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오전이나 이른 아침에는 발렌티아 공작가의 연무장을 꾸준히 찾았으나, 한낮에는 사촌 형제들의 정을 더하기 위해 아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잦게 가졌다.
때문에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외사촌들과 함께 발렌티아 공작가의 곳곳을 구경하러 다니는 데 썼다.
발렌티아 공작가의 저택은 저택이라기보다는 성에 가까웠다. 무척 거대하여 내 걸음으로도 저택을 둘러보는 데에 하루로는 부족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아이젠과 헨델이 어릴 적에 가지고 놀았다는 장난감들이 가득 들어찬 방을 몇 개나 구경하기도 했고, 이전 세대 인물들의 초상을 구경하기도 했다.
너른 서재를 거닐다가 이전에 벤자민이 말한 적 있던 역사 속 21마리의 드래곤 완역판을 찾아내기도 했다.
아스델이 뛸 듯이 기뻐하여 책을 놓으려 하지 않았기에, 한나절은 서재에서 시간을 보냈다.
겨울에도 꽃을 틔운다는 온실 테라스에 앉아서 꽃잎의 수를 헤아리기도 했고, 흰 돌을 깎아 만든 물길 위에 종이로 접은 배를 띄우기도 했다.
아이들과 함께 숨바꼭질 따위의 장난을 치기도 했는데, 술래를 곯려주려고 천장에 붙었다가 금방 들켜 아이들 앞에서 위험한 짓을 한다며 크게 혼이 났다.
걷고 또 걷다가 지치면 응접실 벽난로 앞에서 체스를 하며 보냈다.
나는 오랜만에 잡는 기물이 반가워 흥이 났다.
지난 생, 마교가 발호하기 이전에는 장기를 자주 두었다.
나이 들어 체면을 잃지 않고 놀 수 있는 것은 바둑 아니면 장기 뿐이었는데, 바둑이란 놈은 몇 수를 앞서 보아야 하는 놀이라 내게는 맞지 않았던 탓이었다.
집을 짓고 지키는 것은 내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생에 어울리지 않는다 했더니, 정말 집 없는 놈은 서러워 살겠냐고 곡을 하던 개방 놈이 바둑은 제일 잘했다.
기보란 기보는 모조리 외우고 있는 제갈 놈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체스는 바둑보다는 장기와 닮았다.
다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간간이 아비의 상대를 한 적이 있어 어린 아해들을 상대로는 곧잘 승점을 따냈던 나였다. 허나 발렌티아 가의 차녀 헨델의 실력은 더 윗줄에 있었다.
몇 차례를 연이어 지고 나자 멋쩍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여 자연히 승부에 몰두하게 되었다.
“⋯장이오!”
“장?”
“아니, 체크메이트.”
“아, 정말이네. 이번엔 정말 몰랐어.”
다섯 판을 내리 지고 여섯 판째에 겨우 승점을 따낼 수 있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 신통방통한 수를 보여주던 헨델이 이렇게 뻔하게 움직이는 기물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어, 나를 봐준 것을 뒤늦게 알았다.
제 형이 이겼다고 좋아서 팔짝팔짝 뛰는 미하엘을 보기 민망하여 굳이 말을 꺼내진 않았다. 은은하게 웃고 있는 아이젠과 헨델을 보기가 멋쩍어 몇 차례나 헛기침을 했다.
모든 날이 평화로웠다.
* * *
하루에 일정 시간 이상은 초상화를 그리는 시간으로 묶여있었다.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는 일은 무척 지루한 일이기 때문에, 큰 홀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가의 귀를 신경 써야 하다 보니 하는 말 대부분은 뜻없이 가벼운 잡담이었다.
외숙모는 두 아이를 낳을 적에 모두 입덧이 심하여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다.
물만 먹어도 헛구역질을 하여 살이 쪽 빠졌다가, 겨우겨우 과일 중에 입에 댈 수 있는 것을 찾아 먹었다고 했다.
아이젠을 가졌을 적에는 포도를 그렇게 먹었고, 헨델을 가졌을 적에는 사과가 그렇게 입에 당겼다고 했다.
세이른은 나를 처음 가지고, 먹는 입덧을 하여 평소 먹지 않던 고기며 단 음식이 그렇게도 당겨 혼이 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이야기라 잠깐 웃고 말았다.
미하엘을 가졌을 적에도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었는데, 아스델을 가졌을 때에 처음 입덧을 겪었단다.
그 말을 들은 아스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나 때문에 엄마가 힘들었어?”
“아아니, 네가 아플까 봐 걱정했지. 이렇게 건강하게 태어나줘서 고마워, 우리 딸.”
“으응.”
눈치를 보던 화가의 조수가 쪼르르 달려와 세이른의 옷자락 주름을 다시 처음처럼 정리해 주었다.
아스델이 작게 조수에게 사과하는 모습이 귀여워 다들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 중에 미카엘이 가장 얌전하게 태어났지? 울지도 않고.”
“아, 그때.”
외조모가 처음 내가 태어나던 날의 이야기를 화두에 올렸다.
막 태어났을 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눈앞이 흐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정신이 늦게 돌아온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걱정되어 외가 식구들이 모조리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 찾아왔던 일을 이제야 알았다.
치료 아티팩트는 찢어진 살을 붙일 수는 있어도 죽은 것을 살릴 수는 없었다.
외조모는 내가 임신 중기부터 태동이 없어 온 가족이 걱정을 많이 했다며 고개를 잘게 저은 뒤 말을 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가 눈도 뜨지 않고, 입도 열지 않고. 손도 짝 펴고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네 외숙부가 네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까무러칠 뻔 했단다.”
“맞아, 그때 에른하르트 소백작이 아이 어깨를 흔드니까, 후 하고 한숨을 폭 쉬었지.”
“한숨 한 번 쉬더니 곧장 잠이 들어서 다들 얼마나 당황했다고.”
“저도 태어나느라 고단했던 게지.”
“우리 아이젠은 얼마나 우렁차게 울었다고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머쓱하기도 하고 아득하기도 해서 입을 꾹 닫았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 것 같기에 생각하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그때 와 계셨던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몰라야지! 태어난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더 놀랐을걸.”
“그런 말이 아니라⋯.”
“한 일주일은 더 있다 가려고 했는데, 네 어미가 몸을 추스르자마자 남편이랑만 있어도 충분하다며 우리를 내쫓아버렸단다. 갓 태어난 아이가 있는 집에 사람이 많으면 좋지 않다면서. 내 딸이지만 어쩜 이렇게 차가운지.”
나는 슬쩍 아비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윌리엄은 이 또한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입을 벙긋 열었다가 꾹 닫았다.
그 시절은 서로 어색하여 피하던 때였다. 세이른이 제 가족들에게 남편과 서먹했던 일을 알리지 않은 것이 빤히 보였다.
아비의 낯이 창백해지고, 어미의 낯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번갈아 보고 가벼이 웃고 말았다. 그들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었다.
세이른이 냉큼 다른 말을 꺼냈다.
“그래도 잠이라도 푹 잔 게 다행이에요. 미카엘은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뭐든 빨리 하고 싶어 했잖아요. 성격이 급해서 예민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어요.”
“⋯그랬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기는 대신에 두 발로 서고 싶어 해서, 넘어질까 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윌리엄이 세이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받았다.
“그렇다고 사고를 치는 일은 없었지만.”
“잘 때에도 꼭 통잠을 자고, 중간에 깨지도 않고.”
“나는 아이들은 다 안아주는 걸 귀찮아 하는 건가 싶었어요.”
“미카엘이 하도 그래서, 미하엘이 울 때에도 안아주지도 않고 옆에서 장난감만 흔들었잖아요. 우리 둘 다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몰라서.”
“정말, 그랬죠⋯.”
두 내외가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는 모습이 무척 흐뭇했다.
내 눈에만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다들 얼굴에 벙싯거리는 웃음을 매달고 있었다.
저들끼리 티격태격하던 부부가 얌전해지자 외숙모가 가세하여 외숙부에게도 저런 모습을 보이라 채근했다.
나는 내심 외숙부가 서늘한 인상에 걸맞게 차가운 성격을 지닌 무인이라고 여기고 있었기에, 외숙모에게 그런 채근을 듣는 모습을 어색하게 여겼다.
그러나 외숙부는 제 두 아이를 한 번씩 돌아보더니 툭, 이런 소리를 했다.
“그때 일들은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당신 걱정하느라 바빠서.”
“허.”
외숙모가 대답하기도 전에 내 입에서 놀란 소리가 샜다.
나는 내가 그런 소리를 낸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온 가족이 나를 바라보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황급히 민망이 배어난 낯을 가렸다.
웃음을 꾹 참는 얼굴을 한 화가 조수가 내게 쪼르르 다가와 자세를 고쳐주었다.
“아니, 왜 그렇게 놀라?”
“이번 건 저도 좀 놀랐어요. 아버지가 원래 남들 앞에서 이런 말 잘 안 하시는데⋯.”
“이모부 이기겠다고 칼을 가셨나 봐.”
“⋯.”
나는 흘금 외숙부를 바라보았다. 멀끔한 낯에 무안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외숙부가 사랑 없는 결혼을 하는 것은 너무 가여운 일이다 했던 말이 새삼스러운 말로 닿아왔다.
“⋯외숙부와 외숙모께서는 어디서 만나셨습니까?”
“무도회에서 처음 봤었지. 네 외숙부가 그때에 무척 유명했거든. 공작가 장남이지, 잘생겼지, 키 크지⋯. 발렌티아 영식이 무도회에 온다고 하면 온 사교계가 들썩들썩해서⋯. 도대체 얼마나 잘생겼는지 구경이나 해야겠다, 하고 찾아갔단다.”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아, 있어 봐요. 그런데 그때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누가 발렌티아 영식인지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내가⋯.”
외숙모는 이리저리 사람에 치여서 정작 구경하고자 한 발렌티아 영식은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며 깔깔 웃었다. 실망스러운 마음을 안고 산책을 나갔다가 판석에 구두굽이 걸려 어쩌지도 못하고 끙끙 앓는 것을 외숙부가 도와줬다는 설명이 장황하게 이어졌다.
그때엔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그저 부끄러워 고개만 꾸뻑 숙이고 달아났는데 나중에 외숙부가 먼저 아는 체를 하더니 구두 한 쌍을 선물해 주었다고 했다.
“그 구두를 받으면서 내가 그랬어. ‘저랑 결혼하고 싶으신 거 아니면 이러면 안 돼요.’”
“⋯외숙부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딱 한 마디 하더라고. ‘그래서 온 겁니다.’”
“⋯아.”
외숙모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외숙부는 말이 없었다.
난데없이 사람을 납치하여 짝지어놓고도 이들이 분명 사랑을 하겠거니 장담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는다 했다.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는 외숙모를 내려다보는 외숙부의 시선이 봄볕보다 따스했다. 목 안쪽이 간질거렸다.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는 나와 달리 두 외사촌이 허허 웃으며 저들끼리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지금껏 몇 차례나 들은 이야기라 귀에 인이 박혔다고 투덜거린 헨델이 혀를 찼다.
“구두굽 부러트리는 연습이나 해야겠다, 나도.”
“아니,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느라 정해진 시간이 훌쩍 넘도록 앉아 있다가 늦은 저녁을 먹었다.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흥미로워 밥맛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