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시월 둘째 주 금요일 오후.
언제나처럼 아카데미 정문 앞에 도열해 있는 마차에 조별로 올라탔다.
시어런 제국에는 숲이 많지 않다. 그 드넓은 땅의 대부분이 너른 평지였다.
여름 방학에 놀러 갔던 세르벨 백작가의 호수 어림처럼 다른 땅보다 높은 지대야 간간이 볼 수 있었으나 중원의 산에 비하면 완만하여 언덕이라고 부를 만했다.
그러니 산다운 산, 숲다운 숲을 만나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향해야 했다.
대륙의 북쪽에는 유일 산맥이 있다.
유일 산맥의 중턱에서 정상까지는 사시사철 눈이 녹지 않는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세드릭은 학생들을 이끌고 유일 산맥을 탐험하겠다는 미친 소리는 하지 않았다.
시어런 수도 중심지에서 반나절 어림만 마차를 타고 가면 유일 산맥에서 갈고리마냥 죽 뻗은 능선의 끝자락을 만날 수 있었다.
산맥의 가장 낮은 봉우리인 엘도스 산은 해발 고도 일천 미터 남짓한 높이였다.
게다가 무예를 익히지 않은 학생들도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길이 잘 닦여 있었다.
이미 몇 차례나 대륙 전도를 본 일이 있고, 매번 야영을 시작하기 전에 세드릭 교수가 대륙 전도를 펼쳐 두고 이번 야영지가 어디인지 위치를 짚어가며 설명해 준 덕분에 마차가 이동하는 동안 불안할 일은 없었다.
오늘 목표로 한 재료들을 채집한 뒤 모두와 어울리기 좋은 놀잇감을 잔뜩 가져왔다고 재잘거리는 아해들이 무척 귀여웠다.
엘도스 산 아래 야영지에 아이들을 내려놓은 마차들이 줄을 지어 수도로 돌아갔다. 세드릭 교수는 아이들을 끌어모아 이미 몇 번이나 당부한 주의 사항을 다시 한번 늘어놓았다.
각자 행동하지 마라, 돌발 행동을 하지 마라,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마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이야기였기에 아이들 모두가 네에, 짝짝 입을 벌려 가며 병아리처럼 대답을 잘했다.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본 세드릭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꾸러미 여러 개를 꺼냈다.
“우리 씩씩한 꼬른이들에게 줄 선물이 있어요. 자, 조장들 앞으로. 이걸 조원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기.”
데미안이 곧장 앞으로 나서 꾸러미를 받아 왔다.
길쭉한 막대 다섯 개가 붉은색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붉은 칠이 되어 있는 막대의 겉면은 종이로 되어 있고, 그 아래에 긴 끈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막대의 중간부에 마석 두 개가 박혀 있는 것을 보고 아티팩트인 것을 알았다.
세드릭이 곧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다들 하나씩 챙겼지? 2형 비상신호발신기, 통칭 비상불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야.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 끈이 없는 쪽을 머리 위로 향하게 하고 끈을 잡아당기면 머리 위로 뜨겁지 않은 불꽃이 떠오를 거야.”
세드릭 교수가 시범을 보이는 척하며 끈을 잡았지만, 당기지는 않았다.
하긴 방법이 단순한데 하릴없이 아티팩트를 소모할 필요는 없었다. 봉화 신호와 비슷한 것이겠거니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옆에 있는 고리를 사용해서 모두 허리띠에 제대로 차 두도록 하자. 만약 혼자 고립되었거나, 길을 잃었을 때에는 망설이지 말고 사용하도록 해. 내가 직접 구하러 달려갈 테니까. 비상불을 사용했다는 사실 자체로는 절대 감점하지 않으니까, 망설이지 마. 알겠어?”
“네에!”
나와 아이들 모두가 비상불을 허리에 찼다. 한 뼘 남짓한 길이의 막대는 생각 외로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세드릭은 아이들이 모두 아티팩트를 제대로 허리에 맸는지 검사한 뒤 단단히 당부했다.
“지난 시간에 탐험한 평야 지형은 시야가 트여 있어 위험할 일이 없었고, 늪 지형은 지대가 좁아서 길을 잃을 걱정이 없었지. 하지만 여기는 달라. 엘도스 산은 낮은 산이지만, 북쪽으로 유일 산맥과 이어져 있기 때문에 길을 잃었다가는 큰일이 날 수 있어.”
“⋯.”
“자, 그럼 숲에서 방향을 찾는 법을 다시 한번 복습해 볼까. 지금 이 옆에 서 있는 나무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론도 노퍼스 나무입니다!”
“좋아, 3조 가산점. 론도 노퍼스 나무의 겉껍질은 이렇게 소나무 껍질처럼 갈라져 있는데, 남쪽을 향한 껍질은 한 뼘 길이가 되도록 폭이 넓고 북쪽을 향한 껍질은 이렇게 손가락 두 마디만큼 폭이 좁아. 세로 길이가 아니라 가로 길이를 보고 방향을 파악하는 거야.”
세드릭은 그 외에도 이끼를 찾아 방향을 헤아리는 법, 하늘을 보고 방향을 헤아리는 법 따위를 강연했다.
지난주에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집중하여 듣는 아이들보다 저들끼리 신난 아해들이 더 많았다.
세드릭은 몇 가지 질문을 반복해서 던져 산만한 아이들의 머릿속에 주의 사항을 단단히 박아 둔 뒤, 웃으며 짝짝, 두 번 박수를 쳐 시선을 모았다.
“자, 그럼 이제 출발. 1조부터 먼저 출발하자.”
아이들이 줄지어 숲으로 향했다.
아득하니 높고 빼곡하게 서 있는 푸른 나무들은 바람이 일 때마다 사그락 잎사귀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거대한 생물의 떡 벌어진 입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숲에 익숙했다.
남궁세가가 위치한 안휘는 삼산 오악 중에서도 뛰어난 산으로 유명한 황산을 옆에 끼고 있었다.
연화봉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뽀얀 운해가 발밑에 고이는 것이 엄청난 절경이었다.
간간이 친우들을 본다, 신세를 진다 하여 들렀던 도가 문파들도 대부분 높은 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경지에 오른 무림인은 뒷짐을 지고서도 절벽을 타고 오를 수 있었다.
나 또한 평범한 무림인으로서 차디찬 새벽바람을 맞으며 너른 봉우리를 시야에 담는 일을 즐겼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이 좁아 어둑한 숲에서도 두려운 마음이 없었다. 내가 가장 앞에서 아이들을 이끌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잘 닦인 등산로에서 벗어난 길을 밟아야 약초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험한 길로 이끌었다. 어찌나 나무가 울창하던지 머리 높이에서 거슬리는 나뭇가지를 검으로 뚝뚝 끊어내며 나아가야 했다.
그 외에는 평탄한 탐사였으나 아이들은 어둑어둑한 숲길을 걷고 있자니 점차 불안해지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서로 약간의 투정을 주고받았다.
특히 제니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고 달래 주어야 할까 싶어 걸음을 멈추자, 아이가 폭 한숨을 내쉬며 이런 말을 했다.
“오늘 구해야 할 것들 중에 뮤시즈 이끼랑 소롤 가지는 축축하게 썩은 밑동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는데, 이래서야 언제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경쟁이 치열할 게 분명해요. 비가 온 지 오래되어 바닥이 다 말라붙어 있잖아요.”
“⋯아.”
“왜 그렇게 봐요, 미카엘?”
“아뇨, 아무것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조보다 재료를 구하는 것이 늦어질까 봐 걱정인 것을 알게 되어 마음이 놓였다.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점심나절에 등산을 시작했으나 한 시간이 넘도록 얻은 것이 없었다.
산의 밑동을 빙빙 도는 식으로 움직이고자 했으니 같은 곳을 몇 번이나 지나치고 있는데도 그랬다.
머리 위에 얹힌 나뭇가지가 빼곡하여 햇빛이 적게 들었다.
“⋯와, 생각보다 더 어둡네요.”
“좀 으스스 한 것 같지 않아요? 불 좀 켤까요?”
“등불 들고 걸으면 넘어지지 않겠, 헉!”
“으, 으아⋯. 고마워요. 와⋯. 여신님 만나러 갈 뻔했네⋯.”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려던 제니를 데미안이 떠받쳐, 둘 다 넘어지지 않았다.
한숨을 폭폭 내쉬던 아해들 사이에서 마리앤이 환하게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저거! 저거다. 팔라딘 버섯! 맞죠? 하얀색!”
“어어, 맞는 것 같아요. 맞아! 저거다!”
목표로 하던 것을 찾아 다들 신이 났다. 조심조심 배운 대로 버섯을 따고 나자 기운이 돌았다.
얼른 과제를 끝마치고 돌아가서 고구마와 밤을 굽자며 귀여운 소리를 재잘거렸다.
그리고 또 한 시간이 지났다.
아이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진 것이 확연히 느껴져서 평탄한 지형을 찾자마자 멈춰 섰다.
일전에 사막 지형 온실에서도 느꼈지만, 아이들 모두가 체력이 좋지 않은 탓에 오랜 등산에 힘든 것을 숨기지 못했다.
들고 다니기 무거운 먹을거리나 침낭 따위는 소집 장소에 그대로 두고 최대한 가뿐한 몸으로 이동했는데도 그랬다.
쉬어 가자 소리가 나오자마자 나뒹굴듯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 두 여아들과 땀으로 상의가 푹 젖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내는 데미안을 보았다.
이반 홀모스가 물 두 모금으로 피로를 삭이며 곁에 선 나무에 등을 기댔다.
앉아서 쉬라는 마리앤의 재촉에도, 묵묵히 고개를 내저은 소년이 나를 돌아봤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신체 단련을 하는 내가 겨우 두세 시간의 등산으로 지칠 리 없었다. 멀쩡한 낯으로 녀석을 멀뚱히 마주 보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물었다.
“음⋯. 그 뭐지, 이끼랑 가지는 제가 구해 올까요.”
“미카엘은 약초 구분하는 거 어려워하잖아요. 이번에는 선인장 열매 따는 거랑 다르다구요.”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이반이 불쑥 입을 열었다. 힘이 들기는 했던 모양인지, 다른 아해들도 어어. 하고 더 만류하지 않았다.
내 눈에는 이반도 평소보다 힘들어하는 것이 빤히 보여 걱정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이반도 힘들어 보이는데.”
“아직 괜찮아요. 본가 근처에 언덕이 많아서 다리가 튼튼한 편입니다.”
“음⋯.”
“정 안되면 미카엘에게 업어 달라고 할 테니까.”
“예?”
다들 소리 내어 와르르 웃었다.
아이들을 떼어 두고 움직이기 불안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해가 지고 난 뒤의 산을 돌아다니는 일은 위험하기 때문에, 이번 산행은 다섯 시간 안에 끝마쳐야만 했다. 시간 안에 재료를 다 구하려면 내가 좀 더 힘을 쓰는 것이 낫겠다 여겼다.
미리 구한 버섯이 든 상자를 아이들의 옆에 내려 두고, 몇 가지 짐을 풀어 그 곁에 두었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서 기다려요.”
“아, 힘들어서 어디 가지도 못해요. 걱정 말아요, 미카엘.”
“제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데미안이 싹싹하게 대답했으나 내가 믿는 것은 그가 아니었다.
데미안은 무예를 익히지 않았고, 청년이 되기에는 아직 미흡한 소년이었다.
검을 차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몸을 제대로 쓰는 법도 모르니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앤이 끼어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에드윈 키아드리스는 나와 막상막하를 이루는 실력자였다. 겉보기로는 허약해 보이는 마법사가 어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지 이미 꾸준히 학습한 나였다.
그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마리앤이 아직 1서클이라고 하더라도 산짐승 한둘 정도야 머리에 불이라도 붙이면 달아나겠거니 싶었다.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