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쉐이든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마리앤? 마리앤이 왜?”
쉐이든은 내가 무언가를 물었을 적에, 쉬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이더라도 잠시간 고민을 한 뒤에 입을 여는 버릇이 있었다. 정말로 몰라 묻는 것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았다. 잠시 시선을 피하던 쉐이든이 어깨를 치켜세웠다가 툭 아래로 내렸다.
“⋯어디까지 들었어?”
“조금도. 그저 내가 이번 학기에 그 아이와 주에 두 번 수업을 같이 듣지 않아.”
“그렇지.”
“글로틴 자랑을 덜 하더라. 공부만 열심히 하려고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어때서?”
“원래 안 그랬잖느냐.”
“그건, ⋯그렇지.”
“⋯.”
“⋯.”
쉐이든이 곤란하다는 양 제 머리를 헤집었다.
이전에는 그러지 않던 녀석이, 나와 함께 다니고 나서 어느 순간부터 이마에서 앞머리를 잡아다 정수리 어림에서 가벼이 흔드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머리를 정돈할 적에 하는 버릇과 똑 닮았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려니 아이가 허, 웃더니 바른 눈을 하고 나를 보았다.
“사실, 발터 선배 이야기는 나랑 가까운 사람 이야기가 아니니까 쉽게 했거든. 발터 오르겐은 내 주변인이 아니라 네 주변인이고, 내가 아니라 네가 알아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어.”
“그래.”
“그런데 마리앤은 나랑도 친하잖아. 마리앤이 직접 네게 얘기해 주지 않은 것을, 내가 이야기 해주고 싶지는 않아.”
나는 잠깐 놀랐고, 깊게 이해했다. 과연 현명한 아이였다.
내가 사람 상대하는 것에 서투르다보니 쉐이든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처음 입학해서부터 지금까지, 나의 인간관계는 대부분 쉐이든의 조언과 인도 아래에 이루어졌다. 연금술을 같이 배우는 동무들 모두가 쉐이든과도 친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쉐이든이 옳았다. 나는 차분히 대답하려 노력했다.
“네 말이 맞다. 내가 실수할 뻔했어.”
“그래, 이해해 줘서 고마워. 어쨌든 걔도 알아서 잘할 거야. 워낙 똑똑한 애잖아.”
“그렇지.”
“만약 갑자기 마리앤이 감옥에 가게 되면 면회나 같이 가자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내려놓는 찻잔이 달각 소리를 냈다.
“⋯뭐? 아니, 역시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다.”
“비밀이라니까 그러네.”
낄낄 웃는 모습을 보고 장난인 것을 알았지만 안심이 되지 않아 몇 번을 더 물었다.
만약 내가 알아야 할 일이 생긴다면 꼭 말해주겠다 하기에 웃었다. 몇 마디 더 농담을 건넨 쉐이든이 이제 들어가 자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잘 자, 미카. 좋은 꿈 꿔.”
“고맙다.”
“어? 뭐가?”
“그냥.”
아이가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그 손이 친근하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눈높이가 알맞게 가까웠다. 그 여우같은 얼굴에 화사하게 꽃이 피어 있었다.
“친구잖아.”
좋은 말이었다.
잠자리에 누워 동무들의 얼굴을 헤아려보았다.
시어런에 와서 벗으로 사귀게 된 작달막한 아이들 너머로, 훌쩍 키가 크고 나이 든 동무들의 면면이 유난히 선명히 떠올랐다. 편안히 잠에 들었다.
* * *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았다. 눈 한 번 깜빡이니 훌쩍 날이 지났다.
언제 꼭 말해야지, 언제 한번 시간을 꼭 내야지. 그렇게 각오하고 다짐한 것과 달리 나는 2월이 홀딱 지나고 3월이 오기까지 칼립스 교수와 독대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연금술 수업은 나뿐만 아니라 동무들의 성적도 한데 묶여 있는 것이니 당연히 성의를 다 해야 했다.
세계지리는 본격적으로 지형지물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몬스터학 개론에서는 몬스터의 이름과 특징뿐만 아니라 그 내장기관까지 싹 다 외워야만 했다. 필기시험에 약한 내겐 그보다 힘든 것이 없었다.
비도술 수업을 마치면 로버츠와 둘이 은밀히 걷는 법과 몸을 숨기는 법을 익혔다.
윌턴 로버츠는 눈썰미가 무척 뛰어나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는 일을 무척 잘했는데, 호흡법과 보법을 곁눈질로만 곧장 배워 개선안을 턱턱 내어놓는 것이 무척 대단했다.
윌턴 로버츠와 함께하면서부터 나는 시어런에도 보법과 흡사한 걷는 법이 두 가지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첫째는 내공을 혈도로 돌려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러로 몸을 가볍게 띄우는 방식이었다.
마나와 오러로 얽은 거인의 팔로 내 몸을 냅다 집어던지는 것처럼, 단번에 먼 거리를 폭발적으로 이동하는 방법이었다.
멀리 있는 거대한 몬스터를 향해 덤비거나 몸을 피하는 데에는 그만한 것이 없었다.
둘째는 그림자 속으로 녹아드는 것이었다.
윌턴이 잘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윌턴 로버츠는 어둠과 어둠 사이로 숨죽여 파고들어, 그 자리에 분명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법을 알려주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섬세하게 지적하여 고칠 점을 해설해주는 윌턴 로버츠가 있어 어찌어찌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다.
주말 또한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새벽 훈련을 하고 도서관에 가면 루베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노닥거리기만 하는 것이면 일찍이 자리를 파할 수 있었으련만. 제 필기도 보여주고, 맛있는 것도 가져오고, 대련도 하고 하는 식으로 함께 하는 공부에 열의를 보이는 루베르를 혼자 두고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런 아이를 두고 교수를 만나러 간다 했을 때에, 아이가 무엇을 하러 가느냐 날 붙잡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칼립스 교수에게 네 정인에게 맞고 살지 않느냐 물어보러 간다고? 끔찍한 소리였다.
3월 첫 주 화요일, 레이 깁슨의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듣는 것에도 익숙해진 즈음이었다.
오늘은 시험 범위를 먼저 들을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대롱을 하나씩 받았다. 그저 의아했다.
이리저리 굴려 살펴보니 강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대를 꺾은 것이었다. 도대체 이것으로 무엇을 하려나 싶었는데, 근로 장학생 다섯이 교실 앞에 큼지막한 유리 수조 하나를 끌고 들어왔다. 어처구니가 없어 넋이 빠졌다.
동시에 여덟 명은 들어갈 수 있을 법한 크기의 수조를 곁에 둔 레이 깁슨이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코가 예민한 맹수를 만났을 때, 상대할 힘이 다했을 때, 물속으로 들어가면 체취를 지울 수 있다. 그러니 오늘은, 대롱을 입에 물고 물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연습한다!”
이런 것을 배워 수적이라도 되라는 말인가?
하지만 교수가 시키면 진흙 바닥이라도 기어야 하는 것이 학생의 본분인지라, 나는 다른 아해들과 함께 시키는 대로 줄을 서서 수조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오래 참는 학생에게 중간고사 추가 점수를 준다고 하여 거절할 수 없었다.
나야 무예에 능하고 호흡을 고르는 것을 잘 하여 물속에서도 오래 앉아 버틸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아해들은 그렇지 못했다.
사방에서 물 위에 동동 떠서 수면 위에 등이 보이거나, 물이 무서워 머뭇대다 코로 물을 먹었다.
허우적 헤엄치는 아이의 발에 채이지 않으려, 그 어깨를 잡아 몸을 바로 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이는 감사하단 인사도 하지 못하고 수면 위로 올라갔다.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마리앤이었다.
나도 오래 참았지만, 마나를 끌어다가 제 얼굴에 얇은 막을 덮어 쓴 마리앤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 그만두었다.
내가 수조 밖으로 걸어 나올 적에 아이들 몇이 갑자기 코를 감싸쥐었다.
레이 깁슨이 좋은 기회라며 코피를 빠르게 멎게 하는 법을 가르쳤다. 시답잖은 일이라 신경 쓰지 않았다.
몸을 말리는 마법을 사용하여 아이들이 저마다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온 뒤에야, 교수는 교과서를 펼쳐 시험 범위를 알려 주었다.
“오늘까지 배운 것이 중간고사 시험 범위다. 다음 주는 휴강을 하고, 시험은 다다음주 이 시간에 바로 이 교실에서 본다! 중간고사 시험 문제는 빈칸 채우기로 하겠다.”
나누어주는 유인물을 받았다. 열한 장짜리 유인물에 지금껏 배운 것들이 단어와 단어 사이가 텅 빈 여백으로 적혀 있었다.
오늘 배운 것을 예로 들자면, ‘맹수를 피하기 위해 물속에 들어가는 이유는 빈칸 을/를 지우기 위해서이다.’ 하고 적혀 있는 식이었다.
이건 또 무언가. 눈을 가늘게 하고 보고 있으니, 레이 깁슨이 허허 웃었다.
“지금 나누어 준 것의 빈칸을 직접 채워보고 외워 오도록! 순서대로 외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이 중에서 무작위로 문제를 골라 50개를 내겠다! 전부 쉬운 것뿐이니 문제 없겠지?”
나는 유인물의 마지막장을 보았다. 총 500문제 중에 50문제를 낸다는 말이었다.
다음 학기 수업을 정할 때에는 미리 루베르에게 어떤 수업이 좋은지 꼭 따져 물어보고 수강 신청을 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방금 전까지 맑은 얼굴로 샐샐거리던 마리앤이 한숨을 폭 쉬는 모습이 우스워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수업이 끝나고 언제나처럼 마리앤을 여자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처음에는 말 많은 아이의 말을 들어주기 위해 따라 걷기 시작한 길인데,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빈칸을 다 채우면 서로 답을 맞춰보자 하기에 그러마 고개를 끄덕였다.
2학년 남자 기숙사로 돌아가던 길.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저 멀리서 더 먼 방향으로 누군가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중이었다.
그 어깨 위에 얹힌 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나는 당혹하여 인영이 달려온 방향을 보았으나, 워낙 드넓은 아카데미였다. 어느 쪽에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민은 잠시였다. 나는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어떤 이가 무슨 사정으로 이런 일을 벌이는지 모르겠지만, 야음을 틈타 사람을 납치하는 것이 좋은 일일 리 없었다.
윌턴 로버츠 교수에게 미리 은밀하게 걷고 몸을 숨기는 법을 배워 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이렇게 빠르게 필요한 일이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낯선 무인을 따라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무단 외출을 한 일로 벌점을 받게 될 일이 마음에 잠시 걸렸으나 곧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