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나는 칼립스 아그리젠트 교수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나 발렌티아 공작가와 다른 네 개의 공작 가문에 대한 것은 몇 차례의 시험을 통하여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그중에는 내 외사촌인 아이젠과 헨델에 대한 것도 당연히 있었다.
수업 시간에 배우기로는 아이젠 발렌티아는 공작 가문을 물려받기 위하여 열심히 정진하는 청년으로 제 아비를 꼭 닮아 성실하고 단단한 성정을 지녔다고 하였다. 또한 헨델 발렌티아는 정치보다 상계에 흥미가 있고 눈이 밝아 발렌티아 가의 자산을 모으는 데 큰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표면적인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았다. 대답하지 못 하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외숙부는 또다시 툭, 개울가에 물수제비 띄우듯 말을 던졌다.
“요즘 루베르 황자와 친근하게 지내고 있다지.”
“⋯예.”
어쩐지 뒷목이 서늘하였다.
물론 나는 루베르 황자와 어울리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다가오는 아이를 굳이 밀어내지도 않았다.
시어런 아카데미에도 눈과 귀가 있었다. 모든 아이들의 행실이나 태도가 제국귀족연감에 한 페이지를 예약해 두었기에 내 아비인 윌리엄 에른하르트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외숙부가 모르고 있을 것이라 여기진 않았다.
그러나 중히 생각지도 못했음이라. 에른하르트 소백작의 입에서 나온 말과 발렌티아 차기 공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게가 달랐다.
일전에 아비는 정쟁에 크게 관여할 생각은 없으나 에른하르트는 발렌티아와 뜻을 같이 할 것이라며 가벼운 대답을 했다.
반면에 외숙부는 어떠한가. 헨델의 이야기가 앞서 나온 까닭을 몰라 차분히 말을 아꼈다.
툭, 머리 위에 얹히는 큰 손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 내리는 외숙부의 손이 나를 해할 리는 없을 터였다.
표정을 정리하고 애써 목소리를 자아냈다.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돈이 가는 길을 보면 사람이 보이는 법이다.”
선문답 같은 말이었다.
중원에서부터 연장자와 대화를 할 적에는 늘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차분히 들을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한 외숙부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떼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넌 에른하르트의 이름을 이었지만, 발렌티아의 핏줄이지.”
“예.”
“근래 리차드 플로 시어런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
리차드는 루베르보다 세 살이 많았다.
이제 열아홉. 중원이었다면 후계위를 받아도 진즉에 받았을 나이니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암살 위협이 있었습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일전에 루실라 황녀에게 들었던 것이 있어 혹여 후계들끼리 정쟁을 벌이기 전에 주변인들을 하나둘 살해하는 일이 있었나 하여 걱정했다.
아직 그렇지 않다면 다행이었다.
외숙부는 잠시 생각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한 자리에 서서 할 이야기가 아닌 것을 알았기에 나 또한 걸음을 옮겼다.
주변에 인기척이 있다면 몰라볼 외숙부와 내가 아니었으나, 만약의 만약을 대비해야 했다.
“옐디더스 공작가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지?”
“강의 옐디더스라는 이름을 달고, 큰 강을 끼고 밀 농사와 무역을 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발렌티아와 많이 비슷하지?”
“⋯예.”
“다음 해 여름 즈음 리차드가 옐디더스의 장녀와 약혼식을 치를 예정이다. 웨슬리 키아드리스가 리차드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으니, 다섯 공작가 중에 두 공작가가 리차드의 손을 들어 준 셈이지.”
옐디더스와 발렌티아 공작가는 그 사이에 여러 백작가와 자작가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크게 보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둘 모두가 너른 평야를 지니고 있어 밀과 보리 등 시어런의 주식인 곡식을 생산하였다.
강을 가까이 끼고 있는 옐디더스가 율란과의 무역이 편리한 것을 이용해 중간에서 무역품의 가격에 장난을 치고 있다고 했다.
발렌티아 공작가가 대뜸 해로를 연구하게 된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플로이드 왕국이 작은 나라이고, 루베르의 외가인 안티네스 후작이 부유한 데다가 다섯 공작가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어 리차드에게 승산이 없다는 말을 쉐이든에게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중 두 공작가가 리차드의 편에 선 줄은 몰랐다.
시어런 아카데미가 아무리 우수하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기관임을 새삼 깨달았다. 현상을 보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해석된 것을 받아적는 데 급급했던 나였다.
사방이 고요한데, 마음이 시끄러웠다.
중원에서는 큰 땅덩이를 황제가 두루 살피는 것이 어려웠다. 가까이 닿는 것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탐관오리들뿐이었으니 관심을 가질 일도 없었다.
누가 황제가 되고 어찌 정쟁을 하고 하는 것을 몰라도 사는 데에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시어런 제국의 황위는 이후 반백 년은 나라에 큰 영향을 미칠 일이었다.
누가 정권을 쥐고 누가 힘을 얻고 하는 것들에 모든 귀족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찬찬히 살폈다.
나 또한 시어런의 귀족으로 태어났으니 야인이 될 것이 아니라면 신경 써야 할 일이다.
“외숙부께서는 어느 쪽이 더 황위에 맞다고 여기십니까?”
“더 황위에 걸맞은 이가 어느 쪽인지는 모르지.”
“⋯그러면?”
“다만, 이미 발렌티아는 루베르 황자를 지지하는 형상이 되었단다.”
“저 때문입니까?”
오스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혈족들을 황위 정쟁의 한가운데에 밀어 넣은 것이 아닌가 하여 입술을 단단히 물었다.
외숙부가 내 턱을 잡아 아래로 꾹 눌러, 입술을 깨무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헨델 때문이기도 하단다.”
“⋯누님이요?”
“리차드가 옐디더스 영애와 헨델 사이를 견주어 보며 신붓감을 고르고자 했거든. 나는 헨델이 황후가 되길 원하지 않았고.”
하기야, 시어런 제국에서 황후감을 고르자면 다섯 공작가를 먼저 염두에 두는 것이 당연했다.
또래의 여아가 있는 공작가가 단 둘이고, 그 세력이 비등하니 둘 사이를 견주어 보았으리라.
나는 헨델의 얼굴을 떠올렸다. 침착하고 차분한 성정의 아이는 현명하고 심지가 곧으니 황후가 된다고 하더라도 제 일을 잘 해냈을 것이었다.
내가 의아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외숙부가 쓴웃음을 흘렸다.
“그런 결혼을 하게 된다면 헨델이 너무 가엾잖니.”
“그래서 제 어머니도 필릭스에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마리앤이 제 사랑을 만났다 난리를 치지 않았더라면 이해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사랑이 한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드는지를 알고 있었다. 헨델 또한 이 땅의 다른 이들이 그런 것처럼 고운 사람을 만나 빛나기를 바랐다.
두어 차례 고개를 주억거리자, 외숙부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헨델이 리차드는 제 취향이 아니라더구나. 속이 빤히 보이는 남자가 좋다고 하던가.”
“⋯음.”
“그래서 다들 너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지.”
“저를⋯말입니까?”
내가 루베르 그 아이에게 무엇을 더 했던가. 막막한 기분이 들어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고 외숙부를 올려다보았다.
외숙부는 웃는 낯으로 내 머리칼을 다시 한번 흩어놓았다.
“나는 네가⋯. 웨슬리를 막아주기를 바라고 있단다.”
“웨슬리? ⋯웨슬리 키아드리스 말입니까?”
“그래. 지금 리차드 황자에게 붙어있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 웨슬리 키아드리스.”
“설명해주십시오.”
“현재 그림스베인 공작가는 정쟁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지. 위드로 공작은 키아드리스 공작과 사이가 틀어진 지 오래니 나와 함께 갈 테고.”
“⋯음.”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시어런 제국 천 년 역사에서 스무 명도 나오지 않은 귀한 전력이야. 소드 마스터는 왕왕 있었지만, 마엘로 샌슨과 웨슬리 키아드리스가 같은 시대를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네가⋯.”
“웨슬리와 같은 나이에, 아카데미에 입학했군요.”
“그래. 천재적인 행보지.”
솔직히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웨슬리 키아드리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나, 그 아이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지난 생에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는 데 사십 년을 꼬박 걸었던 나였다. 나의 경지는 무(武) 위에 얹힌 것이었고, 웨슬리의 경지는 무(無)에서부터 쌓아 올린 것이었다.
나보다 짧은 생을 더 화려하게 꽃피운 무인이었다. 천재라는 말은 그에게나 어울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마엘로 샌슨에게 의지하여 한 발 한 발 떼어 앞으로 나가는 내 길이 얼마나 대단할 수 있을까.
그 길에 내 목숨만 얹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목숨을 얹는 것이 두려웠다.
“⋯제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되지 못하면⋯.”
“리차드가 황위를 얻게 되겠지.”
“그럼 발렌티아 공작가는 큰 해를 입습니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리차드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달라질 테지.”
외숙부는 내내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가 그것까지 알고 루베르와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더구나.”
“⋯예, 그렇습니다.”
“네가 목숨을 아끼고 싶거든 크게 나서지 말거라. 그러나, 뜻을 펼치고 싶거든.”
“⋯.”
“속내를 감추는 법을 배우는 게 좋겠다.”
나는 그 말에 내 뺨에 손을 얹었다.
동경을 보는 습관이 들지 않아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루베르 그 아이가 내 생각만큼 순진하고 얌전한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속이 따가웠다.
쉐이든이 몇 번씩이나 조언하지 않았던가. 다른 귀족들이 나와 루베르가 어울리는 것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 이유는, 루베르가 황위를 위해 내게 잘해주는 것이라 추측하기 때문일 거라고.
그러나 마음 한켠으로는, 그 아이의 말간 웃음과, 발간 귓가와, 까맣고 깊은 눈을 믿고 있는 나를 알았다.
⋯또 한편으로는, 헨델과 혼담이 깨진 리차드보다는 역시 어여쁘게 굴고 저 예뻐해달라 고개를 들이미는 루베르가 더 나았다.
아이의 속내가 어찌 되었든 간에 이미 같은 배를 탔다면 꺼리고 피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편지를 쓰지 않았다.
루베르 그 아이에게 편지를 한 통 쓰겠다고 했더니, 외숙부는 가타부타 말없이 편지지를 내어주겠다 하고 내 어깨를 감쌌다.
단단하고 뜨거운 손이 일가를 이끄는 수장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