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20)화 (120/176)

120.

남은 시월은 크게 특별한 일이 없었다.

칼립스 아그리젠트는 나날이 낯빛이 좋아져 더 이상 걱정할 일이 없었다.

비반 오티프는 말과 함께 야외 활동을 할 때 주의해야 할 독초들 따위에 대해 강연했다.

비도술 수업에서는 올리버 컴바인이 까닭 없이 내 눈을 몇 차례 피했으나 신경 쓰이지 않아 그대로 두었다.

데미안은 아직도 다리를 절었다.

투명한 골렘은 여전히 단전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루베르는 여전히 다른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나를 쫓아다녔다.

벤자민은 아카데미 관리 부서에 문의하여 말 빅토르를 받아 올 방법을 구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넷째 주 금요일, 가족들에게 재미있는 편지를 받았다.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발렌티아 공작가로 오는 것이 어떻겠냐는 내용이었다.

내 의향을 묻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으나 이미 외조부모와 합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영지 밖을 나가는 것을 경기하듯 싫어한 탓에 혼인 후에 처음으로 찾는 외가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외가 식구들이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 온 일은 많았으나 그 반대의 일은 없었다.

초상화는 어떤 옷을 입고 그리자, 어미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정원을 보여 주고 싶다 하여 한껏 들뜬 것이 편지에서 고스란히 읽혔다.

저번 여름 방학 때 양 뺨을 붉히며 소녀처럼 기뻐하던 어미의 낯을 떠올리면 거절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기쁜 마음으로 답장을 적었다.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라 온 땅이 나 역시 무척 궁금하고, 혈족들과 함께 할 시간이 기대된다, 외조부모와 외숙부의 얼굴을 오랜만에 뵙고 싶다 하고 단 소리를 잔뜩 적어 넣었다.

외가에는 외숙부 아래로 이미 손주가 몇이 있는데도, 외조부모는 나를 유독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

웃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당연해서 겉치레로 쓰는 말이 아니라, 모조리 진심이었다.

발렌티아 공작가에는 인근에 제4 마탑이 있으니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 분명했다. 벌써 방학을 기다리게 되었다.

* * *

11월. 달이 바뀌면서 날도 바쁘게 추워졌다.

종종걸음으로 나다니는 아이들의 목에 색색의 목도리나 숄 따위가 등장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벤자민과 나를 포함한 강건한 신체를 자랑하는 몇몇 검술부의 학생들이나 가을과 같은 차림을 하고 다녔다.

색이 통일된 교복과 달리 그 위에 걸치는 망토나 숄은 아이들마다 색도 다르고 새겨 넣은 자수도 달라 알록달록한 것이 보기 좋았다.

쉐이든은 짙은 갈색의 가죽 망토를 걸치고 나타났는데, 그 등짝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면 그대로 자국이 남는 탓에 많은 아해들이 쉐이든의 등을 낙서판으로 썼다.

루베르는 저와 잘 어울리는 짙은 남색의 반들반들한 망토를 두르고 다녔다.

목덜미 주위로 복슬복슬한 흰 털이 붙은 것이 어여뻐 물어보았더니 흰 토끼털을 가져다가 붙인 것이라 설명해 주었다.

보들보들한 것이 아이와 꼭 잘 어울려 칭찬해 주었더니 아이가 크게 기뻐하였다.

마리앤은 연한 분홍빛의 두툼한 망토를 두르고도 이를 딱딱 부딪치며 떨어 대는 것이 예사였다.

보온 마법을 걸지 않느냐 물었더니, 마법 술식을 새겨 아티팩트를 만드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소모되는 마석의 값을 꼬박꼬박 충당하기 어려워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제니는 아주 멋들어진, 꼼꼼하게 색색의 자수가 놓인 흰 망토를 두르고 와서 자랑을 했는데, 제 어미가 재주를 부려 직접 놓아 준 자수라고 했다.

재잘대는 아이의 양 뺨이 상기되어 있는 것이 무척 귀여웠다.

그러나 서로의 꾸밈새를 보고 밝게 웃는 것은 월초의 일이었다.

기말고사의 달을 맞이하여 모두 부쩍 바빠졌다.

이번 달에는 마엘로 샌슨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를 담아 각자 자신이 가장 장기로 삼는 검법 하나를 선보이는 시간을 갖겠다고 하여 나 또한 마음이 바빴다.

내년에 마엘로 샌슨의 중급 검술 수업을 들을 수 있을지의 여부를 해당 검술 발표회에서 정하겠다는 말에 많은 아이들이 매 수업 시간 악 소리 나도록 열심히 굴렀다.

이미 고급 검술 수업을 듣고 있는 나와는 큰 상관이 없었지만, 주변 아이들이 모두 열심인데 혼자 설렁설렁 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성실하고 착한 동기들에게 검술을 시연하며 깨달음을 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내가 전생부터 따져 보면 거진 오십 년 가까이 검을 갈고닦았는데, 이런 아이들 앞에서 내세울 검법 하나 없다면 말이 되지 않았다.

구상 중인 검식은 아직 미흡하여 보여 주기 저어하여, 틈이 날 적마다 창천무애검법 중에 가장 멋들어진 것을 골라 선보였다.

아티팩트 수업에서는 실용 아티팩트에 대한 것과 아티팩트 구입법에 대한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이것이야말로 전부 외워서 보는 시험이라 큰 걱정이 없었다.

다만 중간고사에서는 외워야 하는 공격 아티팩트와 의료 아티팩트의 이름과 효과가 직관적이라 편했으나, 실용 아티팩트들은 이름과 효과가 제각기 달라 헷갈리는 일이 잦았다.

제국의 계보 수업이야 언제나처럼 쪽지 시험으로 갈음하였다. 지난 학기에 배운 것이 이번 학기에는 달라진 일이 많아 헷갈리는 터라 주의를 기울여야 했으나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교수들이 시험 범위를 고지하는 첫 주가 지나자 아카데미 도서관의 모든 자리가 꽉 들어차 여유가 없었다.

물론 개인 서재에서 공부를 할 수도 있겠으나, 내가 미흡한 점이 많아 동무들에게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며 공부를 하려면 일찍 나와 도서관의 자리를 맡아 두어야 했다.

명마 예찬론 수업은 좀 달랐다.

십일월 둘째 주 수요일 오후, 비반 오티프 교수는 아이들에게 네모난 딱지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선명하게 쓰여 있는 글자를 읽었다. 말 구매 학생 우대 쿠폰, 20% 할인.

이게 무엇인가 싶어 앞뒤로 들춰 살펴보자 오티프 마사회의 도장이 크게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게, 뭡니까?”

“말 구매 우대 쿠폰이지, 뭐야. 이제 말 타는 법이랑 말을 관리하는 법을 다 배웠으니 말을 구매하는 법도 배워야지.”

비반 오티프는 여기 이 아카데미 내에 있는 말들은 전부 좋은 품종의 말을 잘 교육해 둔 것들이라 아이들의 보는 눈이 무척 높아졌을 것이라 단언하였다.

아이들의 서툰 손에도 사고 한 번 내는 일 없이 아이들을 이끈 말들이었다.

성품도 자질도 대단하고 똑똑한 녀석들만 보아 시어런의 말이 모두 다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이 쿠폰은 향후 5년간은 사용 가능해. 미리 나한테 연락하면 그때에도 말 보는 걸 도와줄 거고. 하지만, 말은 정말 오래 사는 동물이잖아. 평생을 함께할 친구를 만난다고 생각하고 직접 찾아다니는 재미가 또 각별하거든.”

“허어⋯.”

“세상에 나쁜 말은 없어. 주인과 잘 맞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이 있을 뿐이지. 난 너희가 직접 다양한 말들을 보면서 그런 것을 배웠으면 해.”

비반 오티프는 앞으로 학기가 끝나기 전까지, 수업 시간마다 아이들과 함께 야외 수업 명목으로 말을 보러 나가겠다고 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에는 개인 말을 갖출 필요가 없으니 지금 미리 구매할 필요는 없지만, 최대한 많은 말을 접해 보는 것이 좋다는 설명에 모두가 환호하였다.

시어런의 마시장은 중원의 것보다 말끔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중원과 시어런의 사람은 서로 생김새가 무척 달랐으나 어쩐 일인지 말의 생김새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짐말로는 몸이 두툼하고 덩치가 큰 놈을 쓰고 먼 여행에는 사납게 생긴 군마를 썼다. 생김새별로 모아 놓은 말들을 구경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마실 나온 기분으로 휘 둘러보았다.

털에 윤기가 반드르르한 녀석들은 모두 개성이 강했다. 낯선 사람이 궁금해 기웃거리기도 하고, 저 먹을 것에 바빠 돌아보지도 않기도 하고, 긴장한 아이에게 고개를 불쑥 들이밀어 놀라게 하는 일을 즐기기도 했다.

아카데미 소유의 말인 빅토르를 살 방법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벤자민 역시 솔깃한 모양이었다.

이번 기회에 어린 망아지를 구해 직접 돌보며 기르고 싶다고 했다가, 역시 아카데미를 서둘러 졸업한 뒤에 말을 구해야겠다 하는 식으로 짧은 사이에 열 번도 더 마음이 바뀌었다.

비반 오티프는 다음 수업 시간에도 기회가 있을 테니 찬찬히 살펴보라 아이를 어르며 수업을 마쳤다.

비도술 수업은 명마 예찬론보다도 더 유별났다.

윌턴 로버츠는 자신을 과녁으로 삼아 비도를 던지라며 20미터 과녁 앞에 섰다.

모두가 당황하여 움직이지 못했다. 윌턴은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정 없는 말투로 혀를 차며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내가 기말고사에서는 움직이는 과녁을 향해 단검을 잘 던질 수 있을지 테스트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 그, 그렇지만.”

“비도술은 호신을 위한 무술이야. 결정적인 순간에 생명을 해치는 것이 두려워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지? 지금껏 여러분을 가르친 내 시간을 아깝게 만들지 마.”

그리하여 움직이지 않는 과녁을 노리고 비도술을 연습한 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 1번부터 세 번씩 단검을 던지게 되었다.

처음 두 아이는 머뭇거렸으나 세 번째 아이부터는 주저하는 일이 없었다.

단검을 어디로 어떻게 던지더라도 윌턴이 모조리 다 받아 낸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된 탓이었다.

어떤 아이가 긴장한 탓에 완전히 어긋난 방향으로 단검을 날렸을 때에도, 윌턴은 훌쩍 뛰어올라 단검을 낚아챘다.

그 모습이 사냥감을 낚아채는 매처럼 날카롭고 우아하여 눈이 번쩍 뜨였다.

시어런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허투루 행동할 리 없는 것을 괜한 걱정을 했다.

윌턴 로버츠는 자신의 눈, 목, 심장을 노려 단검을 던질 것을 주문했다.

기말고사 역시 얼마나 약점에 가깝게 공격할 수 있는지를 점수로 매긴다고 했다.

곡예단도 이런 식으로 굴지는 않을 터인데, 참 대단한 사람이다 싶었다.

시험공부를 하고, 말을 보러 가고, 시험공부를 하고, 단검을 던지고, 시험공부를 하고, 검식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시험공부를 했다.

그동안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먹었는지는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시험이 있는 달이 늘 그렇듯 한 달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발렌티아 가로 향하는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하루하루를 무척 바쁘게 보냈다는 자각은 있었다. 시험이 끝나는 일정에 맞추어 양친이 마차를 보낼 것도 알고 있었다.

발렌티아 공작가로 곧장 향하는 탓에 쉐이든과 일정을 맞출 필요가 없고, 이미 필요한 것은 다 준비되어 있다 하여 짐을 쌀 필요도 없으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마차에 올라타서 반나절을 이동한 뒤에 아차 싶었다. 루베르 그 아이가 방학이 시작하기 전에 얼굴 한번 보자 그렇게 절절히 굴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축축한 까만 눈을 떠올리니 어쩐지 미안하고 멋쩍어 목덜미가 뜨끈했다.

외가에 도착하면 루베르에게 편지라도 한 통 써서 보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미안한 마음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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