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목요일, 고급 검술 시간이었다.
평소처럼 합격술을 연마하던 중에 발터 오르겐 선배가 크게 다칠 뻔했다. 어쩐 일인지 평소보다 넋이 빠져 방패를 들고 있지 않은 왼팔로 옆 학우의 검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다행히 마엘로 샌슨이 등 뒤에도 눈이 달린 사람처럼 맨손으로 검을 낚아채는 데 성공하여 다치는 일은 없었지만,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혼나는 중에도 제대로 반성하는 기색이 없어 다른 아이들이 훈련하는 내내 연무장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벌을 받았다.
발터 오르겐은 호탕하고 재치 있는 데다가 온화한 성정을 지녔다. 졸업을 몇 번이나 유예하여 나이가 많아, 고급 검술 수업에서 맏형 노릇을 했다. 몇 해째 고급 검술 수업을 듣는 만큼 실수하는 일이 적었다.
여러 아이들이 걱정하는 낯으로 달리는 녀석을 힐끔힐끔 보았다.
나 역시 발터와 자잘한 이야기를 나눈 일이 많아 내심 그 청년을 친근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녀석이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괜한 걱정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녀석이 최근 몇 주 동안 이전보다 덜 웃기는 했다.
농담을 자주 하고 다른 아이들을 어르는 것은 평소와 같았으나, 수업 사이 사이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생각에 잠기는 일이 종종 있기도 했다.
가문에 일이라도 생긴 것이면 내가 물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알아 주저했으나, 만에 하나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수업이 끝나자마자 발터의 손목을 붙잡았다.
“음? 무슨 일이야, 미카엘.”
“⋯그게.”
“뭐야, 나 진짜 괜찮아. 아까 교수님이 잘 막아 주신 거 봤잖아.”
“요즘 무슨 일 있습니까?”
“어어.”
발터 오르겐은 당혹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주저했으나, 곧 평소처럼 넉살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신경 써 줘서 고맙다, 야.”
“⋯.”
“아니, 정말 그런 표정을 할 일은 아닌데⋯.”
발터 오르겐은 잡힌 손목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허허 웃으며 제대로 된 답을 주었다.
“그냥, 졸업 문제 때문에 그렇지 뭐. 올해에도 한 번 더 유예할까 생각하고 있어서⋯.”
의아한 소리였다.
발터가 쓰게 웃으며 내게 잡힌 손목을 흔들며 놓아 달라 청하여 그 손목을 놓았다.
나와 점심을 함께 하기 위해 벤자민과 루베르가 다른 아이들을 이끌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가 그 말을 듣고 함께 놀랐다.
“한 해 더⋯ 말씀이십니까?”
“어어, 뭐. 아니,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만⋯.”
시어런 아카데미는 조기 입학, 조기 졸업, 졸업 유예가 모두 가능했다.
가능하기는 하지만 셋 모두 흔한 일은 아니었다. 올해 입학생들 중에 조기 입학한 학생은 나 하나뿐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발터 오르겐은 몇 차례 졸업 유예를 했다고 들었다.
아카데미 수첩에 적혀 있는 내용대로라면 가장 길게는 5년까지 졸업을 유예할 수 있다고 하지만, 특별한 사유 없이 그 비싼 학비를 더 내면서 아카데미에 머무는 학생은 많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보다 훌쩍 어른 태가 나는 청년을 한 번 훑어보았다.
발터 오르겐은 이미 절정의 경지를 노리는 일류무인이었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을 넘어선 실력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제국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을 터인데 굳이 아카데미에 머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오르겐 선배는 올해 나이가 어찌 됩니까?”
“왜. 내가 너무 나이 많아 보여?”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닙니다.”
“알아, 알아. 아는데⋯.”
발터의 손이 익숙한 태도로 내 머리를 헤집었다. 굳이 피하지 않고 대답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녀석이 쓰게 웃는 얼굴이 낯설어 피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스물하나. 이제 곧 스물둘이 되겠지.”
대부분의 학생들이 열다섯의 나이로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열일곱까지 수업을 듣다가, 열여덟의 나이로 졸업을 했다.
벌써 사 년이나 졸업 유예를 했고, 마지막 일 년까지 꽉 채워 수업을 듣고 나가겠다는 소리였다.
나와 다른 아해들이 무어라 말을 덧붙이지 못하고 멀거니 서 있자, 발터는 민망한 표정으로 제 목덜미를 슥슥 문질렀다.
바짝 땋아 올려붙인 머리 아래로 훤히 드러난 목이 붉었다.
“그냥 사정이 좀 있어서.”
“도대체 무슨 사정이기에⋯? 저번에 졸업하시면 바로 유일 산맥으로 파견 나가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그랬지.”
“혹시 파견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셨다거나⋯? 아니, 그렇지도 않을 터인데⋯.”
“어어, 갈 수는 있겠지.”
그 까닭을 궁리하다 보니 답은 금방 나왔다.
나 또한 마엘로 샌슨에게 더 배우고 싶어 졸업 유예를 고민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약관의 나이에 보다 검에 몰두하고 싶다면 화경의 무인이 가르침을 내리는 곁을 떠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어쩐지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당장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과 좋은 스승의 곁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여 졸업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아이를 앞에 두고 있자니 절로 기운을 북돋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샌슨 교수님 때문이군요.”
“어? 샌슨 교수님은 너무 크잖아. 난 마른 사람이 취향인데.”
“예?”
“어?”
“⋯취향이요?”
“아니. ⋯그. 내가, 말을 잘못했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발터의 낯빛이 붉게 달아올라 허둥지둥하는 까닭을 알 수 없어 의아하기만 했다.
다른 아이들은 알아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리니, 벤자민 역시 의아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루실라가 하하 웃으며 농을 던졌다.
“칼립스 교수님처럼요?”
“아니, 잘못 말했다니까 그러네.”
여기에서 왜 칼립스 아그리젠트 교수의 이름이 나오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발터 오르겐이 칼립스 교수와 친한 것을 다른 아이들도 알아 농담을 하는가보다 싶었다.
발터가 루실라의 입을 틀어막으며 장난을 쳤다. 루실라가 깔깔 웃으며 그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무장 끝까지 저 멀리 달아났다.
발터가 몇 번이나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말라 신신당부를 하기에, 무엇을 말하면 안 되는 것이냐 물었더니 아무것도 아니라 했다.
하여간 이 또래 아이들의 속내는 복잡하여 들여다보기가 어렵기만 했다.
익숙한 시선이 뺨에 닿았다.
루베르가 나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발터가 멋대로 헝클어뜨린 머리칼을 손질해 주려는 것을 알고 고개를 숙였다. 슥슥 머리를 빗는 손이 다정하고 얌전했다.
한참 그러다가 루베르가 손을 떼는 것에 맞춰 물었다.
“선배는 무슨 소리인지 좀 알겠습니까?”
“어? ⋯어어? 뭐가?”
“발터 선배가 왜 저러는지.”
소년이 까만 눈을 끔벅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저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순박하긴 하되 눈치가 빠르지 않은 놈이었다.
다음에 쉐이든에게나 물어봐야겠다 생각했다.
* * *
시월 삼 주차 금요일 오후. 시약 재료 없이 연금술 강의실에 앉았다.
세드릭 교수는 평소처럼 크고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대신에, 진중한 얼굴로 교탁 앞에 섰다.
“오늘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알릴 이야기가 있다.”
이어지는 말은 내가 루베르의 입을 통해 익히 알게 된 이야기들이었다.
늑대가 엘도스 산에 나타난 이유, 그 뒤 교수진들의 대처, 신고를 받은 제국기사단이 늑대 토벌에 나선 일 등등.
현재 산맥 어림에 순찰 인원이 파견되어 있으며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접근이 제한된다는 등의 설명을 차분한 목소리로 읊은 세드릭이 고개를 깊게 숙이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하지 못한 건, 내 책임이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할게. 미안해.”
“⋯전 괜찮습니다. 크게 다친 학생들도 없었잖아요.”
그렇게 대꾸한 것이 가장 큰 상처를 입은 데미안이었기 때문에, 말을 아끼던 학생들이 여기저기에서 괜찮다, 교수님 잘못이 아니다, 어여쁜 소리를 하며 세드릭을 달랬다.
세드릭은 몸을 바로 세우고 아이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늘 장난기로 그득 차 있던 세드릭의 눈매가 그렇게 차분하고 온화한 빛을 띨 수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 또한 분하던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나야 루베르에게 미리 듣고 알았다지만, 소식을 들을 곳 없던 아해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정중하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그보다 더 옳은 대처를 할 자신이 없었다.
안내를 마친 세드릭이 아이들에게 시약 재료들을 공평히 나누어 주었다.
평소라면 조장이 나가 물건을 받아 오게 시켰을 텐데, 그녀가 직접 움직여 재료를 나누어주는 것이 우리 조의 조장인 데미안을 의식한 것이 빤히 읽혔다.
“이번에 만들 시약은 세 가지 독을 해독할 수 있는 해독제야. 지금 나누어 준 것들은⋯.”
“어⋯?”
본래 만들기로 했던 시약이 아니었다.
나누어 받은 재료들도 이번에 숲에서 찾은 것들과 전혀 다른 생김을 하고 있어 의아한 소리를 냈더니, 세드릭이 멋쩍게 웃는 낯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안 좋은 일을 상기시키는 건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기존에 만들기로 했던 시약은 만드는 법을 나중에 유인물로 만들어 나눠 주도록 할 테니, 괜찮은 친구들만 한 번씩 읽어 봐.”
“⋯아.”
“이번 달 보고서는 없고 다음 달에는 학교 내 온실에서 체험하고 야영할 거야. 자, 그럼 이제 시약을 제작하는 방법부터 설명할 테니까 다들 필기할 준비 해.”
다 같이 해독제를 만드는 시간은 화기애애했다.
다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잘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데미안은 유인물을 받자마자 두 번 접어서 책 사이에 끼워 두었는데, 아무도 그 일을 지적하지 않았다.
새로 만든 시약은 둘은 성공하고 하나는 실패했다.
마리앤은 온도 조절이 미흡했던 것을, 제니는 시간을 제때 맞추지 못한 것을 실패의 원인으로 꼽았다.
데미안이 오래 앉아 있는 것을 힘들어했기 때문에 토요일에 마저 나와 다시 시약을 만들기로 약속을 하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실을 나섰다.
다 같이 어울려 저녁 식사를 했다.
데미안이 장난으로, 그래도 이달의 보고서가 없는 것이 참 좋다 말을 꺼내어 마리앤이 그 등짝을 한 대 후려쳤다. 식사하는 내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