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내 방 응접실에 루베르와 마주보고 앉았다.
아이는 방에 들어오기 직전까지도 긴장하여 숨을 가쁘게 몰아쉬더니, 차 한 잔을 온전히 마시고 쿠키를 한 입 베어 물고 나서야 진정했다.
동무의 방에 놀러가 본 적이 없는 것일까 생각하니 딱하고 귀여웠다.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으니 기다려 주는 것이 어른의 미덕일 터였다. 나도 쿠키나 축내며 한참을 앉아 기다렸다. 조용한 방에 와삭대는 소리만 잘게 울렸다.
내가 세 개째 쿠키를 삼켰을 때 루베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남자끼리의⋯혼인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예.”
“나는, 꼭⋯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이유는?”
아이는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서로 사랑을 하고 있다면, 굳이 다른 사람이⋯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렇군요.”
사랑. 도대체 그게 뭘까.
나는 소파에 깊게 몸을 묻었다. 질 좋고 푹신한 소파는 뒤로 기댄 몸을 안정적으로 떠받쳐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그 채로 아이를 보면 자연히 눈을 내리깔게 되었다.
루베르는 조금 당혹한 기색이었다.
“⋯그게 끝이야?”
“예?”
“그, ⋯에른하르트 영식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아이가 목이 타는지 차를 벌컥벌컥 들이키기에, 팔을 뻗어 그 찻잔이나 한 번 더 채워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제 일이 아니라 가까이 여겨지지 않습니다.”
“⋯네 일이 아니라서?”
“예. 그저 선배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 말도 옳다, 여겨지는 정도입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루베르는 쉐이든만큼이나 믿을 수 있는 아이였다. 동무였다. 나는 차분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정인을 가지는 것을 제 삶에서 염두에 둔 적이 없습니다. 막연히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으나, 지금은 그 생각도 옅어졌습니다.”
“⋯.”
“제가 강해지는 것이 즐겁고, 기대를 받는 것이 뿌듯합니다. 강인한 무인이 되어서 이름을 널리 떨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많이 합니다.”
“⋯.”
“그런데,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수줍고 어여쁜 아이들이 참 많이 보였지요.”
“뭐?”
“선배처럼요.”
“헉.”
루베르가 헛숨을 들이켰다.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아해가 수줍어하는 얼굴이 귀여워 손끝이 간질거렸다.
하여간 어여쁘고 순하고 얌전한 것이 마음속에 한 번 들어와서는 빠져나가지를 않았다.
나는 잠시 아이의 발그레한 뺨을 구경하다 말을 이었다.
“그들이, 저들끼리 은애한다 좋아한다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이 참 예뻐 보였습니다. 부럽기도 하고⋯. 하지만 여전히 제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왜냐면 제가⋯.”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을 축이고 말을 골랐다.
“제가 남들보다 일찍 마음이 늙은 탓입니다. 이번 생에, 제가 그렇게 태어나서.”
“⋯.”
“우연히 제가 알던 두 남성이 애끓게 연모하는 사이인 것을 알았습니다. 깜짝 놀랐지요. 제가 손 댈 일 없고, 염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도⋯혼란스러웠습니다.”
“⋯.”
“모르던 것이고, 낯선 것이라 그랬습니다. 처음 불을 본 짐승이 펄쩍 뛰는 것처럼⋯.”
“⋯.”
“하지만 어떤 새는 먹이를 잡기 위해 산불을 낸다지요. 그 불이 무엇에서 기원하는지를 알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당당한 모습을 보니, 부끄러울 일도 아니더군요.”
“⋯어떤 게?”
“성별을 따지지 않고, 사람 그 자체만을 보아 사랑하는 것이.”
루베르가 두 손으로 찻잔을 쥐고 가만히 숨을 죽였다. 나는 아이의 까만 눈을 바로 보았다. 그 눈에 반들하니 총기가 돌고 있었다.
내가 얻은 깨달음의 조각을 아이에게 나누어주고 있는 중이었다.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다시 웃었다.
“부러운 일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쿠키 그릇이 빈 것을 발견했다.
내 손이 빈 그릇을 더듬자, 루베르가 자신이 한 입 베어 물고 더 손대지 않은 쿠키를 조심스럽게 권했다.
아이가 망설인 것을 알아, 꺼리는 기색 없이 받아 베어 물었다. 먹을 것을 나누어 먹는 것은 주리던 전생에서는 익숙한 일이었다.
“여전히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있습니다.”
“⋯어떤 것이, 그런데?”
“뭐⋯. 내밀한 접촉을 남에게 보이는 것 같은. 그런 것은 여전히 부끄럽고 터부시되어야 하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만은. 그것도 그들의 사정이라는 말을 들어⋯제 생각을 고쳐야겠지요.”
루베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시 조용해졌다. 입 밖에 내어 말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시험공부를 할 적에, 입 밖으로 내어 다른 아이에게 설명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면 더 잘 되는 것과 같았다.
이야기를 하고 보니 별것 아닌 일을 가지고 크게 놀라 수선을 떤 것이 민망했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를 내었다.
“제가 도울 것이 있다면 돕고, 자리를 피할 일이 있다면 말을 얹지 않고 달아날 생각입니다. 다만 정당치 않은 어떠한 방식의 일이 있다면⋯. 그때에는 참견하고 싶어지겠지요.”
“어떠한 방식⋯?”
“지금은 저도 모릅니다. 그저 막연하여.”
“⋯.”
아이는 잠잠했다. 세 호흡 뒤에 속삭였다.
“⋯난, 이런 에른하르트 영식을 좋아해.”
“저도 선배님을 꽤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할 일이 없다고 아이를 달랬다.
아이는 얌전히 차를 비우고 이만 자러 가겠다고 말했다. 내 마음이 툭 놓인 것처럼, 아이도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지기를 바랐다.
나는 루베르를 기숙사 문 앞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렇다. 차근차근 생각하면 이해 못할 일은 없었다.
발터가 연정에 절절 끓는 어린 아해인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칼립스 아그리젠트는 누가 보아도 훌륭하고 믿음직한 어른이었다. 복잡다난한 가정사를 가진 아해가 다정한 눈길에 홀린 것은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기회를 보아 칼립스 아그리젠트 교수와 독대할 생각이었다. 어른과 아이가 만난다면 당연히 어른 쪽에서 많은 생각을 하고, 고민하여야 함이 마땅했다.
내가 아는 칼립스라면 정당한 답을 내어놓았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둘의 일에 끼어들고 싶다고 여긴 것은, 역시 그 목덜미의 상처 탓이었다.
교수의 가냘픈 목에 사납게 남은 잇자국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심란한 기분이 들었다.
나이가 많다고 늘 강하기만 하겠는가.
나는 발터와 칼립스를 함께 걱정하고 있었다.
발터가 칼립스를 무력으로 강제하고 있다면 내가 무력을 써서 도와줄 수 있을 것이었다. 그 반대로 칼립스가 발터를 가지고 놀고 있는 중이라면 그러지 말라 좋은 말로 타이를 수 있을 것이었다.
단비나 마리앤의 경우와는 크게 다르지 않은가.
동년배의, 또래와 주변의 인정을 받는 관계는 안전한 길이었다.
반면에 발터와 칼립스는 어떠한가.
나는 불안한 길에 선 그들이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사납게 구겨진 발터의 얼굴과, 내장이 끊어지는 듯 고통스럽게 으르렁거리던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았다.
내게 좋은 사람이 남에게 나쁜 사람인 일은 흔한 일이다. 사람은 늘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시어런의 사람들에게 사랑이 중하고 또 중한 일이라는 것은 알겠다만, 정인이 주는 상처마저 달게 받을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 * *
새학기 첫 주 토요일.
교복이 빠듯해질 만큼 키가 자랐기 때문에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몸의 치수를 다시 잰 일이 있었다.
부러 새 교복은 품을 넉넉하게 해 달라 요청했기 때문에, 토요일 아침에 새로 받은 교복의 셔츠가 헐렁했다.
바지 밑단은 접어 핀으로 고정하고 자켓을 걸치니, 움직이기 훨씬 수월했다. 만족하여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공부할 거리를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언제나 앉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던 루베르가 인사도 않고 빤히 보기에 왜 그러냐 물었더니, 아니다 고개를 젓는 모습이 수상했다.
어쩐지 궁금하고 의아하여 아이를 독촉해 대답을 졸랐다.
“왜 그렇게 봅니까?”
“아니, ⋯그. 교복 새로 맞췄네.”
“예.”
“잘 어울려⋯.”
“생긴 것은 선배 것과 제 것이 똑같은 것을. 괜한 소리를 하십니다.”
하지만 입 발린 말에도 쉬이 웃음이 났다. 잠깐 웃고 책을 펼쳤다.
지난주에 배운 것들을 책을 읽어 다시 한번 복습하고, 다음 주에 배울 것을 미리 읽어 예습하는 정도였다.
당장에 낯선 문장들을 모두 외우지 않더라도 이렇게 여러 번 꼼꼼히 읽고 나면 어느 순간 머릿속에 들어올 것을 알았다.
공부를 하다가 루베르와 식사를 하고, 소화를 위해 간단한 대련을 하고 공부를 하다 헤어졌다.
일요일도 같았다. 그 중간에 우연히 만난 쉐이든이 나를 걱정하는 기색이기에 까닭을 물었으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발렌티아 공작가도 2황자를 지지하고 있다 하는 이야기를 쉐이든에게 꺼내두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이 안온하고 행복하게,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며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이전 생에 이루지 못한 것을 바라고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속이 쓰렸다. 얼른 생각을 털어냈다.
힘껏 검을 내질러도 잘만 받아주는 루베르가 있어 다행이었다. 좋은 말을 아끼고 싶지 않아서, 네가 있어 다행이다 고맙다 하는 이야기를 참 오래 했다.
루베르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기나 했다. 나는 익숙하게 아이의 머리에 손을 뻗어 쓰다듬었다. 그 머릿결이 부드러워 쓰다듬을 적마다 기분이 좋았다.
심란하던 속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아이가 내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이 내 검술 덕분이라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옳은 길일 것이라 여겼다.
이 아이의 앞에 설 수 있는 이가 되고 싶은 마음이 문득 싹을 틔웠다. 가슴 한켠에서 새파란 고개를 처들고 저 여기 있다 태를 냈다.
차근차근 하자. 마엘로 샌슨의 목소리가 귓전에 남아 있었다.
그래, 내 앞에 떨어진 돌부터 하나하나 치워내고 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