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30)화 (130/176)

130.

중급 검술 시간은 아이들과 다 함께 제국검법을 다시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우고 익히는 시간이었다.

화요일 오후에 두 시간이나 레이 깁슨에게 시달린 탓에, 아직도 귀가 먹먹했다.

그나마 빌 그놈이 권력의 맛을 일찍이 알아 쉐이든과 벤자민은 그 너른 어깨로 뻥뻥 밀어도, 루베르에게는 그런 일이 좀처럼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루베르 옆에 붙어 서서 검법을 배우는 일에 집중했다.

내가 빌을 특별히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목소리가 큰 사람과 잘 맞지 않았다.

이것이 다 작은 소리도 크게 듣는 습관 탓이었다. 전생에 살아남기 위하여 매일 밤 귀를 기울이던 버릇이 남아 여즉 몸이 괴로웠다.

빌은 내가 저를 피하는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거리가 멀다 하여도 혈육은 혈육인지라 마음 쓰이는 구석이 있어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쉐이든이 네가 저런 타입이랑 상극일 것 같기는 했다며 마음을 써 빌과의 대화를 도맡아주었다. 참 다행이었다. 정말 귀한 친우를 두었다.

제국검법의 기본이 된다는 삼검식과 방패를 드는 자세를 공부하였다.

제국기사단 대표규격의 방패보다 딱 절반의 무게가 되는 방패를 연습용으로 받았다. 까닭을 물으니 근골이 자라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함이라 하여 고개를 주억거렸다.

점심식사가 끝난 뒤, 조용함이 그리워 잠시 혼자 산보를 나왔다.

소란을 피해 걷는 길이라 건물 뒤로 멀리 돌았다. 가까운 곳에서 성난 말소리가 들렸다.

뒤로 돌아가면 아이들이 잔뜩 있을 것이니, 빠르게 지나가야겠다 생각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쩐지 귓가에 닿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언제까지 못 본 척하려고.”

“왜. 내가 너보고 여기 남아 있어 달라고 매달리기라도 했어?”

“형 때문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다.”

칼립스 아그리젠트였다. 그리고 발터 오르겐이었다. 나는 당황하여 기척을 숨겼다. 본능적으로 지금 저 자리에 나가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이 형제였나? 성씨가 달랐다.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말라니, 뜻하지 않게 그들 가문의 좋지 않은 비사를 접하게 된 것 같아 민망했다.

언제 나가도 될지 몰라 눈치를 보며 슬쩍 고개를 내밀었을 때였다. 그 순간 발터가 칼립스의 멱살을 잡아 끌어 입을 맞췄다.

⋯입을 맞추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끕, 소리가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진득하게 혀가 섞이는 모습이 적나라했다.

연극에서 보았던 것과도 다르고, 단비 그 아이가 여자친구와 쪽쪽거리던 것과도 달랐다.

칼립스는 벗어나려고 발터의 가슴팍을 밀쳤다. 그러나 가능할 리 없었다. 체격차이도 발터가 훨씬 우세한데다가, 무인과 문인이 힘으로 겨루는 중이었다.

도와줘야 하나? 그러나 누구를? 어떻게? 혼란해 꼼짝도 못하고 굳어있었다.

발터가 칼립스의 허리를 단단히 움켜쥐고 더 깊게 파고 들려는 순간이었다. 짜악, 거센 소리가 울렸다. 발터의 가슴팍을 억지로 떠밀어 공간을 만들어 낸 칼립스가 발터의 뺨을 내리친 소리였다.

당연했다. 도대체 어느 스승이, 어떤 교수가 제자가 저딴 식으로 구는 것을 받아주겠는가.

칼립스가 이를 갈며 씹어뱉듯 말했다.

“네가 대달라고 할 때마다 대주니까 내가 아주 우습게 보이지.” 

발터가 입 안으로 욕설을 짓씹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발터 오르겐은 늘 실실 웃고 다니는 사내였다. 언제나 다정하고 인자하고 상냥한 성품이었다.

나는 저런 욕설을 하는 놈이 발터 오르겐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 때, 발터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딱 마주쳤다.

사내가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갑갑하다는 듯 한숨을 훅 내쉬었다.

나는 그 손끝이 나를 향해 약하게 까딱거리는 것을 보았다. 당장 자리를 피하라는 표식이었다.

일류 무사의 시야를 가지고 있다면 알아보지 못할 리 없는 신호에, 나는 서둘러 뒤돌아 걸었다.

황망하고 황망했다.

아득하고 아득했다.

내가 무엇을 본 것인가 믿기지가 않았다.

사내끼리 연정을 통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막연히 알았다. 일전에 내가 정인을 만들 생각이 없다 말했을 때 루베르도, 나보고 혹시 남색을 하냐 묻지 않았던가.

시어런에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발터 오르겐은 나를 분명히 눈치 챘지만, 무인이 아닌 칼립스는 내가 그 자리에 있던 것을 모를 터였다.

아니, 그 둘이 화해하면 발터가 언질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어찌 대처해야 하는가? 갑자기 쉐이든이 말한 것이 떠올랐다.

칼립스 아그리젠트 교수의 사랑 싸움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했던가.

과연 그랬다. 이것은 내가 도울 수 없는 일이었다.

마리앤의 연정처럼 말랑하고 정숙하고 보드라운 것이 아니라, 이토록 험악하고 물어뜯을 듯한 기세로 서로에게 욕을 쏟아 붓는 것 또한 연정이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 바로 다음 시간이 칼립스의 수업이었다.

칼립스 아그리젠트는 목이 쉰 채 수업에 들어왔다. 나는 그 목덜미에 남은 집요한 보랏빛 멍을 바라보았다. 이로 물어뜯은 자국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그 발터 오르겐이라고?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 않기도 했고, 무척 궁금하기도 했다.

발터가 욕설을 내뱉던 것이 아직도 귓가에 선했다.

내가 수업시간 내내 어지간히 넋을 놓고 있었던지, 수업이 끝나자 쉐이든이 내 어깨를 붙잡아 흔들었다.

나는 그 때 루실라가 발터를 놀리던 장면을 회상하고 있었다. 칼립스 교수라고 분명히 말했지, 저 둘의 사이를 모르는 것이 나뿐인가 싶기까지 했다.

“아니, 얘가 왜 이래. 미카, 가자니까?”

“쉐이든.”

나는 필사적으로 쉐이든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이가 놀라 동그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알고 있었느냐?”

“어? 또 뭘?”

“⋯교수님의.”

“응. 교수님의?”

“정인을.”

쉐이든이 아. 하더니 시선을 돌렸다. 대답을 이미 들은 것과 진배없었다.

쉐이든은 이전과 꼭 같이 방에 가서 설명을 하자 하고 나를 이끌었다. 가는 길에 루베르를 마주쳤지만, 내 마음에 여유가 없어 인사하지 않고 지나쳤다.

* * *

나는 벌 서는 아이처럼 쉐이든의 기숙사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무릎 위에 손을 얹고 가만히 있었다.

쉐이든은 내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주었다. 더글라스 머스탱의 교수실에서 흔히 먹던, 진정과 안정을 위한 노란 빛의 차였다.

아. 나는 그만 내 얼굴을 두 손으로 덮어 가리고야 말았다.

한참 묵묵하던 쉐이든이 입을 열었다.

“그, 어쩌다 알았는데?”

대답하지 않았다.

“⋯그, 어느 지점에서 놀란 것인지 물어봐도 될까? 나도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해서.”

대답하지 못 했다.

내가 본 것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나는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나이 먹고 이 무슨 추태인가 싶으면서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남녀가 교합할 때 접문을 하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어찌 그리 짐승같이 혀를⋯.

안력이 좋아 지나치게 잘 보인 것이 문제였다.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 태양혈 어림을 꾹꾹 눌렀다. 관자놀이가 뻐근했다. 한참 그러고 있자니 정신이 들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묻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혼란한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어 쉐이든을 찾았음을 알았다.

내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아이가 재차 차를 권했다. 일다경(*차를 한 잔 마시는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야 쉐이든이 내 어깨와 등허리를 쓸어내리며 다독이고 있는 것을 알았다.

하여간 저도 무인이면서 무인의 거리를 훌쩍 뛰어넘는 놈이었다.

그제야 속에서 끓어오르는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작게 말했다.

“교수님의 정인이, 오르겐 선배일 줄은 몰랐다.”

“어어⋯. 나도 놀라긴 했어. 아무래도 둘은 나이 차이도 나고.”

“얼마나?”

“열한 살 차이라고 했나⋯. 그래도 선배가 성인이 되고 나서 만나기 시작한 모양이야. 그 전에는 교수님이 계속 거절했다고 들었어.”

“⋯누구에게?”

“세르벨 선배에게⋯?”

로건 세르벨, 그놈은 내게는 이런 언질을 해 주지 않고 쉐이든에게만 입을 열었단 말인가.

잠시 분한 마음이 들었다가, 내가 미리 들어도 믿지 않았을 것을 알아 애써 속을 다스렸다. 어찌나 놀란 것인지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나는 내가 손 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협객행을 하다가 곁길로 새면 도우니만 못한 결과를 보기 쉬웠다.

이 일은 분명 내가 도울 수 없는 일이고, 손 대지 못할 일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설명을 듣고 싶었다.

이 세상이 내게 달고 순하게 굴어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한 겹 벗겨낼 적마다 놀랍고 두려운 것이 숨어있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자 했다.

쉽게 듣고 넘겼던 남색에 대한 것도 더 알아야겠고, 그 친근하고 사람 좋던 발터가 왜 그리 야차같이 굴었는지도 알고 싶었다.

당장 내일 아침에 발터의 얼굴을 볼 일이 걱정이라 얼굴에 열이 올랐다가, 등골이 싸하게 식기를 반복했다. 마음을 너무 쓴 탓인지 현기증이 일었다.

성인이 된 뒤에 만났다고.

나는 쉐이든의 말을 곱씹었다. 확실히, 그 장면만을 떼어놓고 보았을 때에 칼립스가 아이를 강제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발터가⋯.

나는 다시 떠오르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내쫓으려 고개를 저었다. 머리칼이 엉망으로 흩어졌다.

쉐이든이 옆에서 절절매다가 빗을 들고왔다. 헛웃음이 났다가, 금방 그쳤다.

“교수님이랑 선배가 사귄다는 사실이 그렇게 놀라워?”

“아니다.”

“그럼 왜?”

“⋯.”

나는 내가 본 장면을 내 입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답답해하는 기색 없이 내 머리를 빗어주었다. 얌전히 빗질을 받고 있으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아이를 졸라, 내가 이미 진정하였으니 제대로 얘기를 해 보라고 판을 깔았다. 쉐이든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내 찻잔을 채워주고 나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몰라. 그냥, 공공연히 도는 이야기일 뿐이야. 알다시피 오르겐 선배는 졸업 유예를 좀⋯오래 했잖아. 그런데 그 선배가 졸업 학년일 때에는, 검술부 학생들 중에서 꽤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나 봐.”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길었다. 나는 찻잔을 세 번은 비웠다. 쉐이든은 귀찮은 내색 없이 내 찻잔을 여러 차례 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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