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11)화 (111/176)

111.

문득 생각이 나서 쉐이든에게 검술부의 다른 스승들은 어떤 이들이냐 하고 물었다.

쉐이든이 여태 교수님들에 대해 몰랐냐며 되물어 와 어안이 벙벙했다.

쉐이든은 각 교수의 이름과 특장점을 이야기해 주고 난 뒤 어깨를 으쓱했다.

“대개 1학년은 담임 교수님 수업을 그대로 듣고, 중급 검술 수업은 어차피 학년이 섞이게 되어 있으니까 원하는 교수님 수업을 찾아 듣는 편이야. 마엘로 샌슨 교수님은 해마다 초급 검술 수업과 중급 검술 수업을 맡고 계시다고 알고 있어.”

“그러면 지금처럼.”

“맞아, 지금처럼 월수금 중급 검술 수업을 듣고, 화목 고급 검술 수업을 들으면 돼. 달라지는 게 있다면⋯ 아. 중급 검술 수업은 정원이 초급의 두 배인가, 그럴걸.”

“음.”

쉐이든 로제는 자신이 나와 같은 수업을 듣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걸 알기는 하냐며 볼멘소리를 덧붙였다. 녀석이 투정 부리는 일에 익숙해진 터라 귀엽고 기특하기만 했다.

해가 지날수록 쌓이는 것은 많고, 버릴 것은 없었다.

금주 제국의 계보 수업 시간은 자습을 했다.

칼립스 아그리젠트 교수가 출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수업에 나오기는 하였으나 그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교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준 뒤 교수실로 돌아갔다.

물론 이전 수업에서도 두 시간의 수업 시간 중에 삼십여 분만 해설과 강의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암기하는 시간으로 배정해 두긴 하였으되, 이렇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시어런의 모든 교수진을 무척 존중하고 아끼고 있었다. 그중 아그리젠트 교수는 다른 교수들보다 더 마음이 쓰였다.

다른 교수들은 신체가 강건하여 낯빛이 환하지만, 아그리젠트는 늘 툭 치면 톡 하고 부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탓이었다.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나는 머리를 쓰는 것보다 몸을 쓰는 일에 자신이 있었다. 머리를 쓰는 이의 고충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제갈 아무개가 종종 무식한 것들과 상종할 수 없다느니 하며 탕약을 물처럼 들이켜던 것을 떠올리고, 다시 쉐이든을 붙잡고 물었다.

“정말로 아그리젠트를 도울 방법이 없는 것이 맞아?”

“⋯어? 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또.”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저리 낯이 희고 걸음걸이가 위태로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구는데, 다들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 하는 말이야. 오늘은 유독 목이 갈라져 말도 못 하지 않아.”

“그게⋯. 아니,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좋다니까⋯.”

“사람이 눈앞에서 아파할 적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닌 것을.”

쉐이든이 자꾸만 말을 돌리는 것이 못마땅해 큰 소리를 내려 하였더니, 아이가 내 어깨를 꾹 잡아 누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 지금 너만 모르는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건데.”

“그래.”

“교수님께서 아마 사랑⋯ 싸움⋯ 중이신 것 같거든.”

“뭐?”

쉐이든은 한참 동안 할 말을 고르는 것처럼 고운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할 말은 꿀떡 삼키고, 조용히 눈꼬리를 늘어트리며 웃었다.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참을 멀거니 앉아 쉐이든의 미묘한 웃음을 보며 그 뜻을 읽기 위해 애썼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했다.

시어런의 이들이 정인에게 유독 애틋한 모습을 보이고, 자신의 연정을 지키기 위하여 애쓴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내 아비와 어미가 사랑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가 반대로 사랑 덕분에 꽃처럼 피어난 것도 알았고, 맷 니코의 부모가 사랑을 위해 야반도주한 일을 전국적 로맨스로 포장하여 뽐내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깐깐하고 고집 있어 보이는 칼립스 아그리젠트가 아픈 이유도, 사랑이라고.

믿기지가 않아 대답을 못 하고 눈만 끔뻑이고 있자니 쉐이든 로제가 웃는 낯으로 내 어깨를 도닥이며 달래는 소리를 냈다.

“으응. 별일 아닐 거야. 당장 교수님도 그러려니 하고 계시고.”

쉐이든의 목소리가 침착하고 흔들림이 없는 것이 그의 말이 참임을 알리고 있었으나, 그래서 더욱 거짓 같았다.

“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고?”

“정확히는 그⋯로 인한 신체적인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어쨌든 그거랑 비슷해. 그냥 그렇다 정도로만 알고 있으면 돼. 그래서 이건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는 문제거든? 진짜 문제가 있다면 아그리젠트 교수님께서 해결하셔야 하는 문제라서⋯.”

“마음을 다친 것이 몸에⋯.”

“아마 몸을 다쳤겠지⋯.”

“⋯정인에게 맞았다고?”

“아니, 그건 아냐. 잠깐, 미카.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칼립스 교수님이 맞고 사실 분은 아니잖아. 그렇지? 어쨌든 우리는 어리고, 어른의⋯ 그런 문제에 끼어들면 안 되는 거야.”

쉐이든은 나를 아주 잘 알았다. 내가 무어라 말을 덧대려고 하자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교수님의 연애사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건 학생의 도리가 아니야.”

도에 어긋나는 일이라는데 어찌 더 말을 얹을 수 있을까.

나는 수긍하여 입을 닫았다. 쉐이든이 잘 생각했다며 내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혼란한 마음을 다잡지 못하여 그날 오후, 명마 예찬론 시간에는 말을 타는 일이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벌레에게 물렸다던 칼립스 아그리젠트의 목덜미를 떠올렸다.

사람이 꼬집고 깨문다면 그런 흔적이 남을 수 있는 것을 알았다. 얼마나 앙칼지고 독한 여인이기에 정인을 그리 다룬단 말이야,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또 금방, 아그리젠트 교수가 어찌나 독한 말을 했으면 정인이 그를 그리 대할까, 하고 심란한 마음이 일었다.

쉐이든의 말이 맞았다.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었다. 고개를 털어 잊었다.

내가 집중하지 못하여 하릴없이 시간을 보낸 것과 달리, 벤자민 클라우디안은 무척 능숙하게 말을 다뤘다.

일류무인이 말 위에서 버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않았다. 말이 아무리 거칠게 뛰어도 떨어지지 않을 완력과 근력을 가지고 있는 벤자민은 거의 날듯이 말을 몰았다.

승마용으로 터놓은 너른 언덕을 멋지게 뛰논 뒤 벤자민과 그를 등에 얹은 말, 빅토르가 숨을 헐떡이며 마사 앞으로 되돌아왔다.

비반 오티프는 큰 소리로 박수를 치며 그들을 격려했다. 벤자민은 얼른 빅토르가 먹을 물을 떠 왔다.

빅토르는 제 수발을 잘 드는 벤자민을 칭찬하듯 그의 어깨와 뺨에 머리를 기대어 당근 두 개를 더 얻어먹었다.

이제 벤자민의 가장 큰 고뇌가 해결되었으니 주에 네 번 마사를 방문하던 일정을 조정하여 주에 두 번, 월요일과 수업이 있는 수요일에만 말을 돌보기로 약속했다.

* * *

금요일에는 여기저기서 온 생일 선물을 뜯어보느라 오후 나절 내내 바빴다.

양친과 친가, 외가를 가릴 것 없이 혈족들에게서 온 편지와 선물들로 서재가 가득 찼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이전에는 장난감이나 서적들을 많이 받았었는데, 올해 선물은 대부분 보석이나 아티팩트였다.

팔찌와 반지 따위를 주렁주렁 걸치는 것은 손을 험하게 쓰는 검수에겐 맞지 않는 일이다.

받은 선물의 대부분이 보온이나 방한 등 내게는 큰 쓸모가 없는 마법 수식들이 새겨진 것들이라 더욱 그랬다.

받은 선물을 친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혈족 어른들이 서운하게 여길까 걱정이 되어, 동생들에게 전해야겠다 마음먹었다.

미하엘은 내게 검에 다는 장식을 선물로 보냈는데, 그 장식을 구하기 위하여 한 달간 얼마나 많은 심부름을 했는지를 편지에 꼼꼼하게 적어 두어 웃음을 자아냈다.

아이가 어미와 아비 사이를 오가며 심부름을 한다고 애를 쓴 것이 무척 기특했다.

아스델 또한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직접 그린 그림을 선물로 보냈다.

아스델은 세 돌이 지나 단단한 파스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허락받은 이후로 내 생일마다 꼬박꼬박 나의 초상을 그려 주고는 했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할 것이 많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참 솜씨가 좋았다.

동생들의 편지가 하도 어여뻐서 들고 다니면서 동무들에게 보여 주며 자랑을 했다.

“와, 이게 뭐예요? 귀여운 분홍색 사자네!”

“얼굴을 파란색으로 칠해 둔 게 무척 귀엽네요. 미카엘 동생도 파란색을 좋아하나 봐요.”

“손에 이건 꼬리야?”

“⋯접니다. 이건 검이고.”

잠시 멈칫한 아이들이 크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아, 농담인 거 알지. 진짜 똑 닮았다. 얼굴만 파란 줄 알았는데 눈도 파랗네.”

“장난, 장난쳤던 거예요. 너무 부러워서. 아스델이 미카엘을 그려 준 거라고요? 귀엽다.”

아이들이 한참 그림을 칭찬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벤자민이 크게 부러워하며 저도 시커먼 형들이 아니라 동생을 가지고 싶다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 마리앤은 저를 이뻐해 주는 오빠가 가지고 싶었다고 쫑알거렸다.

미하엘과 아스델이 내 동생으로 태어난 것이 참 다행이었다.

그렇게 별일 없이 시월을 맞이했다.

같은 시간표라도 시험이 있는 달에는 무척 분주하여 정신이 없지만, 시험이 없는 달에는 한가하고 여유로웠다.

마엘로 샌슨은 언제나처럼 본받을 만한 무인의 모습으로 단단하게 자리를 지켰고, 위르겐 카이저는 실생활 아티팩트의 종류에 대한 강연을 시작했다.

더글라스와 볼더는 여전히 단전을 빚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점혈법의 구조와 원리, 그리고 각 혈도의 쓰임에 대해 기록하고 시험하는 일에 몰두했다.

칼립스 아그리젠트 교수도 건강을 되찾았다.

지난주에 무척 괴로운 얼굴을 보였던 것과 달리 처음처럼 묵묵하고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을 보고, 쉐이든의 말이 옳았구나 싶어 조금 안심했다.

비반 오티프 교수는 말들의 건강을 돌보는 법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윌턴 로버츠는 다양한 자세로 비도를 던지는 법을 강의해 주었다.

나는 그가 비도를 투척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고, 나무나 서까래 위에 엎드리거나 몸을 숨겨서 비도를 던지는 것에 능한 사람인 것을 알았다.

아카데미 교수보다는 자객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시월의 야영지는 산으로 정해졌다.

위드로 공작가와 그림스베인 공작가를 양분하는 유일 산맥의 곁가지가 수도 언저리까지 뻗어 있어 접근성이 좋았던 덕분이었다.

세드릭 교수는 산에서 길을 잃거나 낙상하면 크게 다쳐 위험할 수 있다며 몇 번이나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일전에 유일 산맥의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기억이 있어 긴장한 나와 달리, 아해들의 반응은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제국기사단에서 수시로 순찰을 돌기 때문에, 수도 근처에서는 몬스터가 나올 일이 없어요. 기껏해야 산짐승 정도일까⋯.”

“멧돼지 나오면 또 미카엘이 잡아 주겠죠? 장작 넉넉히 챙겨야겠다.”

아이들이 태평하니 나 또한 그런가 보다 하고 어깨에서 힘을 뺐다.

지난달 야시장에서 샀던 사과는 이미 다 먹고 없으니 다시 사야겠다며 고구마와 밤의 개수를 헤아리는 아이들을 도와 묵직한 자루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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