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29)화 (129/176)

129.

작년과 마찬가지로 고급 검술 수업의 커리큘럼은 1학기 내내 동급의 무인들을 붙여 두고 대련을 벌이는 것이었다.

초절정의 자질, 즉 소드 마스터의 무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소년 소녀들을 모아두고 그 실력을 첨예하게 갈고 닦아주는 과정이었다.

자연히 몇은 졸업을 하고 몇은 또 새로 들어왔으나, 지난 학기에 마주한 얼굴들이 많았다.

마엘로 샌슨의 인도 아래에 처음 고급 검술 수업을 듣는 아이들이 경탄으로 눈이 동그래지는 모습을 보았다.

나 또한 작년 이맘때에는 저런 모습이었을 터였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사람들의 중심에 발터 오르겐이 서 있었다.

“그간 키가 좀 컸네, 에른하르트 영식.”

“선배님은 여전하십니다.”

“아니, 나는 여전해야지.”

오늘도 발터 오르겐은 긴 금발을 꼼꼼하게 땋아 뒷머리에 올려붙인 채였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머리를 풀어 내릴 것이라면 루실라처럼 대강 하나로 올려 묶어도 될 터였다. 문득 그 까닭이 궁금했다. 나는 궁금한 것을 오래 참는 성정이 못 됐다.

“그, 머리 말입니다.”

“어? 머리? 머리가 왜?”

“매번 꼭 땋고 나오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발터는 제 뒤통수를 쓸어 만졌다. 픽 웃는 입꼬리가 여우처럼 가느스름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긴 머리를 좋아하더라고.”

그 때, 저쪽에서 마엘로 샌슨이 발터를 불렀다.

발터는 올해에도 첫 번째 대련 순서를 받았다. 그가 졸업 유예를 여러 차례 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기 위해 맨 앞 차례를 받는다고 벤자민이 언질해 주었다.

초급 검술 수업에는 나 또한 아이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 앞에 나선 적이 많았다.

발터 오르겐이 다른 것은 몰라도 대련 상대에 대한 예우는 기가 막히는 터라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급 검술 수업은 초절정의 자질, 즉 소드 마스터의 자질이 있는 학생만 받았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화경의 무인인 마엘로 샌슨의 눈으로 보아 충분히 그 빛을 볼 수 있는 학생을 골라 받았다.

발터 오르겐이 졸업학년이 되면서 고급 검술 수업을 수강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벌써 오 년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도, 절정에도 이르지 못하고 일류 수준의 경지에 머물러 있다고?

그 마엘로 샌슨의 인도에 따라 꾸준히 몸을 닦고, 다른 수업은 일절 손대지 않고 검술만을 연마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간 그의 검법이 서툰 것만을 보던 나였다. 의식하니 달리 보였다.

발터는 충분히 쳐낼 수 있는 검을 박자를 쪼개어 어긋나게 쳐냈다.

기민한 움직임 사이에 반의반 박자 호흡씩 늦추어 동작을 느리게 가졌다.

충분히 숨소리에 여유가 있는데도 미간을 좁히고 힘든 표정을 지어냈다.

상대의 검을 받을 때에 몸을 과하게 뒤로 젖혀 밀려나는 듯 보였다.

유심히 살펴보고 있자니, 곁에 서 있던 루베르가 툭, 내 어깨에 제 어깨를 부딪혀왔다.

“왜요?”

“그냥, 심심해서.”

어떻게 저 대련을 보면서 심심해 할 수가 있지?

하지만 아이란 원래 그런 법이라, 어르고 달래느라 손을 들어 루베르의 머리나 조금 쓰다듬어주고 말았다.

어깨를 맞대고 있던 아이가 큰 키를 구부려 내 어깨에 고개를 묻어 쓰다듬기 편했다.

갑작스럽게 벤자민이 크게 사레가 걸려 그 등도 쓸어주었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아해들이다 싶었다.

* * *

세계 지리 시간. 오랜만에 브리아나 카사블랑카 교수를 다시 보게 되었다.

지난해 1학기에 교양 세계사를 가르친 바 있었던 브리아나는 동작 하나하나가 우아한 여성이었다.

필기와 암기가 중한 수업이 흔히들 그러하듯이,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브리아나는 백묵을 들고 커다란 칠판 앞에 섰다. 그러더니 맵시 있는 선으로 대륙 전도를 그렸다.

커다란 칠판에 단숨에 지도의 형상이 떠올랐다.

일전에 각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연도별로 외우고 있더니, 그 지역 하나하나의 이름자도 다 외우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지도 한 장 없어도 이 여인만 옆에 세워두면 길 잃을 걱정은 없을 것이었다.

일전에도 대륙 전도를 몇 차례 본 기억이 있었지만, 직접 눈앞에서 손으로 그리는 거대한 지도의 그림은 묘하게 사람을 압도하는 맛이 있었다.

넓적한 손바닥을 나비 날개처럼 양 옆으로 떡하니 붙여놓은 것처럼 생긴 대륙 전도에 이미 내 눈에 익숙한 국경선이 죽죽 그어졌다.

섀턴 사막과 오왕국, 시어런 제국이 고스란히 지도에 담겼다. 나는 반듯하게 앉아 브리아나가 지도 위에 적는 글자들을 꼼꼼히 살폈다.

수업 첫 시간이니만큼 시어런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겠거니 싶었다.

오산이었다.

“여러분 모두, 세상의 북쪽에 유일 산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러나, 이것이 과연 세상의 끝일까요?”

일전에 대륙 전도를 보았을 때 나는 이 대륙이 나비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동쪽 날개는 시어런 제국이, 서쪽으로는 섀턴 사막이, 제국과 사막 사이에 오 왕국이 자리해 있는 것을 익히 배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교수는 유일 산맥 너머 위쪽을 백묵의 너른 면으로 삭삭 칠했다.

“유일 산맥의 이름은 왜 유일 산맥일까요?”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브리아나는 유일, 그 두 글자를 지도 옆에 따로 빼서 적었다.

“유일,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죠. 유일 산맥은 이 거대한 대륙에 단 하나뿐인 산맥이에요. 그 밑으로도 물론 여러 산들이 여러 지역에 걸쳐져 있지만, ‘산맥’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유일 산맥밖에 없지요.”

교수는 백묵으로 하얗게 칠해진 너른 면, 대륙의 위쪽을 백묵으로 짚었다.

“유일 산맥의 위쪽, 이 위를 우리는 마경이라고 불러요. 몬스터, 마나, 혼돈이 들끓는 곳. 이 산맥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마나의 밀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특별히 마나를 수련하지 않은 일반인은 숨을 쉬기도 힘든 곳이죠.”

교수가 짚은 곳에서부터 아래쪽으로 오는 화살표를 세 개 그렸다.

“유일 산맥은 마경의 마나와 몬스터를 막아주는 결계와 같은 역할을 해요. 이 대륙을 대륙으로 남아있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산맥이자 방어막을, 우리는 경의를 담아 부르죠.”

교수가 옆으로 그은 선을 두 번, 진하게 덧그렸다.

“유일 산맥. 인류가 지켜야 할 마지막 방파제라고.”

시어런 제국에서는 산의 높이를 잴 때에 아티팩트를 들고 산 정상에 올랐다.

해수지표 라는 이름의 아티팩트의 다른 한 쌍을 해수면 위에 얹어두고, 나머지 하나를 봉우리 위에 얹고 마법식을 발동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교수는 유일 산맥의 최고 높이를 계산할 수 없다고 했다. 직접 그 봉우리에 올라선 사람이 지금껏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화경의 경지에 오른 샌슨이, 초절정이었던 시절에 죽을 뻔한 곳이었다. 쉬이 볼 수 없었다.

유일 산맥의 어느 구석은 사람들이 들어가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익혔다. 어느 구역부터 위드로 공작가와 그림스베인 공작가가 진을 치고 지키고 있는지를 배웠다. 산맥의 외곽을 잘 따라 돌아도 섀턴 사막으로 향하려면 오웬의 땅을 밟아야만 가능하다는 것도 배워 알게 되었다.

유일 산맥은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세계 지리 시간의 첫 수업과 두 번째 수업 모두가 해당 산맥에 대해 배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무척 원하고 있던 것이기 때문에 크게 기뻤다.

그 이후에는 시어런 제국과 오왕국, 섀턴 사막의 지형지물과 특산물에 대해 배운다고 했다.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게 느껴졌기 때문에 표정을 다스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바로 다음 이어지는 레이 깁슨 교수의 응급치료 수업은 마리앤과 함께 들었다.

지난 데미안 사고 이후로 여러 아이들이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 특히나 마리앤은 제가 곧바로 마법식을 자아내서 상처를 소독하거나 치료하지 못한 것을 무척 미안해했다.

마법 실력은 빠르게 느는 것이 아니니만큼, 실질적인 의료법을 배워 두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말에 나 또한 그녀를 반겼다.

그러나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 나와 마리앤은 함께 아연해졌다.

“내 수업을 들으러 온 여러분은! 이미 기본 자세가 되어있다! 모든 사고는 방심했을 때 일어난다! 신속하고 정확하고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선 방심하지 않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

조금 더 뒷자리에 앉을 것을 그랬다.

레이 깁슨은 귀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를 가진 사내였다. 내가 지금 응급치료 수업을 들으러 온 것인지, 성악 수업을 들으러 온 것인지 혼란했다.

사내는 억센 머리칼이 까슬까슬해보이도록 짧게 자른 삼십대 후반의 남성으로,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색이 모조리 햇빛에 잔뜩 그을려 붉게 익어 있었다.

굵직한 목줄기 아래로 팽팽하게 당겨진 옷이 부담스러웠다.

근육을 저만치 키웠으면 옷 또한 좀 더 낙낙하고 조신히 입어야 마땅한 것을, 움직일 여유도 없이 꽉 죄어놓은 꼴이 무엇인가.

내가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앉아 있었더니, 마리앤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저희 교실 잘못 찾아온 것 같아요. 나갈까요?”

“⋯아니, 그.”

드물게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중원에서의 의생들이 전부 호리호리하고 가냘픈 인상이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의술을 펼치는 이들은 전부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아니, 하지만 에른하르트가의 주치의들도 남녀 가리지 않고 얇고 가느다란 몸을 낭창거리는 이들이었는데.

가슴통은 곰만 하고, 허리통은 아름드리 나무 같은 사내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사내는 호쾌하게 웃으며 교과서를 손에 집어 들어 머리 옆에서 흔들었다. 내 손에서는 책으로 보이는 그것이 남자의 손에서는 자그마한 식빵 조각처럼 보였다.

남자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한 학기 내내 어떤 응급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겠다고 말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내 귀의 안위인데 무슨 대처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기막으로 둘러 소리를 차단하면 되는 일이겠으나, 수업의 일부라도 듣긴 들어야 하겠기에 그러지도 못했다.

어쩐지 팽가 놈과 빌이 한 번에 떠오르는 사내였다.

올해는 운수가 안 좋을 것이 분명했다. 시어런에는 굿이나 제를 지내는 문화가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경이라도 읊어야 이 액운을 다 떨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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