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18)화 (118/176)

118.

토요일 아침부터 아이들과 연금술 강의실을 찾아가 시약을 만드는데 몰두했다.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는 대신에 완성한 시약의 결과물을 금주 토요일까지 세드릭에게 제출해야만 했다.

두 번이나 실패했지만 세 번째에는 성공하여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도 몇 번 해 보았다고, 시약병의 눈금에 맞춰 재료를 적당한 양으로 나누어 붓거나 무게를 달아 일정한 양을 맞추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아이들과 몇 번이나 손바닥을 부딪쳐 서로를 칭찬했다.

인사를 할 때에는 서로의 손을 잡고, 친애하는 이를 만났을 때에는 팔뚝이나 어깨에 손을 얹고, 기쁘고 칭찬할 일이 있을 때에는 서로의 손을 큰 소리 나게 맞부딪치는 일들이 간혹 얼떨떨하고 낯설게 느껴졌으나 싫지는 않았다.

시약을 제출하고, 또 아해들과 소란스럽게 서로를 칭찬하고 우스갯소리를 하느라 바빠 점심보다는 저녁에 가까운 시간에 도서관에 도착했다.

늘 앉는 커다란 탁자에 루베르가 앉아 공부하고 있기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녀석에게 눈으로 인사했다.

“언제 왔습니까?”

“아, 조금 전에. ⋯오전에 바쁜 일 있었어?”

“어제 못 한 과제를 끝마치느라 강의실에 좀 다녀왔습니다.”

그때, 루베르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녀석의 흰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며 헛웃음을 웃었다.

조금 전에 왔다더니, 점심도 안 먹고 아침부터 여기 앉아 공부만 한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시험 기간도 아닌데 배까지 곯아가며 앉아 있을 필요가 있을까 싶어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같이 식사라도.”

“아, 아니! 괜찮아!”

꼬르륵. 다시 한번 녀석의 배가 괴로운 소리를 냈다.

웃음을 삼키며 녀석을 바라보다가 내려놓았던 가방을 다시 들어 내 어깨에 걸었다.

“가죠.”

“⋯응.”

헤아려 보니 점심시간에서 서너 시간이 지난 때였다. 이 시간까지 식사도 않고 공부를 하느라 정신 팔린 아해를 생각하니 짠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식당에 음식이 준비되어 있지 않을 것이 빤하여 루베르를 데리고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녀석의 몫으로 샌드위치와 쌉싸래한 차를, 내 몫으로 딸기 케이크와 에이드를 앞에 차려두고 바람을 즐겼다.

너른 야외에 펼쳐진 테이블마다 차양이 드리워져 있어, 비스듬히 비치는 가을볕이 따사로웠다. 말없이 고개를 숙여 식사하는 녀석의 뺨과 귓가가 아직 붉은 것에 언뜻언뜻 시선을 두었다.

그제야 혹시 아이가 나를 기다리느라 지금껏 도서관에 앉아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우가 몇 없어 나와 주말을 함께 보내기를 좋아하는 아해인 것을 알고 있었으나, 배까지 곯으며 나를 기다릴 것은 생각지 못했다.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란 자고로 잘 먹고 잘 자라는 것이 제일인 것을, 내가 무어라고 이렇게 마음을 써 주나.

그러나 이 일을 지적하면 또 아니다, 저는 불편하지 않았다 고개를 내저을 아이인 것도 알았다.

샌드위치를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케이크 위에 얹힌 딸기 중 하나를 집어 아이에게 내밀었다.

“⋯어?”

“드세요.”

“아, ⋯음. 응. 고마워.”

루베르는 곱게 웃으며 입을 벌려 딸기를 받아먹었다.

그 낯빛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니 과실을 좋아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미안한 마음을 대강 갈음하며 어찌어찌 식사를 마치고 나니 자리에 앉은 지 겨우 삼십 분 남짓 지나 있었다.

다시 도서관에 가자 하고 몸을 일으켰더니, 아이가 곧장 내 소매를 잡았다.

“잠깐산책하다들어갈까?”

“⋯예?”

“⋯.”

“예. 그럽시다.”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내기에 무슨 급한 일이 있나 싶었다가, 겨우 그 말을 하려고 이렇게 애를 썼나 싶어 웃음이 터졌다.

내가 웃는 것을 보고 다시 시뻘겋게 달아오른 아이의 얼굴이 조금 전 맛본 딸기와 꼭 닮았다.

이번 달 야영 보고서를 쓰지 않게 되어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애를 쓰는 아이를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음을 옮겼다.

또 그 연못이었다.

시어런 아카데미에는 쉴 곳도 앉을 곳도 무척 많았다.

그러나 어쩐지 루베르와 함께 걷다 보면 늘 이 짤막한 다리를 향하게 되었다.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물고기 한 무리가 그림자를 보자마자 먹이를 주는 줄 알고 우르르 몰려왔다가, 크게 꼬리치며 돌아갔다.

선선한 바람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저 멀리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또 루실라가 공놀이를 하나 보다 했더니, 루베르가 미간을 좁히며 제 동생이지만 기운이 넘친다 흉을 보았다.

“기운이 넘치면 좋지요.”

“넘치는 것도 적당히 넘쳐야지⋯.”

“루베르 선배는 늘 기운이 없어 걱정입니다.”

“⋯내가?”

내 주변에 있는 아해들 중에는 제일 비실비실했다.

내 앞에서나 그런 꼴을 보이는 것인지, 혹은 늘 기운이 없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랬다.

정작 검을 긋는 모습이나 늘씬하고 힘이 넘치는 단련된 팔다리를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루베르 또한 자각하고 있던 것이 아닌지, 몇 번이나 내가? 하고 되물었다. 아이가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아 아니다 대강 둘러대고 말았다.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서서 소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란히 앉으면 쉬어 가는 기분이 들어 편하긴 할 테지만, 아이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없을 것을 생각하면 지금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가만히 아이를 들여다보아도 그 얼굴에서 하고 싶은 말을 읽어 내는 재주가 없었다. 나는 결국 입 밖으로 내어 물었다.

“하고 싶던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

“선배?”

“어? 어. 아니, 그냥. ⋯그냥 배가 불러서 좀 걷고 싶었어. 별일은 아니고⋯.”

“그래요.”

아이가 시선을 돌려 연못을 내려다보기에 나 또한 먼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다리 난간에 등을 기대어 퐁당퐁당 물고기가 자맥질하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급할 것 없어 재촉하지 않았다.

루베르가 몇 번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더니, 힘 빠진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에른하르트 영식.”

“예.”

“이제, 곧 11월이 될 거잖아.”

“그렇지요.”

“곧바로 시험 기간이 될 거고⋯.”

“그렇겠지요.”

“⋯시험이 끝나면, 집에 갈 텐데.”

“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알 수가 없었다. 난간에 기댄 그대로 고개만 돌려 아이의 옆얼굴을 보았다.

아이는 까만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나를 돌아보지 않고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가기 전에 내 얼굴 한 번만, 보고 가 줄 수 있어?”

“음?”

왜 굳이 그래야 하는지 몰라 잠시 얼이 빠졌다.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아이는 여전히 연못을 내려다보던 그대로 시선을 들지 않았다. 난간을 꽉 쥔 소년의 손에서 루베르의 긴장이 읽혔다.

“왜요?”

“⋯방학 동안에, 오래 못 볼 테니까. 그⋯.”

나는 잠시 여름 방학 전에 아이를 보지 않고 여행을 다녀왔던가 고민했다.

그때는 루베르가 먼저 찾아 와 산책을 청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마음에 두지 않아 기억이 가물가물하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그러겠습니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 쉽게 그러겠다 대답했을 뿐인데, 루베르의 얼굴이 꽃피듯 밝아져 적잖이 당혹했다.

소년은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나를 돌아보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늘 갈까마귀 같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러는 모습을 보면 사람 손 탄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일요일에는 괜히 굶지 말고 점심을 먹고 나서 만나자 했더니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어쩐지 요상한 기분이었다.

* * *

시월 넷째 주의 월요일이었다.

초급 검술 시간에 학생들끼리 대련을 하기 시작하면서 최근에 나는 벤자민에 대해 부쩍 자세히 알게 되었다.

고급 검술 시간에는 일류무인의 수가 많아 돌아가면서 대련을 하느라 벤자민과 검을 부딪칠 시간이 많이 없었으나, 초급 검술 시간에는 서로를 상대할 이가 서로밖에 없었던 탓이었다.

검을 맞대는 일이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 검을 뽑기도 전에 녀석의 검이 어느 방향으로 그어질지를 알게 되었다.

서로를 이겨 먹기 위해 새로운 검식을 연구해도 이 또한 아는 것이라 쉽게 막히는 것이 우습고 재미있었다.

내가 녀석의 검을 알아 가는 만큼 녀석 또한 내 검을 많이 닮게 되었다.

처음 대련을 시작할 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검을 두세 번 부딪칠 즈음부터는 진심으로 부딪쳐 오는 벤자민을 가뿐히 걷어낼 수가 없어 나 또한 대련에 열을 올렸다.

한 합 부딪칠 적에 검명이 울렸고, 두 합을 부딪치면 팔꿈치가 저렸다.

거리를 벌리고 숨을 골랐다.

서로 힘으로 상대하고자 하면 승부가 나지 않는 것을 잘 알아, 벤자민과 내가 진심으로 대련할 때에는 서로 중검이 아니라 쾌검을 사용하는 일이 잦았다.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검을 상대하려면 눈 한 번 깜빡이는 일도 허투루 할 수가 없었다.

한손검을 상대하고 있는지 양손검을 상대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녀석의 한 팔에 실린 완력이 그토록 대단했다.

녀석이 좌하에서 우상으로 올려 베는 힘을 힘으로 막지 않고, 검을 맞댄 채 몸을 띄웠다.

공중에 이 장 높이로 떠올라 녀석을 향해 활처럼 쏘았다. 크게 몸을 회전하며 휘두른 검이 녀석의 검신을 강하게 내리쳤다.

쩌엉, 시끄럽게 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둥그렇게 뜨인 눈이 귀엽고 우스워 하하 웃었다.

힘으로 져 본 적 없는 치들은 저보다 강한 힘을 받았을 때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법이었다.

일 검으로 승부가 난 것을 알아 검을 거두는 아이를 앞에 두고 섰다.

“어떻게 한 겁니까?”

“무엇을요.”

“방금, 공중에서 디딤발도 없이 방향을 완전히 틀었는데⋯.”

“맞습니다. 아까 클라우디안 영식이 이렇게 검을 휘둘렀을 때 축을 왼발에 싣고 힘을 여기 이 검신의 중앙부에 집중하지 않았습니까?”

아이의 옆에 서서 아이의 모습을 흉내 내며 설명을 이었다. 저켠에서 이쪽을 건너다보는 마엘로 샌슨이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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