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시어런 수도의 건물들은 대개 삼층 높이 건물이었다.
괴인은 지붕 위로 달렸다. 누군가 자신을 쫓을 것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은밀하고 당당히 사람을 훔쳐오는 것에 성공했으면 저런 모습일까 싶었다.
검은 가면을 쓴 괴인의 어깨에 실린 사람은 큰 반항을 하지 않았다. 머리 위에 자루가 씌워진 채였다. 양손이 등 뒤로 묶여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카데미 내에서 이런 납치를 당할만한 인물을 알 수가 없었다.
황자 신분인 루베르? 그러나 체격이 달라 의심을 거두었다.
만약 그 아이가 납치당했다면 이처럼 마음이 고요하긴 힘들었을 터였다.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가, 곧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얼른 털어냈다.
나는 지붕 아래 길을 달렸다.
희고 붉은 두 개의 달이 혼란스러운 그림자를 빚었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민가에서 도란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은밀하게 뒤따를 작정으로 윌턴 로버츠에게 배운대로 달렸다. 중간중간 숨이 차서 입을 틀어막고 호흡을 골라야 했다.
간간이 괴인은 첨탑처럼 곧게 서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럴 적마다 벽에 가까이 붙어 그림자 뒤에 몸을 숨겨 들키지 않았다.
다섯 개의 거리를 지났다. 몸이 차게 식었다.
너무 멀리 나온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하는 마음이 들 무렵, 괴인이 다른 것들보다 불쑥 솟은 어느 건물의 창문을 열고 불쑥 그 안으로 들어섰다.
혹시나 수상한 이가 잔뜩 모여 있는 소굴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취객 하나가 건물을 나서며 노랫소리를 흥얼거렸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평범한 여관이었다. 나는 잠시 그 앞에 멀거니 서 있었다.
이 어린 몸을 하고 이 시각에 여관 정문으로 들어서는 아둔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손을 뻗어 벽을 짚었다.
건물의 외곽을 타고 오르는 것은 이 땅에 와서는 처음이었으나, 팔과 다리의 근력이 충분하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거리를 두고 따라갈 적에야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으나, 괴인과 가까워질수록 혹여 들켜 큰 싸움이 날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여관의 지붕까지 기어 올라가 그 기둥에 발을 걸었다. 밑에서 위로 올라오는 것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시선이 더 은밀히 상황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반틈 열린 창문 안쪽으로 내가 쫓던 인영이 보였다.
침대 위에 던져진 납치된 자가 꾸물꾸물 일어나 앉으려 하는 모양새를 보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가면의 괴인이 그 어깨를 밀어 다시 납치된 이를 눕혔다.
거친 손길이기는 했으나 사람의 몸이 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면식범인가? 숨을 죽여 살피는 동안 그 둘은 아무런 말을 않았다. 그저 의아해하던 때였다.
가면을 쓴 무인이 자루에 입술을 바짝 대고 무언가 속삭였다. 잡혀 온 이가 크게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하였다.
가면을 쓴 이가 으르릉 목 안쪽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소리를 냈다. 그 손이 납치당한 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가, 단추를 튿어내려 했다. 그순간에 나는 괴인의 정체를 알았다.
망설이지 않고 창을 열어 그 안으로 들어섰다. 빼든 검을 오른손에 단단히 감아쥔 채였다.
“그만하세요, 선배. 이 무슨 무도한 짓입니까?”
발터 오르겐, 그 소년이었다.
시꺼먼 가면 탓에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 오른팔과 왼팔을 쓰는 방식이 다른 것을 보고 알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인도 있다는 놈이 웬 놈을 납치해다가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납치당한 이의 몸 위에 올라타 있던 발터가 멀거니 이쪽을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괴인의 아래에서 몸부림치던 이의 동작이 딱 굳었다.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 겁을 먹은 모양이라고 생각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시발, 아. 야, 그게 아니라.”
“지금 비키지 않으시면 베겠습니다. 아그리젠트 교수님께서는 선배가 이런 인물인 것을 아십니까? 그리 절절하게 연모한다 하시더니.”
“후배님. 그게.”
발터 오르겐이 절정의 고수라고는 하지만, 실전에서 나를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이 있었다.
시어런에서 첫 살인을 할 각오를 하고 나온 나였다. 아는 아해를 만나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을 내리지 않았다.
양손을 어깨 위로 들어올려 항복 자세를 한 발터가 주춤주춤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를 경계하며 침대로 한 발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 아이가 막으려 하기에 검으로 그 목을 겨누었다.
발터는 양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가, 이를 갈았다가, 욕설을 짓씹더니 까만 가면을 벗었다. 익숙한 태도로 제 묶인 머리를 풀어 손빗으로 쓸어내렸다.
그 서슬 퍼런 기세를 마주한 나는 납치당한 이의 어깨를 가만히 잡아, 내 뒤로 물렸다.
숨소리도 죽인 채 꼼짝 않는 이는 사내였다. 아무리 발터가 남색을 한다 해도 아무 놈이나 납치해다가 그런 짓을 할 파렴치한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숨소리 없이 조용한 이의 손목을 먼저 풀어주었다.
“후배님. 잠깐 내 말 좀 먼저 들어주지 않을래?”
“들을 생각 없습니다.”
“지금 그 사람에게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약이라도 쓴 겁니까?”
“아니, 아니, 아니 시발⋯나도 지금 내가 못 믿을 꼴이란 건 아는데.”
도대체 누굴 데리고 왔기에 이렇게 전전긍긍하는가.
의아해진 내가 얼굴에 씌인 것을 벗겨내려 포대의 매듭을 쥐었을 때였다. 그간 얌전히 있던 이가 내 손목을 턱 잡았다.
“걱정 마십시오. 도와드리려 하는 일입니다.”
사내는 내 손목을 쥔 손에 힘을 빼지 않았다. 그러나 그 힘이라는 것이 미약하여 무인이 아닌 것이 빤히 보이는 터라, 더욱 마음이 쓰이고 걱정이 되었다.
“⋯괜찮습니다. 저 사람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사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다 달랠수록 더욱 애타게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 사내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바라보던 중에 알고 싶지 않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마.
나는 발터를 보았다. 머리에 자루를 쓴 사내를 다시 보았다. 또 발터를 보았다.
그리고⋯ 머리에 자루를 쓴 사내를 보았다.
찬찬히 보니 골격이 익숙했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칼립스⋯ 교수님?”
머리에 자루를 쓴 사내, 칼립스 교수는 뼈마디가 얇은 손으로 자루 위를 덮어 가렸다.
마른 어깨가 옹송그린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얼이 빠졌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빠진 것을 애써 다잡는데, 발터가 달칵 제가 들고 있던 가면을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 희고 고운 낯짝이 이마부터 목덜미까지 시뻘갰다.
“⋯일단, 검부터 집어넣자, 후배님.”
“⋯.”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이 무슨 해괴한 놀음이란 말인가.
나는 우물쭈물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어쩐지 이미 훌쩍 지난 점심시간의 그 날이 떠올랐다. 그만들 하시라고 그 틈새로 뛰어들 것을 그랬다. 그편이 지금보다 덜 부끄럽고 덜 민망하였을 것이다.
내가 지금 연인의 잠자리를 방해하러 이 밤에 여기까지 쫓아 왔다는 말인가?
“⋯둘 다, 아카데미로 돌아가세요.”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묵묵히 서서 버티고 있는데, 자루 안에서 칼칼한 목소리가 들렸다. 빼도 박도 못하게 분명히, 칼립스 아그리젠트의 목소리였다.
창문 밖에서 한 번이라도 이 목소리를 들었다면 곧장 처들어오는 대신에 두 번은 더 고민할 수 있었을 것을.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렇지만.”
“전 여기에서 쉬다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침대 머리맡에 꾸물꾸물 등을 기대는 칼립스를 멍하니 보았다.
그 머리에서 아직도 자루를 벗지 않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발터가 내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폭 가리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라 생각하기에는, 저 자루가 너무나도 꼴사나웠다.
“⋯설마, 합의된⋯것입니까?”
“미쳤습니까?”
칼립스의 날카로운 대답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발터가 내 손목을 움켜쥐고 끌어내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방 안에 세 사람이 있는데, 셋 모두가 들어올 적에는 창문으로 들어오고 나갈 때에는 문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 수상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하기야 지금 걱정할 일은 그것만이 아니다.
한참을 사람 말을 하지 못하고 으어, 아으, 괴상한 소리를 내던 발터가 물었다.
“왜 따라왔어?”
“흉악한 놈이 사람을 들고 야밤에 달아나기에.”
“⋯그렇지⋯내가 그랬지⋯. 왜 하필 그걸 네가 봤을까⋯.”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아이가 생각하기에도 내 잘못이 없는 것이 분명해 보였던지,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1층으로 내려왔다. 그러는 동안 발터는 내 손목을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내가 달아날 것처럼 보였을까. 그럴 기운도 없었다. 잡힌 손목을 털어내니 아이가 서먹하게 내 손목을 놓았다.
이제 발터가 사근사근하고 싹싹한 아이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 갓 스물 넘은 놈이 연인을 납치해다 침상에 내팽개친 것부터가 짐승도 하지 않을 짓이라 여겼다.
“지금 들어가도 잠 못 잘 거 알아.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그럽시다.”
여관 일층에는 흔히 그렇듯 음식점이 있었다. 두런두런 몇몇이 모여 웃기도 하고 늦은 밤 야식을 챙기는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 검은 가면을 두고 온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자꾸만 아득해지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서늘하게 식은 손으로 내 눈가를 한 번 쓸었다.
멀리 가지 않고 빈 탁자에 의자를 끌어 앉았다. 곧 종업원이 쪼르르 와 주문을 받았다. 발터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종업원에게 물었다.
“여기 애한테 먹일만한 것도 있어요?”
“과일주스는 오렌지밖에 없어요. 고기 파이는 어떠세요?”
“따뜻한 걸로.”
“으음, 따뜻한⋯모과차? 모과차 괜찮아요?”
나를 돌아보는 종업원도 발터 또래의 젊은이였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이 친구는 모과차 주시고, 저는 맥주 한 잔 주세요.”
“아뇨, 모과차랑 오렌지주스 주십시오.”
“어?”
“지금 선배가 술 마실 때입니까?”
“⋯미안. 그, 그렇게 주세요.”
“네에.”
종업원은 웃는 얼굴로 물러났다. 곱게 응대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절로 꾸짖는 소리가 나왔으나 마땅한 일이었다.
나와 발터 모두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곧 음료와 음식이 나왔다.
김이 폴폴 나는 고기 파이는 그 모양이 그럴 듯 했으나 손이 가지 않았다. 입맛이 없었다.
달큰한 차로 입을 축이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발터의 큼직한 손에 갇힌 오렌지주스 잔이 덜덜 떨었다.
그 꼴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는 모과차를 단숨에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