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한 해의 마지막이 되기 일주일 전.
벌써부터 발렌티아 공작가에 수많은 마차들이 줄을 서서 밀려들어왔다. 그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고 많던 저택의 방들이 모두 손님을 맞아 꽉 들어찼다.
저마다 휘황찬란한 옷가지를 휘감고 반짝이는 사람들이 케이크 속에 그득 담긴 과실들마냥 반짝거렸다.
나의 모친 세이른은 추위를 많이 타고 햇볕을 가려, 목과 어깨를 덮는 드레스를 주로 즐겨 입었다. 아카데미의 아이들 또한 멋 부린 드레스를 입어도 어깨를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허나 에른하르트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한 발렌티아 공작가의 사람들은 어깨와 윗가슴을 드러낸 드레스를 입은 이들이 많아 눈을 둘 곳을 찾기 어려웠다.
때문에 나는 요 사이 정원을 걷거나 연회장에 들어설 적에 사람들의 얼굴보다는 허리 아래를 보는 일이 잦았다.
이 모두 실내의 공기를 따스하게 데우는 마법 탓이었다. 까닭 없이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손님이 늘면서 외조부와 외숙부 내외의 얼굴을 보기 어려워졌다.
그들뿐만 아니라 나와 에른하르트의 혈족들도 매일매일 수십의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바빴다.
그중의 대부분은 모친의 혼인 전 인연들이었다. 때문에 나 또한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고 다녔다.
“세이른 언니! 아니, 이제 에른하르트 소백작 부인이죠! 어쩜, 너무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브라운 남작 부인. 이게 몇 년 만이에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제가 찾아가 뵈었어야 했는데, 사는 게 뭔지⋯. 아, 이쪽이?”
“네, 맞아요. 우리 장남, 미카엘 에른하르트.”
“반갑습니다, 부인.”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에른하르트 영식. 이렇게 보니 세이른 어릴 때랑 정말 똑 닮았네요!”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여인은 자신을 모친과 동년배인 방계 혈족이라고 소개하였다.
풍채가 좋은 여인의 옆에 그보다 더 풍채가 좋은 청년이 하나 서서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두툼한 얼굴선과 어울리지 않는 앳된 뺨을 올려다보자, 녀석이 얼른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빌 브라운이라고 합니다, 에른하르트 영식.”
“브라운 영식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우리 빌도 내년이면 아카데미에 입학할 나이가 된답니다. 검술부에 지원하기로 했어요. 에른하르트 영식이 한 해 선배인 만큼, 잘 부탁해요.”
“⋯음.”
나는 녀석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짙은 보라색 머리칼이 나의 외숙부를 꼭 닮았다.
나보다 훌쩍 키가 크고 어깨와 손이 두툼하고 넓은 것을 보고 훨씬 더 나이가 많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이제 갓 지학이 되는 아해라고 했다.
외가 식구들은 제 나이보다 더 성숙한 얼굴을 하는 것이 보통인가 싶었다.
찬찬히 살펴보고 있자니 자꾸만 익숙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기웃거렸다.
“⋯혹시, 어디에서 본 적이 있습니까?”
“엄청 뵙고 싶기는 했습니다! 존경합니다, 형님!”
“⋯예?”
내 물음은 내 생일에 찾아왔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기야 이런 인상의 소년이라면 잊을 리가 없었다.
빌 브라운이 지금 이 몸보다야 연상이지만, 내 모친이 그의 모친보다 윗선이라 하니 항렬로만 따지면 동생인 것이 맞았다.
나는 항렬이 높으면 나이에 무관하게 숙부님 고모님 부르는 것이 당연하던 세상에서 왔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녀석의 하는 모양새가 우스워 죽겠다며 난리를 부렸다.
수더분한 얼굴로 내 손을 덥석 잡아 위아래로 붕붕 흔드는 녀석을 보고 있다가, 이 녀석이 익숙한 기분이 드는 까닭을 뒤늦게 알아챘다.
나는 순간,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팽가냐?”
“예? 팽가요? 그게 뭔데요?”
“아니, 아니다. 아닙니다. 제가 잠시 착각을 하여.”
일전에 언젠가 검은 강을 건너 수영하는 놈의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일이 놀랍고도 이해할 수 없는 연에 이끌린 것이니, 다른 녀석들도 나처럼 새 몸을 입고 이 땅에 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말도 안 된다.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술렁이는 마음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남궁세가처럼 혈족의 피를 이어 크게 세력을 떨치는 다섯 개의 세가를 오대세가라고 불렀다.
남궁세가, 모용세가, 사천당가, 제갈세가, 그리고 하북팽가가 각 지역의 치안과 금력을 손에 쥐고 흔들었다.
개중에 하북팽가는 유난히 근골이 뛰어나고 신력이 대단하기로 소문이 난 가문이었다.
그러나 머리를 써야 할 일에도 힘을 쓰고, 힘을 쓰지 말아야 할 곳에도 힘을 써서 함께 나다닐 적에는 늘 골치가 아팠다.
항상 제 몸뚱이보다 거대한 도를 갖고 다니면서 그 도의 크기를 생각지 않고 어깨에 턱 짊어진 채로 이쪽을 본다 저쪽을 본다 수선을 부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때문에 그 뒤에 서 있던 황보 아무개가 도갑에 얻어맞아 싸움이 난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산적을 소탕한다고 산 정상에서 바윗돌을 굴리고, 수적을 잡는다고 달아나는 배를 뒤집어버리는 녀석이었다. 그 곁에만 있어도 골치 아픈 일이 돌이끼마냥 치덕치덕하게 달라붙었다.
의협심이 뛰어나고 순박하여 곁에 두었으나, 어울리기 쉬운 놈은 아니었다.
빌 녀석의 얼굴 생김새와 덩치가 중원의 팽가 놈과 꼭 닮아 있었다.
내심 시어런 땅에 아는 놈을 부르려면 제갈 놈이나 모용 놈이 오기를 바라고 있었기에 마뜩잖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무엇인 줄도 모르면서, 형님이 팽가를 원한다면 자신이 오늘부터 팽가가 되겠다며 너른 가슴팍을 퍽퍽 내리치는 빌을 올려다보았다.
주변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브라운 남작 부인이 얼른 녀석의 편을 들었다.
“원래 데뷔탕트에는 수도 무도회에 참가하는 것이 관례인데도, 빌 요 녀석이 에른하르트 영식을 보겠다고 하도 떼를 써서 발렌티아 무도회로 왔다니까요. 어휴, 이제 다 컸다고 못 이겨요.”
“어머, 그래요?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냥 윗동네에서 도는 소문이랑 다 비슷하죠. 에른하르트 영식이 다섯 살 적부터 연무장을 돌았다더라, 성격이 좋고 의협심이 강하더라, 머리칼도 속눈썹도 발렌티아 핑크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요. 엄청난 미인, 세기의 영웅이라고 소문 다 났어요.”
“발렌티아 핑크⋯.”
“아하하! 정말 오랜만에 언니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네요!”
내 모친이 당대에 유명하였다 하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낯선 소리에 얼이 빠졌다.
내가 지난해까지 우물 안 개구리 꼴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 옆에서 껄껄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고 있는 빌이 저 중에 어떤 이야기를 듣고 나를 기대하였을지가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가문의 어른들이 나와 빌이 함께 붙어 다니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신년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돌보는 아이들 사이에 빌을 끼워 넣었다.
녀석이 내게 형님, 형님 하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꼴을 못마땅해 하던 미하엘은 목마 몇 번에 홀라당 넘어갔다.
내 동생을 가져다가 제 것인 양 휘두르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 또한 목마는 잘 태워주지 않았느냐 묻자 아이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제 형보다 빌의 어깨가 넓고 높아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섭섭했지만 굳이 티내지 않았다.
노느라 힘을 잔뜩 뺀 미하엘과 아스델이 고단하여 잠을 자는 중이었다. 빌이 자꾸만 크고 우렁차게 웃음을 터트리는 통에 아이들의 잠을 깨울까 무서워 녀석을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마엘로 샌슨 역시 풍채가 좋긴 하지만 그 진중한 모습과 현명한 태도가 격조 있는 모습을 보였다. 빌은 그와 엇비슷한 늠름함을 지녔으나, 제 온 힘을 다 해 웃고 몸을 쓰는 편이었다.
이 녀석의 옆에 서 있으면 벤자민도 왜소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어깨 위로 퍽 하고 솥뚜껑 같은 손이 얹혔다.
“형님, 제가 다 들었습니다.”
“예? 무엇을.”
“벌써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를 바라보고 계신다지요.”
“⋯음.”
“제가 평생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경지가 어찌 되시기에?”
“아이, 말 편히 해 주세요! 예? 저희가 어디 남입니까?”
남이었다.
피가 이어져 있다고 하나 팔촌이 훌쩍 넘었다. 이 날 이때까지 얼굴 한 번 마주보지 못한 사이였는데, 겨우 하루 신명 나게 붙어 다녔다고 친한 체 어깨를 부벼오는 것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녀석을 바로 밀어내지 않은 것은 녀석의 그런 행태가 익숙한 탓이었다. 그나마 팽가 놈보다는 어려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잘 꾸미고 씻어 그런 것인지 체취가 독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웠다.
녀석이 귓가에 대고 큰 목소리로 쩌렁쩌렁하게 제 얘기를 늘어놓을 적마다 골이 울렸다.
녀석은 이제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라 하였다. 아직 오러를 깨우치지 못한 몸이지만 시간문제라며 으스댔다.
하긴, 저 몸을 하고 설익은 태도를 보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렷다. 살가운 개마냥 엉겨 붙어 오는 것을 그래그래 받아주었다.
나중에 대련을 하자 아카데미에서 함께 어울려 달라 떼쓰는 것을 오냐오냐 받아주고 치웠다.
* * *
새해 첫날.
사방이 금과 은으로 번쩍거리는 거대한 홀에는 산들 바람이 불었다. 그 따스한 훈풍에 실린 노랫가락이 흥겨웠다.
한낮부터 새벽까지 연거푸 춤을 추느라 힘들었던 한창때의 선남선녀들이 다정히 시선을 나누며 테라스에 기대어 고운 말을 속삭였다.
나 또한 가족 친지들과 같은 테라스에 나와 새해가 밝기를 기다렸다.
낮잠을 실컷 자 둔 덕분에 눈이 초롱초롱한 아이들이 저들끼리 우르르 모여 하늘을 보며 시간을 헤아렸다.
다들 멀쩡한 시계를 숨겨두고 까만 하늘의 별들 사이로 해가 솟기를 기다렸다.
시어런에 와서 겪은 어느 한 해보다, 올 한해가 바쁘고 기뻤던 것을 떠올렸다.
다음 해와 그다음 해, 그 다음다음 해가 떠오르는 때에도 이토록 벅차고 행복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손가락을 꼭 쥔 미하엘과 아스델의 조그마한 입이 큼지막하게 벌어졌다.
힉, 숨을 들이키는 아이들이 너무 어여뻐 양 팔로 어깨를 잡아 끌어당긴다.
멀찍이 완만한 동산 위로 발간 해가 제 모습을 선보였다.
여기저기서 기쁨에 겨운 수런거리는 소리와, 작은 하품 소리가 웅성거렸다.
그렇게 나는 열네 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