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나는 루베르 그 아이가 이렇게 냉담한 표정을 하고 서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이러고 있으니 머리터럭은 검어도 북해빙궁의 고수를 보는 것 같았다.
늘 눈꼬리가 웃는 것처럼 아래로 내려가 있던 루베르였다. 쉽게 발개지던 녀석의 낯이 차갑게 굳어있었다.
길게 옆으로 빠진 눈꼬리가 깜박일 적마다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주변 아해들이 왜 그리 루베르를 야멸찬 놈이라 생각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녀석이 표정을 굳힌 모습을 처음 본 나는 다소 당혹하여 쉬이 입술을 떼지 못했다.
아이의 까만 눈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선배?”
“⋯여긴 무슨 일이야?”
늘 살갑게 말을 붙여오던 녀석의 말끝이 서늘하게 툭 떨어지자 어쩐지 가슴 안쪽이 아렸다. 그냥 잘 놀고 돌아왔다 인사나 하러 들렀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그런 소년을 바라보다가, 괜히 머쓱하여 손으로 내 머리칼이나 한 번 쓸어 뒤로 넘겼다.
루실라 그 아이가 나를 놀린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홀로 사색하는 것을 방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겨우 지학을 넘긴 소년에게 겁을 먹은 것인가 싶으면서도, 등골이 선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방해한 것이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입을 댈 일이 아닌 것 같아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그러나 바로 몸을 돌리기엔 어쩐지 머쓱했다.
바로 돌아서지 않고 주춤 반 걸음 뒷걸음질을 쳤더니, 이켠을 바라보던 아이의 표정이 곧장 무너져 내렸다.
“아니, 아니야. ⋯아니야, 잠깐, 가지 말아 봐.”
이제야 익숙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아이의 눈매가 허물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섰다. 그제야 제가 아이의 반응에 서운했던 것을 알았다.
아이가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목소리 끝이 젖어 떨렸다.
“화내려던 게 아니야.”
“압니다.”
“⋯서운해서 그랬어.”
“⋯예?”
“내가 왜 서운했는지는⋯혹시 알아?”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겨우 그것으로 이렇게 야멸차게 굴었다고? 이해가 가지 않아 저어하다가 대답했다.
“⋯제가 방학 전에 뵙고 가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녀석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희고 차갑던 얼굴에 붉게 혈색이 올랐다. 흰 눈밭에 피어나는 동백꽃이 이런 모양일까. 달빛을 어깨에 얹은 소년이 환하게 빛났다.
나는 루베르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그게 뭐라고. ⋯정말, 그게 뭐라고.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어서.”
“⋯응.”
“다음에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응.”
하지만 약속을 쉬이 어긴 것은 내가 먼저였다. 내 잘못이 분명한 일이라 변명을 덧붙이지 않고 곧장 사과했다.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괜찮다는 말 만큼은 하지 않았다.
그제야 아이에게는 아주 중한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할 말을 고르며 멀거니 서 있다가, 아이의 손끝이 발갛게 언 것을 보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 이 주변을 돌았던 것일까.
아이의 심란한 마음이 내게서 비롯했다는 것이 놀랍고 이상하고, 어색했다.
“편지는 받으셨습니까?”
“⋯응. 춥다고 훈련을 게을리하고 그러진 않았어.”
아이가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편지에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라 적은 것이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힘없는 실소도 웃음은 웃음인지라, 아이의 마음이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물러났던 만큼 반 걸음 다가섰다.
루베르가 나를 바라보며 몇 번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더니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저도 그렇습니다.”
“⋯정말?”
“예.”
아이가 두 손을 들어 몇 차례 마른세수를 했다.
그제야 녀석이 이전처럼 처연하기도 하고, 수줍기도 한 비실비실한 얼굴로 돌아왔다. 하여간 시어런에서는 사내들끼리도 유난히 간지럽게 군다는 생각을 했다.
인사 한 번 하고 헤어지기가 머쓱하여 아이를 좀 더 달랠 겸 함께 걷기로 했다.
아카데미 부지가 넓어 조용히 걸을 길은 많았다. 두 달 남짓 떨어져 있던 동안 나도 키가 좀 컸지만, 아이도 훌쩍 키가 자란 것을 그 때 알았다.
처음에는 말없이 걷던 아이가 그간 못했던 이야기들을 조근조근 풀어놓기 시작했다.
답장을 적어도 내가 아카데미에 도착한 뒤에야 받아볼 수 있을 것 같아, 바로 편지를 쓰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꼭꼭 기억해두었다는 말이 귀여웠다.
아이가 날 참 오래 기다렸다는 것도 들었다.
루실라 그 아이는 루베르가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을 일찍이 알았을 터였다. 녀석이 나를 도와준 것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왜 웃느냐 묻기에 아무것도 아니라 대꾸했더니 아이가 볼멘 소리를 내어 또 웃었다.
문득 아이가 다른 것을 물었다.
“올해도 로제 영식과 시간표를 같이 짤 거야?”
“예, 그럴 것 같습니다.”
“이번에 교양 수업 중에 몬스터학 개론을 들을 생각인데, 같이 듣지 않을래?”
“음.”
“내가 이번이 삼학년이라서, 에른하르트 영식과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을 것 같아⋯. 싫어?”
“아닙니다. 어느 요일의 수업입니까?”
“금요일.”
“듣겠습니다. 안 그래도 염두에 두고 있던 수업이었기도 했고.”
겨우 그 말에 아이의 얼굴이 달처럼 눈부시게 피었다. 이제야 제대로 웃는 모습을 보았다.
하여간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았으나, 좋은 게 좋은 것이라 말을 덧대지 않았다.
한참을 걷다가 루베르가 잠시 쉬고 싶다기에 적당한 벤치에 앉았다.
손이 시리지 않냐 물었더니 괜찮다던 아이가, 추우니 손을 잡아 달라 조르기에 그렇게 했다.
황자라는 녀석이 이렇게 응석이 많아 어쩌나 싶으면서도 내 녀석에게 지은 죄가 있어 그 손을 꼭 잡아 토닥여주었다.
어찌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쌓였던지, 새벽까지 한참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새 학기가 밝았다.
검술 수업은 여전히 오전에 했다. 매주 월수금은 중급 검술을 듣고 화목에는 고급 검술을 듣기로 했다. 당연히 마엘로 샌슨에게 사사할 생각이었다.
루베르와 함께 몬스터학 개론을 듣는 것 외에도 유일 산맥에 대한 것을 더 배우고 싶어 고민하다가, 브리아나 카사블랑카 교수의 세계 지리도 수강하기로 했다.
제국의 계보 수업과 실전 비도술 수업 또한 시간표에 넣었다.
지난 학기에 수강한 실전 비도술은 적당한 성적이 나와 재수강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나의 실력이 마음에 들어차지 않는 탓에 더 배우고 싶었다.
이번에는 뽑기 운이 좋지 않았지만, 앞의 몇이 양보해주어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야영 수업 동무들과 세드릭 교수의 약물 제조 실습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다. 재료를 구하러 야영을 하는 재미는 없겠으나, 야영 수업을 함께 들은 동무들과 매주 만날 수 있는 것이 좋아 허락했다.
데미안이 크게 다친 일이 있어 다 함께 수업을 듣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라 생각하던 차였다. 마음이 들떴다.
나중에 꼭 한 번은 필요할 것 같아 응급처치 기초 수업까지 시간표에 넣고 나니 이번 학기도 숨 가쁘게 달려야 할 것이 눈에 선했다.
그나마 이론 시험을 치는 과목이 몇 안 되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렇게 친한 아해들과 함께 어울려 짠 성공적인 시간표를 들고 마엘로 샌슨의 첫 수업에 들어갔을 때,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빌 브라운. 발렌티아 공작가에서 만났던 그 덩치 큰 놈이 중급 검술 수업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서서 그 큰 팔을 붕붕 휘두르고 있었다.
그냥 서 있어도 큼직한 놈이 사지를 떡 벌리고 휘적이고 있으니 지나다니는 아해들이 화들짝 놀라 거리를 벌렸다.
“⋯아니, 아니 어떻게 네가 이 수업에.”
“그야 형님과 같은 수업을 들으려고 바꿨지요! 마엘로 샌슨 교수님과 형님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지 않습니까! 허어! 이 옆에 계신 분이 로제 선배님이십니까?”
“맞기는 한데⋯그러니까, 영식이 누구시더라⋯.”
“빌 브라운이라고 합니다! 여기 미카엘 형님과는 끈끈한 피로 맺어진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지요!”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시끄러웠다.
절로 뒷골이 당겼다. 이래서 내가 팽가 놈을 꺼려했던 것을 새삼 기억해냈다.
이 녀석과 그 녀석이 같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저 홀로 모든 시선을 모으는데 재주가 있었다.
내가 얼떨떨하게 서 있는 사이 쉐이든과도 악수를 하고, 벤자민과 포옹을 한 빌이 내 어깨에 두꺼운 팔을 턱 얹었다. 처음 보는 선배들 무리에 끼면서도 녀석은 조금도 거리끼는 기색이 없었다.
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얼결에 내 옆자리에서 밀려나게 된 쉐이든과 벤자민이 얼떨떨한 얼굴로 서서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익숙한 얼굴 하나가 또 얼굴을 비추었다.
“⋯에른하르트 영식? 그 옆은⋯.”
루베르였다.
아니, 고급 검술 수업이나 듣던 놈이 중급 검술 수업에는 왜 기웃거리는 것인가?
의아한 나와 달리 빌은 어지간히 신이 난 모양이었다. 여전히 내 어깨에 한 팔을 얹은 채로 꾸벅 허리를 굽히는 탓에 나 또한 덩달아 허리를 숙여 루베르에게 인사를 하고 말았다.
“아니, 빌. 이건 좀 놓고.”
“안녕하심까! 루베르 황자 전하시지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말리는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것인지 아해는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어, 그래⋯. 그대 이름이⋯?”
“빌 브라운이라고 합니다! 여기 미카엘 형님과는 피와 우정과 정열을 나눈 뜨거운 사이지요!”
도대체 언제 그런 것을 나누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남의 귓전에 대고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만 굴뚝같았다.
그러나 바로 엊그제 별것도 아닌 일로 심약하게 마음 다친 태를 내던 루베르를 떠올리면, 같은 시어런 태생인 빌도 마음이 약하지 않을까 싶어 꾸짖는 대신 툭 밀어내고 말았다.
“그래, 일단 이건 좀 놓아라.”
“어어! 역시 형님이십니다!”
“또 뭐가.”
“절 이렇게 가볍게 밀어낸 사람은 형님이 처음이에요!”
⋯말을 말자.
저쪽에서 마엘로 샌슨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수선을 부리는 녀석의 입술을 꽉 잡아 닫게 했다.
몇 번 웅얼거리던 빌이 교수가 오는 것을 보더니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뒷짐을 지고 섰다.
얼핏 고개를 돌려 바라본 루베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저 아이는 조용조용하고 얌전한 것을 좋아하는데, 빌과 더불어 어울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걱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