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나는 아이에게 다시 검을 뻗게 하고, 조금 전에 부딪쳤던 그 지점에 내 검을 가져다 대어 몸을 튕기는 시늉을 다시 해 보였다.
내 설명을 이해한 벤자민이 감탄한 낯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이 힘을 제 검으로 받아 몸을 띄웠습니다. 클라우디안 영식의 힘이 대단한 것을 미리 알고 대응한 덕분에 여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고. 다만 공중에서 몸을 돌릴 적에는 이렇게⋯.”
제자리에서 훌쩍 뛰어, 다리를 휘둘러 공중에서 몸의 중심을 잡는 시범을 보였다. 벤자민이 유심히 보더니 곧장 나를 따라 했다.
검술 수련을 할 때 입는 훈련복은 그 옷자락이 방해되지 않게 짤막하여 어지간한 움직임으로는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와 벤자민 모두 바람을 앞지르는 속도를 내는 무인이었다. 파라락 옷자락 휘둘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벤자민이 어설프게나마 그 묘리를 제대로 깨달은 것을 알아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예, 맞습니다. 여기 배꼽을 축으로 다리를 돌려 힘의 방향을 아래로 두었습니다.”
“⋯이거 재미있네요. 혹시, 전에 그 무한보를 변형한⋯?”
“예.”
내가 가지고 있는 보법에 기반을 둔 움직임인 것을 알아챈 것이 흐뭇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해 보자며 몸을 뒤로 물리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열중하여 몇 번을 더 검을 주고받은 후에는 땀에 흠씬 젖었다.
온몸의 기운을 다 쏟아내는 대련만큼 개운한 것이 또 없었다. 얕게 헐떡이며 손등으로 뺨의 땀을 닦아 내는데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우뚝 선 검술부 아해들이 모조리 저들 하는 것을 멈추고 이켠을 보고 있었다.
의아한 것은 아주 잠시였다.
다들 삼류에서 이류의 실력을 지닌 검수들이, 바로 옆에서 일류무인의 대련을 보는데 시선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이 대련을 보는 것으로 아이들이 정진할 마음을 먹는다면 그것도 또한 바람직한 일이라 여겼다.
기꺼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돌아보며 웃어 주었다. 몇몇 아이들이 민망한지 배시시 웃었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엘로 샌슨이 한마디 했다.
“괜히 멀쩡한 애들 꼬시지 마라, 미카엘.”
“예?”
“아니, 아니다⋯.”
땀에 젖은 머리를 꾹꾹 누르는 샌슨의 손에 의아했다가, 그가 나를 친근하게 대하는 것이 기꺼워 다시 한번 웃어 버렸다.
* * *
따각따각 초침 소리가 조용했다.
더글라스 머스탱은 내 동무들도 골렘을 보러 와도 되냐는 물음에 기꺼워했다.
제 교수실은 늘 학생들에게 열려 있는걸요, 하고 곱게 대답하는 모습이 언제나처럼 시원시원했다.
더 이상 손댈 것이 없으니 지난주부터 한 달 동안 매일 세 차례 방문해서 골렘의 상태를 확인만 하겠다던 볼더는 이미 조금 전에 떠난 뒤였다.
나는 더글라스의 교수실을 방문할 동무들의 수업이 마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교수실 한가운데에 앉은 골렘 탓에 저켠으로 밀려난 소파에 벽을 마주 보고 앉았다. 골렘이 호흡하는 소리에 집중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커다란 책상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저런 책을 뒤적이던 더글라스가 그런 나를 보며 간간이 말을 걸었다.
“언제든 괴롭거나 싫으면 거절해도 돼요, 에른하르트 영식.”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요. 하지만 힘들면 언제든 제게라도 귀띔해 주세요.”
“예, 교수님.”
나를 걱정하는 소리를 하기도 했고,
“아직 일주일 차라 그런가⋯. 단전이 생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내공과 마나의 성질이 다른 탓이 아닐까 싶지만⋯. 글쎄요.”
“몸으로 느끼기에 아주 다른 것 같지는 않았는데. 아, 지난번에 심법 구결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잖아요? 제가 하늘의 뜻을 세 가지로 해석해 보았는데⋯.”
그가 궁금한 것을 묻기도 했다.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던 중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기척만으로 내 동무들인 것을 알아 기대하며 몸을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짓궂은 마음이 들어 가슴 한켠이 두근거렸다. 찬찬히 문이 열렸다.
“으아악!”
“꺅! 이게 뭐야!”
“하하하!”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혼자만 괴롭게 여길 것이 아니었다.
끔찍한 것을 보는 데 익숙한 마엘로 샌슨을 비롯한 두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투명한 골렘을 마주하고 나와 같은, 아니 도리어 나보다 더 격렬한 반응을 돌려주었다.
오늘 투명한 골렘을 구경하겠다고 온 아이들은 나와 가까운 아이들 중에서도 호기심이 유난한 녀석들이었다.
운기조식의 원리가 궁금한 벤자민, 마법 골렘이 궁금한 마리앤, 그리고 그저 나 하는 일이 궁금한 쉐이든. 이렇게 셋이 찾아왔다.
희게 질린 아이들의 낯을 보며 하하 크게 웃다가 골이 난 마리앤이 내 팔뚝을 세게 꼬집어 웃음을 멈추었다.
더글라스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음을 참고 있는데, 차마 교수에게 골을 낼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다시 웃음이 크게 터졌다.
“제가 끔찍하다고 말했잖습니까.”
“아니, 이 정도인 줄은 몰랐죠⋯. 아, 눈 버렸어. 이거 얼굴 가려 둘 수는 없어요?”
“운기조식 중에는 어떤 접촉도 삼가는 것이 보통이라서.”
말에 관련된 일이 아니면 늘 무던하던 벤자민의 낯빛도 창백했다.
쉐이든이 양손으로 제 눈을 가리고 허허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다가 뒤늦게 더글라스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너무 놀라서.”
“아니, 아니에요. 골렘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징그럽긴 하니까⋯ 충분히 이해해요.”
“앗!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래요. 차라도 내줄까요?”
더글라스가 인자하게 웃으며 아이들 몫으로 꽃을 띄운 따뜻한 차를 한 잔씩 내어줬다.
나는 이제 더글라스가 내어준 꽃차가 놀란 것을 진정시킬 적에 쓰이는 약초인 것을 알았다. 하여간 세심한 사내였다.
금방 놀란 기운이 가신 아이들이 신기한 마음을 감추지 않으며 골렘의 주변을 기웃거렸다.
“이 정도면 인체 모형이라고 봐도 되겠는데요. 파란색이 마나의 흐름이라구요?”
“예. 맑은 푸른빛이 마나의 흐름을 나타낸 것이고, 아예 흰색은 핏줄을 나타낸 거라고 하던데요.”
“왜 빨간색이 아니라 흰색이에요?”
“마나의 흐름을 보는 데 방해된다고.”
“아아.”
마리앤이 언제 놀라 소리를 질렀냐는 듯, 찻잔을 꼭 쥔 채로 골렘의 주변을 기웃거리며 가까이에서 살폈다.
하여간 비위가 강하고 호기심이 대단한 것을 보니 저 녀석도 마법사의 자질을 타고나긴 한 모양이었다.
1서클에 통달하고 2서클 초입을 기웃거리고 있다고 했던가.
같은 혈족의 누이가 4서클이라고 하였으니 후에 더 대단한 마법사로 자라나게 될 터였다.
“이게⋯. 아침마다 미카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좀 다르기는 한데, 비슷하지.”
“어떻게 다른데?”
“뭐⋯. 방향은 있는데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하나.”
쉐이든이 중얼거리는 말에 별 뜻 없이 대답했더니, 마리앤이 득달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공들여 실험하는 중인데 의미가 없다니요!”
“마리앤은 마나를 다스릴 때 어떤 생각을 하는데요?”
“어⋯.”
“뜻을 담아 수식을 그을 때, 이 마나로 얼음을 만들어야겠다, 불을 빚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죠?”
“단순히 마나를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신체를 강건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기운을 쌓아야 맞는 것인데, 지금 이 골렘은 그런 뜻 없이 행동만 반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 눈에는 달라 보입니다.”
“으으으으음⋯. 하지만 그 결과가 온전히 같다면요?”
나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시어런의 아이들에게 운기조식을 가르치거나 내공심법을 가르치는 일은 완전히 떨쳐 낸 뒤였다.
볼더와 더글라스의 시선을 빌려 잘 정제된, 이 골렘과 같은 행위를 약식으로 몸에 새길 수는 있겠으나 나와 같은 방식으로 내공을 닦는 이는 앞으로 이 시어런에 없을 것이 분명했다.
남궁의 것이 아닌 창궁대연신공을, 창궁대연신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 대답은 더글라스가 대신 해 주었다.
“완전히 같을 순 없겠죠. 엇비슷할 수는 있겠지만요.”
더글라스는 다정한 목소리로 마리앤에게 모든 사람이 조금씩 다른 혈도를 사용하여 운기조식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해설해 주었다.
이렇게 차분하고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재주가 없는 나는 가만히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간혹 첨언을 하거나 했다.
골렘의 주변 바닥에 야영하듯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로 말하자면 모닥불 대신에 이 괴상한 골렘을 시야에 두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 무척 불쾌하였으나, 아이들이 맑게 웃으며 재잘대는 소리 덕분에 참아 낼 수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전할 수 없던 나의 본질을 친한 동무들에게 내보이는 기분이 들어 등골이 간질간질하기도 했다.
벤자민이 내공심법을 탐내기에 추후 안전이 확보된 뒤에는 가르쳐 줄 수 있으니 좀 더 기다리라고 당부해 두었다.
한 시간 정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그 인원 그대로 말을 돌보기 위해 마사로 향했다.
문득 궁금한 마음이 일어 마리앤에게 정인을 만나러 가지 않아도 되냐고 물었다가, 아이가 대경하며 내 어깨와 등을 마구 때리기에 또 웃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을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면 무엇하냐고 물었다가, 아이가 또 수줍어 난리를 쳐서 내가 잘못했다 몇 번을 사과하여 용서받았다.
마리앤은 쑥스러운 낯을 하고 흥, 코웃음을 치며 내 사과를 받아 주었다.
“오늘은 이미 보고 와서, 안 봐도 괜찮아요.”
“아, 이미?”
“네. 점심을 같이 먹었거든요. 들어 봐요, 글리 오빠는 고기보다 해산물을 더 좋아한다는 거예요. 나는 고기를 더 좋아하는데, 오늘은 생선이 너무너무 맛있는 거 있죠. 이럴 수도 있나?”
신기한 이야기였다. 마사에 도착해서도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들이 모두 재미있고 신기하여 무척 즐거웠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낸 뒤에 방에 돌아와 운기조식을 하며 눈으로 본 것과 내 몸을 관조하며 안 것을 비교해 보았다.
무언가 알 듯 말 듯 했으나 안개가 낀 것마냥 혼탁하여 막막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