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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22)화 (122/176)

122.

외숙부인 오스카 발렌티아는 그 슬하에 일남 일녀를 두었다. 남아는 이제 스물두 살이고, 여아는 갓 스무 살이 되었다.

두 아이 모두 내가 무척 어릴 적부터 나를 귀여워하고 아꼈다. 그러나 그들이 아카데미에 입학할 무렵부터는 서로 바빠져 점차 왕래에 소홀해졌다.

그러니 몇 년을 건너 만난 아해들이 이전보다 훌쩍 큰 것은 당연했다.

두 아이 모두 외숙부의 잘생긴 얼굴을 빼다 박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친구 놈들의 자식이 장성한 모습을 보면 으레 그렇듯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그중에 남아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환하게 웃었다.

“너 진짜 많이 컸구나, 미카. 전에 봤을 땐 정말 요만했는데.”

“형님도 많이 헌앙해지신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으응⋯. 그 말투도 변함이 없구나. 반갑다. 그리웠어.”

그 옆에 서 있던 여아가 쿡쿡 숨죽여 웃었다.

남아의 이름은 아이젠 발렌티아였고, 여아의 이름은 헨델 발렌티아였다.

처음 아이들의 이름을 몇 차례 헷갈리며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나를 본 두 아이가, 우리는 한 핏줄이고 한 식구이니 편하게 형 누나 하고 부르라 일러 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어린아이들을 손위 형제처럼 대하는 일이 어색하여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차근히 생각해보면 나보다 어린 것들을 부모로 모시고 있는 일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추후에는 쉽게 형님, 누님 소리를 입에 올리게 되었다.

이제 성년이 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바빠 온 가족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오랜만이라는 외사촌들의 말을 전해 듣고 문득 궁금한 마음이 불쑥 일었다.

“그럼 두 분께서는 황궁에서 일하십니까?”

“아아, 아니. 나는 발렌티아 공작가를 물려받아야 하니까 아버지 일을 돕고 있어. 그리고 헨델은⋯.”

“요즘은 해상 무역에 대해 배우는 중이야. 선박 건조도 하고 있고⋯. 시간이 조금 더 여유로웠다면 이번에 새로 만든 배를 자랑할 수 있을 텐데.”

“선박을?”

“여기서 남쪽으로 열흘만 이동하면 데몬 항구라고 괜찮은 항이 하나 있거든. 동해로 통하면 그림스베인 공작가와 닿고, 남해를 돌아가면 인더스 만에 닿으니까 율란과 무역이 가능할 것 같아서. 이래저래 길을 찾는 중이야.”

욕심을 내어 사막에도 길을 트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율란 왕국과 맞닿은 만, 인더스 만을 지난 뒤로는 바다가 거칠고 큰 뻘이 있어 그 너머의 모습을 가늠할 수가 없다고 했다.

시어런 아카데미에서 몇 차례나 대륙 전도를 보았고, 각 가문들의 위치와 주력으로 삼는 물품 등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어 이해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시어런 제국은 바닷길을 사용한 무역이 활성화되지 않은 제국이었다.

동북에서 남서로 길게 잇는 사라스 강의 유량이 풍부하고 폭이 넓은데다가, 그 강의 끝이 오왕국의 최남단에 있는 율란에 닿아있는 덕분이었다.

잠시 의아한 마음이 들었으나 새로운 사업에는 외사촌들이 나보다 일가견이 있을 터였다. 하여 큰 걱정은 들지 않아 고개만 주억이고 말았다.

풍성한 식탁에 앉아 그보다 더 풍성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렇게 다들 모이니 참 좋다, 하고 말을 꺼낸 것은 외조모였다.

발렌티아 가 사람들은 대체로 말수가 적은 편이었는데, 그나마 외숙모와 외사촌 아이젠이 말재주가 있어 대화가 끊기지 않게 도왔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도 두 외사촌들이 여러 사교 행사에 끌려다니느라 가족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일이 허다했다 하기에 나 또한 그런 모습이 될 것을 미리 알았다.

아이젠이 후에 데뷔탕트에 착용할 보석들을 물려준다 하여 감사히 받기로 했다.

나와 아이들을 위해 이번 신년제에는 커다란 초콜릿 케이크를 준비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린아이들이 있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가, 나에게 기대의 눈빛을 보내는 혈육들을 보고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단 음식을 그리 많이 집어먹었던가?

주는 것을 사양하지는 않았지만, 눈앞에 없는데도 부러 찾아 먹은 일은 없었다.

그러나 주겠다는 것을 거절하는 것도 이상하여,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하고 곱게 대답했더니 다들 즐거워하였다. 민망한 것을 꾹 참았다.

신년제는 시어런에서 한 해의 마지막 날과 새해를 기념하는 잔치였다.

대개 어린아이들이 있는 집에서는 가족들끼리 보내고, 그렇지 않은 집에서는 여력이 닿는 대로 고위 귀족들의 신년제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들었다.

나는 이제껏 늘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서 큰 케이크와 포도즙을 탄 소다수를 마시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 일출을 함께 보았다.

동생들과 함께 졸린 눈을 부비며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것을 기대하고, 가족 간에 서로 올해에도 행복하자 담소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발렌티아 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렌티아 가는 공작가문이기 때문에 이 저택에서 신년제 행사를 크게 여는 것을 의무로 한다는 이야기를 이때 들어 알았다.

수도까지 올라갈 여력이 없는 인근 귀족들이 다 함께 모여 연회를 즐긴다는 말이었다.

가족끼리 오손도손 놀 줄 알고 찾아온 길이라 잠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난 이후로 이런 큰 행사에 참석한 일이 없던 모친이 들떠 손뼉을 치는 모습을 보고 아차 싶었다.

나 또한 기쁜 마음으로 신년제를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간간이 외숙부와 눈이 마주쳤다.

외숙부는 오늘도 길지 않은 보랏빛 머리를 반듯하게 빗어넘긴 채였다. 그 서늘한 눈매와 차림새가 잘 어우러져 차가운 인상을 더했다.

나의 외숙부, 오스카 발렌티아는 화경은 아니어도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었다.

외숙부는 제 자식들이 모두 검에 뜻이 없어 크게 아쉬워했다. 때문에 뒤늦게 태어난 내가 검을 쥐는 것을 무척 반겼다.

일이 바빠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 직접 오는 일이 많지 않았지만, 이삼 년에 한 번씩 마주할 일이 생길 때마다 내 몸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다섯 살 생일에 외조부모에게 선물로 받았던 제국기사단식 방패와 철검 또한 외숙부가 주문 제작하여 전해 준 것이었다.

나중에 이런 이야기를 들어 알게 된 내가 외숙부를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며 화경의 고수를 보아 소홀하긴 하였으나, 나와 가까운 이들 중에는 상당히 윗줄에 있는 고수였다.

당장에라도 말을 걸어올 것 같던 외숙부가 시선을 돌렸다.

나를 만나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는 외조부와 외조모에게 대화할 시간을 양보하려는 다정한 마음을 알아 웃음이 나왔다.

* * *

과연 다음 날 새벽 연무장에는 나보다 외숙부가 먼저 자리해 있었다.

내 방 문 앞에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을 일러줄 수 있는 경비를 세워 둔 것도 외숙부였다. 다정히 이러이러해라 말하는 법이 없어도 생각이 깊고 바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외숙부는 가타부타 하는 말 없이 검을 빼내어 내게 겨누었다. 나 또한 검을 들었다.

내가 먼저 검을 휘두를 시간을 주는 것은 연장자이자 고수의 여유일 터였다.

외숙부와 검을 맞댄 것이 벌써 삼 년 전의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뼈와 근육이 조금은 더 자라고 여물었다.

맞댄 검에서 카랑카랑한 소리가 울렸다. 반 보 뒤로 물러난 외숙부의 눈에 스치는 희열이 읽혔다.

그는 숙련된 무인이었다. 절도 있는 검을 사용했다. 시어런 제국검법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직선적인 검이었다. 강인한 팔 힘으로 빚어내는 뻔한 검로를 읽고서도 막아낼 수 없게 만드는 것을 잘했다.

그러나 나 또한 숙련된 무인이었다. 팔과 다리가 짧고 힘이 약하여 외숙부의 검을 대할 때마다 버겁기는 하였으되, 좀 더 빠르고 좀 더 변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으로 상쇄할 수 있었다.

또한 이번에 아카데미에서 여러 검술을 눈에 익히고 배우게 되어, 외숙부의 검이 가진 특징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전과 달리 서로의 검이 부딪히는 일에 물러남이 없는 것을 쉽게 알아챈 외숙부가 입꼬리에 웃음을 달았다.

나를 시험하고자 검기를 보이는 것을 알았기에, 나 또한 검기를 실어 대응했다.

외숙부의 것에 비하면 모자란, 미약하고 흐린 기운이었으나 내 검이 부러지지 않도록 지키는 데엔 충분했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숨 한 번 몰아쉬지 않고 몇 합을 빠르게 주고받았다.

그렇게 일각쯤 흘렀을까.

외숙부가 문득 검을 거두며 훌쩍 옆으로 몸을 돌려 피했다. 나 또한 그 팔을 노리고 뻗었던 검을 천천히 거두며 멈춰 섰다.

인자하게 웃는 낯을 한 외숙부의 표정을 보고, 그가 충분히 만족한 것을 알았다.

이전에 비해 그의 경지를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나 또한 만족스러워 빙긋 웃었다.

“많이 늘었구나.”

“예. 좋은 스승을 얻게 되어서.”

“바쁘지 않다면 좀 걸을까.”

외숙부는 검을 갈무리하여 허리춤에 매달았다. 나 또한 기꺼이 그의 곁을 따라 걸었다.

기실, 나는 내심 아비인 윌리엄 에른하르트보다 외숙부인 오스카를 더 가까이 여겨 편히 대하고 있었다.

내가 무인인 탓이다. 전생에 친아비를 두고 검을 익힌 숙부 숙모와 어울려 어린 시절을 보내며 그들을 가족이라 부른 탓이었다.

내가 뻗는 검을 이해하고, 내 속을 들여다보면서, 나와 혈연이 이어진 상대였다. 자주 뵙지 못한 대 남궁의 가주나 직계손을 볼 때에 느끼던 위엄과 자애가 외숙부의 각진 어깨 위에 얹혀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서늘하게 식히는 새벽이었다.

차분한 걸음에 소리가 없었다. 말없이 걷는 외숙부의 곁에서 나란히 걸었다.

이렇게 단단하고 서늘하게 생긴 사내가 내 양친에게 그렇게 짓궂은 짓을 벌였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하긴 세이른이 말하는 제 오라비는 과묵하고 다정하고, 간지러운 짓을 잘 하는 사내라고 했다.

나는 사람이 나이가 들면 벼처럼 익어야 한다고 믿었다. 외숙부 또한 젊고 뜨거운 시절을 지나 지금의 묵묵함을 지니게 되었을 테지,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헨델이 황궁에서 일하는 것을 막은 이유를 알고 있니.”

⋯금시초문이었다. 나는 긴장하여 허리를 곧게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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