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새해를 맞이한 손님들이 우르르 인사하고 길을 떠났다. 이후 정리는 시중인들의 일이었다.
혈족들은 못다 한 초상화를 마무리하기 위하여 한 자리에 모였다.
다들 피로한 와중에도 기쁨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낯을 하고 있는 것이 보기 좋았다.
나는 화가를 불러다가 목에 걸고 있는 로켓을 보여주었다.
일전에 루베르가 내게 선물해 준 로켓이었다. 초상화를 넣게 된다면 가족 초상화를 넣고 다니는 것이 가장 마땅하니 기회가 온 김에 맞는 크기의 것을 구할 생각이었다.
화가는 어렵지 않은 일이라며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큰 초상화가 완성되면 그것을 보고 똑같은 것을 작게 하나 더 그려드리겠습니다."
"하나만?"
"다른 한 면에는 공자님의 초상화를 넣어드려야지요."
미하엘과 아스델의 얼굴을 그려달라 하려던 나는 의아해져서 내 얼굴을 손으로 훑었다.
시어런의 인물들이 제 얼굴을 굳이 목에도 넣고 다니는 풍습이 있던가? 들어 본 일이 없었다.
"⋯내 얼굴을, 말입니까?"
"아직 공자님께서 연인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잘 보관하고 있다가, 연인이 생기면 바꿔 가지는 것이지요."
"⋯허어."
생각지도 못한 이유였다.
필요 없다 말하려다가, 주변의 모두가 사랑사랑 노래를 하는 것에 부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라 얌전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치 않은 일이지만 또 어찌 알겠나. 나 또한 좋은 인연을 맞이할 일이 있을지.
어쩐지 가슴 한켠이 수런거렸다. 주책이다 여기면서도 내 목에 걸린 로켓을 쓰다듬게 되었다.
고대하고 기다렸던 4마탑에는 출입하지 못 했다.
이곳의 마법사들은 늘 바쁘고 정신이 없어 외부인을 잘 만나주지 않는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혹시나 하여 발렌티아 가의 식솔, 아이젠과 헨델을 대동하였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아티팩트들을 팔겠다고 전시해 둔 1층만 구경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안내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마다 귀신에 홀린 듯 1층 입구로 돌아오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했다.
“뭐, 익숙해. 마법사는 원래 반쯤 미쳐있는 사람들이잖아.”
“으응. 우리도 돈 받을 일 없으면 잘 안 만나 주는걸. 다음 의뢰일까지 시간이 좀 남아있어서 그런가 봐. 다음번에는 만날 수 있게 해 줄게.”
“⋯예.”
4마탑의 마법사들과 가장 가까울 남매가 나를 달래려 애쓰는데 더 버티고 서는 것도 이상하여 포기했다.
다음을 기약하며 아카데미의 동무들에게 전해 줄 선물이나 몇 가지 골라 구입했다.
슬슬 아카데미로 돌아갈 때였다.
* * *
1월의 마지막 주에는 수도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겨우 방학 두 달을 떠나 있었을 뿐인데 어쩐지 아주 오랜 시간 떠나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 십여 년간 머무른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와 엇비슷하게, 아카데미는 내 세 번째 집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아카데미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더글라스 머스탱의 교수실이었다.
지난 학기를 마무리하면서 경황이 없어 골렘을 치우는 것을 돕지 못하고 나온 것이 무척 미안했던 탓이다.
익숙하게 교수실 문을 두 번 노크하고 문을 열었을 때, 나는 크게 놀라 소스라쳤다.
“아니, 왜 그렇게 놀라요?”
“저 흉물이 왜 아직 여기에 있습니까?”
“아아. 골렘⋯. 너무 익숙해져서 그만⋯. 일단 들어와요.”
도대체 어찌하면 저 흉물이 익숙해 질 수 있다는 말인가?
더글라스에게 미안한 마음이 배가 되어 몸 둘 바를 몰랐다. 보면 볼수록 새로이 역겨운 모양새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런 나를 보고 작게 웃은 더글라스가 다정한 말씨로 설명해주었다.
“저는 방학 중에도 꾸준히 교수실에 나오는 편이고, 메이지 볼더도 수도를 떠나지 않으니까요.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단전을 생성하는 데 실패했으니 아예 에른하르트 영식이 돌아 올 때까지 내내 운기조식을 시켜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에 계속 두셨습니까?”
“한 번 멈추면 다시 작동시키기 어렵다고 하기에⋯. 하지만 봐요. 여기 단전 비슷한 게 생기긴 했어요. 위치는 좀 다르지만.”
“허어⋯.”
더글라스 머스탱이 마법사들과 잘 어울리는 까닭을 알 것만 같았다.
더글라스가 의자를 끌어 골렘과 가까운 자리를 권하기에 순순히 앉아 함께 살폈다. 확실히 쉬지 않고 운기조식을 한 탓인지, 골렘의 몸속을 도는 기운이 처음의 다섯 배는 되었다.
눈으로 찬찬히 흐름을 따랐다.
내가 처음 골렘에게 가르친 기혈뿐 아니라, 전신 세맥의 혈에 넘쳐난 기운이 찰랑이며 저들 나름대로 노닐고 있었다.
그 덕분에 처음보다 단단해진 기혈의 모습이 눈으로도 쉬이 읽혔다.
“혈도라고 했지요? 마나가 흐르는 길이 전체적으로 강인해졌어요. 이건 분명 마법사가 아니라 기사의 몸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지요. 간단하게 보면 신체 강화에 마나가 사용된 것은 마찬가지인데, 뼈와 근육이 아니라 전신의 혈관을 따라 기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독특하고 신기하죠.”
“과연 그렇습니다. 다만 단전의 위치가⋯.”
“예, 아무래도 서클을 만든 마법사의 신체를 본 따 만들어서 그런지. 여기를 중단전이라고 부른다고 했죠?”
“예. ⋯그러나, 하단전보다 먼저 중단전이 열리는 것은 괴상하게 느껴집니다.”
“서클에 마나가 흐르지 않고 고여서 결정 형태를 빚는 것은 저도 본 적이 없어요. 이게 골렘이 아니라 실제 사람이었다면 분명 심장에 무리가 가서 실험을 중단해야 했을 거예요.”
“⋯으으음.”
“이전에 신체에 억지로 마나를 축적하려 했던 기사들에 대한 얘기를 해 준 적이 있었죠? 이것도 결과만 보면 크게 다르지 않아요. 아마 에른하르트 영식이 말했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나 의지가 작용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은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다음 단계는 역시, 저와 메이지 볼더가⋯.”
“다음 골렘을 한 번 더 거치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이 다정한 사내가 주화입마로 고꾸라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전생에 초절정의 정지에 이르러 겨우 중단전을 연 나는 알고 있었다. 중단전을 여는 것과 마나를 흘리는 것은 무척 다른 일이었다. 어떤 문제가 어떻게 발생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내 불안한 기색을 읽은 더글라스가 민망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마나의 운용으로 누군가의 걱정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낯선 기분이네요.”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더글라스 머스탱이 가르치는 대표 과목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나와 오러, 오러와 마나.
적어도 이 시어런 제국에서 더글라스보다 오러와 마나에 통달한 이는 한 손에 꼽힌다는 말이었다.
내공의 운용이라면 모를까 오러와 마나 양측에서 서툰 모습을 보이는 내가 걱정할 주제가 못 되는가 싶어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내 표정을 살피던 더글라스가 다정한 낯으로 손을 내어 내 손등을 도닥였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어요, 에른하르트 영식. 하지만 매일매일 저걸 보고 있다 보니 어떻게 해야 제대로 운기조식을 할 수 있을지 대강 감이 잡혀서 그래요.”
“⋯예.”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더글라스보다 볼더가 먼저 실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 웃음을 샀다.
너무 이기적인 소리였냐 하였더니, 볼더 앞에서 그 말을 했다가는 우는 꼴을 볼 수 있을 거라 하여 농담인 척 웃고 말았다.
재차 교수실에 들르지 않고 겨울방학을 보내러 떠난 일을 사과하여 용서를 받았다.
더글라스의 교수실을 나선 뒤에는 곧장 루베르 황자를 찾기 위해 나섰다.
본가가 수도에 있는 아이였다. 먼 길을 떠나지 않았을 테니 이때 즈음해서는 아카데미 내에 있을 것이 빤했다.
아이를 찾으러 가는 길에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막 움트는 풀꽃도 보고, 살얼음이 서린 연못도 빙 둘러 걸었다.
저녁때가 되어 식당에 가서 밥도 먹었다.
우연히 만난 동기들이 즐거이 인사하는 것을 받아주며 루베르의 행방을 물었는데, 아는 녀석이 하나도 없었다.
도서관에도 가고, 카페에도 들렀다.
아이의 기숙사 코앞까지 갔다가 위 학년 기숙사에 함부로 출입할 수 없다고 하여 돌아섰다.
연락할 방도가 없어도 아카데미 안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니 전혀 조급하지 않았다.
우연히 대운동장에서 루실라를 만났다.
유난히 나를 반가워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나 또한 기꺼운 마음이 들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간단히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받았다.
내 예상대로 루베르와 루실라 남매는 수도에서 신년제 맞이를 하느라 바빠 정신없이 겨울방학을 보냈다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혹 루베르 선배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어어⋯. 아까 밥 먹고 지금은 산책하겠다고 나갔을 텐데. 아마 산책로 중 어디에 있지 않을까?”
“흐음⋯. 그래요.”
발렌티아 공작가에 도착하자마자 루베르에게 편지를 부쳤으나 답신을 받지 못했다.
수도와 거리가 멀어 전령이 오가는 시간이 오래 걸린 줄로만 알았는데, 바빠서 답신을 적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잡하고 바쁜 일이 많다면 구태여 홀로 사색하는 녀석을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기숙사로 돌아갈 요량으로 꾸벅 인사하고 걸음을 돌리자 루실라가 곧장 내 소매를 붙잡았다.
“아니, 지금 그냥 들어가려고?”
“홀로 산책하는 걸 방해하는 일이 될까 봐.”
“아냐, 아니야. 이왕이면 오늘 찾아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오늘 도착한 거 맞지?”
“예.”
“조금만 더 찾아봐 주라. 응?”
루실라 이 아이가 장난기가 심하기는 해도 이리 절실하게 말하는 까닭이 있을 터였다. 다소 의아하였으나 거절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아직 해가 짧아 빠르게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익숙한 길을 찾아 돌았다. 잘 정돈된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찬 기운에 입김이 흐리게 서렸다.
나야 추위를 타지 않아 괜찮다지만, 루베르 그 아이는 옷을 단단히 입었는지 모르겠다. 겉옷이라도 챙겨 나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정말 별 일 아닐 것이라 여겼다.
루베르 그 아이가 그런 표정을 할 것이라고는, 정말 조금도 몰랐던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