 불렀다.

수업시간을 헐어내는 것은 다른 학생들에게 미안한 일이었으나, 그도 나도 서로 민망한 일은 빨리 털어내는 것이 좋겠다 싶어 순순히 따랐다.

칼립스의 교수실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과연 그의 성정에 걸맞게 서책과 지도, 서류가 빼곡히 놓여있는 곳이었다.

종이 냄새가 물씬 나는 그 공간에서, 칼립스와 나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한참을 아무 말 않던 칼립스가 간신히 쥐어짜내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들었습니까?”

“발터 오르겐 선배와 헤어지신 것이 맞습니까?”

“뭐?”

늘 건조하던 칼립스의 눈이 그리 사납게 뜨인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오르겐 선배를 완전히 떼어두고 싶으신 것이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에른하르트 영식.”

“만약 그렇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무어라 말하려던 교수의 입이 아교를 바른 양 딱 닫혔다. 그가 아무리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하더라도 교수이고 어른이었다. 발터를 대하듯 대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 한숨을 쉬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는 정자세로 앉아 바른 시선으로 칼립스 교수를 보았다.

교수는 몇 번 입을 열었다 닫더니,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반문하는 목소리에 평소보다 까끌함이 짙게 묻어나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든. 지금 하시는 방법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칼립스 교수의 손끝이 부질없이 서류 사이를 헤맸다. 나는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른 이의 연정 싸움에 끼어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어떠한 갈등 상황의 조율자로 선 일은 많았다. 대개 재산이나 땅에 대한 다툼이었으나, 그것과 이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 여겼다.

“발터 선배가 어제처럼 해괴한 짓을 벌일 만큼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 전혀 모르는 제 눈에도 선히 보입니다. 허나 또, 교수님께서 그럴 적마다 받아주셨으니 저 뻗을 자리를 알고 발을 뻗었겠다 하는 생각도 듭니다.”

“⋯.”

“제가 아는 발터 오르겐은 그렇게 경우 없는 사내가 아닙니다. 삐뚠 마음을 먹고 그릇된 행동을 하는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인이라고?”

“예.”

지난밤 한참을 고민하여 낸 결론이었다.

“받아 줄 것이라면 선배가 불안해하는 것을 안심시키는 일이 우선일 것이고, 받지 않을 것이라면 그의 무력에 굴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교수님께서 민망하여 사람을 쓰기 어려워하시는 것이라면 제가 돕겠습니다.”

“⋯에른하르트 영식이 왜 그렇게까지 합니까?”

“교수님께 도움이 필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그의 안색이 불긋했다. 나는 그 목덜미의 화인이 옅어진 것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교수님께서 그를 받아주고 싶어 받아 준 것인지, 그의 무력에 굴복한 것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전자라면?”

“괜한 아이를 괴롭히시는 일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말씀드릴 생각입니다.”

“괴롭힌다?”

나는 눈을 바로 떴다.

“아닙니까? 헤어질 마음이 없으면서도 그 마음을 고삐 삼아 협박을 자행하는 일이, 괴롭히는 일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안 그래도 연정에 들떠 인내가 짧은 아이를 쥐고 흔드는 일이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에른하르트 영식.”

“제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 여기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허나, 저 또한 발터 오르겐 선배를 가까이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우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진 못하겠습니다.”

칼립스 교수의 낯이 노하여 희게 질렸다.

저런 눈을 하니 발터가 그리 당당하게, 이래도 괜찮을 것이다 생각하고 괴상한 짓을 벌인 것이 아닌가 싶었다. 책상 위에 얹힌 서류를 빠드득 구겨 손에 쥔 칼립스가 금방이라도 숨이 꼴딱 넘어갈 것 같은 얼굴로 시퍼렇게 귀기 어린 눈을 했다.

저 치가 나를 두고 투기를 하는 것인가.

우습지도 않은 일이었다. 허나 오해를 정정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의 노한 시선에 굴할 내가 아니었다.

“모든 맺고 끊는 일은 명확해야 오해가 없습니다, 교수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