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나의 외가인 발렌티아 공작가는 에른하르트 백작가보다 더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수도에서 동남쪽으로 마차를 타고 일주일가량 이동하면 에른하르트 백작가의 영지에 닿고, 거기에서 꼬박 열흘을 더 이동해야 발렌티아 공작가에 닿는 식이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인사할 시간도 없이 서두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겨우 두 달의 방학 기간 중에 거진 한 달을 꼬박 이동에만 사용하게 되어 마음이 조급했었다.
그래도 마차에 타고 나니 걱정되던 마음이 새벽이슬에 젖은 모닥불마냥 희게 사그라들었다.
몸만 덜렁 마차에 싣고 난 뒤, 이틀 즈음은 자고 깨는 일을 반복했다.
내가 마차 밖으로 얼굴을 비추지 않자 기사들이 한참 걱정을 했다. 시험 기간 동안 잠을 설친 것이 어린 몸에 무리가 되었던 모양이라며 별일이 아니다 하고 달래 두었다.
찬찬히 생각해보니 내가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나온 것은 루베르 일 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지난 학기 매주 화요일마다 더글라스의 교수실에 방문하여 메이지 볼더와 더불어 이런저런 실험을 했다.
창궁대연신공을 업그레이드한다는 명목으로 시험된 일이었으나, 아직은 발전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창궁대연신공을 시어런 식으로 해석하는 일이 주가 되었다.
11월 말까지 골렘에게 운기조식을 시켜두고 그 상태에 대한 것들만 확인하기로 하여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시험공부를 핑계 삼아 저번 주와 이번 주에는 더글라스와 볼더 두 사람 다 보지 않았다.
2주 전까지도 골렘에게 단전이 생성되지 않았으니 지금 와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테지만, 그 상태를 보고 새로운 골렘에게 몇 가지 테스트를 하는 것을 도와주어야 했을 터였다.
모든 시험이 다 끝난 뒤 찾아보기로 한 것을 잊고 나와버리고 말았다. 볼더의 실험이 미뤄지는 일보다 더글라스에게 인사를 못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에 와서 돌아가는 일도 막막하고 어려운 일이다. 방학이 끝나고 아카데미로 돌아가서 더글라스에게 사죄의 의미로 선물이라도 들려주어야겠다 생각했다.
루베르에서 더글라스로 옮아 간 생각 때문인지 다른 아이들의 안부도 궁금했다.
시험 기간에 종종 마주한 데미안은 여전히 잦게 악몽을 꾼다고 했는데 성적이 어찌 나왔을지가 궁금했다.
쉐이든은 이번에도 사교활동 탓에 수도에 남게 된다고 했으니, 그가 잘 챙겨 줄 것을 알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시험에 혹 도움이 될까 싶어서 2학년 학술부인 레일라 세르벨을 제니에게 소개해 준 일도 궁금했다.
그냥 한 번 얘기나 해 보아라 말을 트게 했을 뿐이지만, 제니가 좋은 아이고 레일라 또한 그 성정이 나쁘지 않으니 둘이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 다들 제 앞가림은 잘 할 아이들이다.
마차에 덩그마니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 지루해져서 말을 청해 밖으로 나왔다. 아카데미를 떠난 지 나흘째의 일이었다.
장난스러운 얼굴을 한 기사들 중 일부는 야유를 하고, 일부는 신이 나 있었다.
어리둥절하여 멀뚱히 보니 젊은 기사 하나가 제 말을 끌어 내 옆을 달리며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 딱 하루만 더 버티시지 그랬어요.”
“왜?”
“저희끼리 내기를 해서요. 큰 도련님이 닷새는 쉬고 나오실 거다, 아니다 당장 나올 거다 하고.”
“우스운 짓을.”
그제야 사정을 알게 되어 크게 웃었다.
내기에 이긴 기사에게 개평이랍시고 땅콩 주머니를 받았다.
주전부리를 씹으며 말을 몰았다. 빈 마차가 달그락달그락 뒤쫓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수확이 끝난 들을 보았다. 울긋불긋 단풍으로 갈아입은 산과 언덕도 보았다. 큰 강을 한 번 건넜고, 다리 없는 개울을 빙 둘러 돌았다.
땅콩과 초콜렛 따위를 간식으로 먹었다. 어둑한 밤에는 꼭 따뜻한 숙소를 찾아 잠을 청했으나,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늦은 밤까지 말을 탔다.
내가 서두르는 이유를 아는 기사들 중 어느 누구도 나를 말리는 일이 없었다.
밤에도 나를 지키기 위하여 돌아가며 번을 서는 기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낮에는 지난 밤 번을 선 기사들은 마차에서 잠을 청하라 명했다.
처음에는 사양하던 그들도 내가 그들만 한 기사로 자라났으니 더 훌륭하게 대처할 수 있다 호기롭게 말하자 웃으며 수긍했다.
기사들이 이런저런 말을 붙여 와 지루할 틈이 없는 여행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미하엘이 얼마나 귀엽게 굴었는지, 아스델이 어떤 놀이를 발견했는지, 아이들이 애완동물을 기르고 싶어 떼를 쓰는데 고양이를 기를지 강아지를 기를지 정하지 못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모두 흥미진진했다.
나는 아카데미에서 배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검술에 큰 진전을 보이고 있고, 합격술을 배웠고, 이제 비도술도 어느 정도 할 줄 알게 되었다 하는 이야기였다.
특히나 이번 학기에 새로이 배운 비도술은 내가 예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것으로, 기말고사 시험으로 교수에게 단검을 던졌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가 재미있게 들었다.
“이렇게 얘기만 들으면 참 재미있어 보이는데 말이죠⋯.”
“움직이면서 단검을 던진다니, 정말 별걸 다 배우네요.”
아무래도 장검과 방패를 사용하는 에른하르트의 기사들에게는 낯선 모양이었다.
직접 하는 것을 보고 싶다 하여 말이 쉬는 동안 단검을 던지는 법을 보여주었더니 다들 따라하며 즐거워했다. 몇은 생각지도 못하게 솜씨가 좋았고, 몇은 나보다도 못했다.
오랜만에 단검을 잡아 흥이 난 내가 다시 출발하는 것을 아쉬워하자, 기사들 중 하나가 물었다.
“혹시 도련님, 말 위에서도 단검을 던질 수 있습니까?”
“⋯음?”
듣고 나니 궁금한 마음이 들어 가는 길에 연습하겠다 했더니, 등 뒤에서 날아오는 칼을 맞고 싶지 않다며 기사들이 나를 제일 앞에 세웠다.
과연 옳은 말이라 여겨 제일 앞장서서 말을 달리며 단검을 여기저기 던져 보았다. 거의 삼분지 이는 바닥에 떨어졌다.
그래도 한 학기 동안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한 것이 택도 없이 우스운 꼴이었다.
발렌티아 공작가에 가는 길 내내 말 위에서 단검 던지는 연습을 했다. 기사들이 내 뒤로 말을 달리며 떨어지거나 근처 나무에 꽂힌 단검을 주워다가 전해주었다.
처음 말 위에서 단검을 던질 수 있느냐 물었던 기사가 다른 기사들에게 네 덕에 괜한 일이 늘었다며 장난 섞인 꾸중을 받는 것을 보았다.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 * *
달리는 중간에 누가 더 빠르게 말을 모나 기사들과 내기도 하고, 몸이 찌뿌둥하여 기사들에게 내 말을 맡긴 뒤 말과 엇비슷한 속도를 내어 달리기도 했다.
아무리 제가 모시는 도련님이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어도, 나처럼 어린 아해가 두 발로 뛰어가는데 말을 타고 가기엔 눈치가 보인다며 젊은 기사 둘이 나와 함께 뛰었다.
하루 내내 숨이 턱에 닿도록 달음박질한 녀석들이 몸살이 나서 마차에 드러누운 것을 보고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경공을 사용하는 나와 생짜 몸에 오러만 두르고 내달리는 기사들이 어찌 같을까.
내 창궁대연신공을 기사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주진 않을 테지만, 볼더의 연구가 끝날 무렵에는 기사들에게 맞는 경신법(*경공과 보법, 몸을 가볍게 하여 신속히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무공)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터였다.
몸에 단전을 만드는 것이 아니더라도 내공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시어런의 인물들에게도 점혈(*혈도를 짚어 적을 공격, 고문, 무력화하는 기술의 총칭)이 통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점혈법과 경신법 정도라도 전해줄 수 있다면 큰 득이 되리라.
다음 학기에는 볼더에게 좀 더 상냥하게 대해주어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어쨌든 이래저래 서두른 덕분에 발렌티아 공작가의 저택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예정보다 나흘이나 이른 한낮이었다.
공작가 정문이 멀찍이 보일 때부터 기사들이 만세를 불러대는 모습이 우스웠다.
“제가 먼저 가서 도련님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겠습니다.”
“뭐,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큰 도련님도 얼른 가족분들을 뵙고 싶으실 거잖아요.”
“⋯음. 그래.”
호탕한 웃음소리를 필두로 마치 쏘아낸 활처럼 말을 달리는 기사의 뒷모습을 보며 나 또한 웃음을 참지 않았다. 서두르던 것을 그치고 차분히 말을 몰았다.
커다란 정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 멀리 보였다.
말발굽 다각이는 소리에 맞추어 내 가슴께에서 기분 좋은 고동이 울렸다.
공작가 정문으로 들어서자 집사가 나를 맞이하며 분수가 있는 정원으로 인도했다.
발렌티아 공작가의 정원은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서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꽃이 필 계절이 아님에도 익숙한 분홍 꽃이 군데군데 놓인 화병마다 소담하게 꽂혀있었다.
“미카!”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한 가족들이 둥그런 테이블에 모여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겼다.
내 품에 와다다 뛰어드는 미하엘을 번쩍 안아들어 한 팔에 얹고 어른들에게 먼저 인사했다.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의 식구들뿐 아니라 외조부와 외조모, 외숙부에 외사촌들까지 모두 자리해 있었다.
내 생일이 아니면 쉬이 보기 어렵던 이들인 것은 로건 세르벨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피로 이어진 탓인지 보다 가깝게 여겨졌다.
발렌티아 공작가의 식구들은 내 어미를 빼고는 대부분이 짙은 보라색 머리칼을 갖고 있었다.
외조모는 젊을 적에 금빛 머리를 하였다고 했으나, 지금은 희게 샌 머리를 곱게 빗어 틀어 올리고 있는 모습이 잘 어울렸다.
인사를 위해 도로 내려놓은 미하엘이 내 허벅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그 채로 외조부모의 포옹을 한 번씩 받고, 날 반겨주는 외사촌들과 한 차례씩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내 뺨에 제 뺨을 부딪혔다 떼어내는 어미의 인사까지도 기쁘게 받았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아가.”
“조부모님을 뵈러 오는 길이니 조금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수도에서 여기까지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몰랐는데, 시험이 일찍 끝났나 봐.”
감탄하는 소리에 굳이 내가 열심히 달려왔다 뽐내거나 내세우지 않고 웃음으로 넘겼다.
후에 기사들이 보고하는 것을 들으면 내가 서두른 것을 모두 알게 되겠지만, 굳이 가족들이 그리워 서둘렀다는 말을 내 입으로 말하는 것이 객쩍었다.
자리에 앉아 돌아보니 이제 예법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던 막내 아스델이 새침한 표정으로 앉아 내 인사를 기다리기에, 그 작은 몸을 꼭 안아주었다. 단풍잎 같은 손이 내 어깨를 다정히 감쌌다.
어서 앉아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들어라, 그간 있던 이야기를 듣자 하고 수선을 부리는 혈육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