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10)화 (110/176)

110.

어찌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인지, 화요일 고급 검술 시간에도 친한 선배들이 생일 선물을 챙겨 주었다.

루실라는 나를 닮았다며 손바닥만 한 분홍색 토끼 인형을 주었고, 맷 니코는 어디선가 쓸 일이 있을 거라며 아티팩트 보충용 마석 하나를 챙겨 주었다.

루베르는 엄지손가락 한마디만 한 로켓이 달린 목걸이를 선물로 주었는데, 그 안쪽이 텅 비어 있었다.

“이건⋯?”

“4형 방어막생성기야. 마석은 로켓 뒷면에 있고, 방어 술식은 로켓 내부의 문양에 새겨져 있어. 여기 빈 공간에 초상화를 넣어서 가지고 다닐 수 있어. 필요할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뜻깊은 선물이었다.

이번 겨울에 가족 초상화를 그릴 때는 이 안에 들어갈 만한 크기의 것도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루베르의 재력에 여유가 있는 것을 알아 그 값을 따지는 대신에 곧장 로켓 목걸이를 목에 둘렀다.

루베르가 걸쇠를 잠그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하여 순순히 맡겼다.

루실라와 맷이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치는 것이 우스웠다. 방어 술식이 새겨져 있다 하니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내가 선물을 받는 것을 보고 뒤늦게 내 생일임을 알게 된 다른 선배들이, 선물 대신에 좋은 것을 해 주겠다며 냅다 나를 들어 올려 높이 던져 띄웠다.

경지에 오른 무인들의 팔 힘이 대단했고, 내 몸이 작고 가벼워 생각보다 더 높이 올라가 우습고 재미있었다.

숨이 할딱거릴 만큼 웃고 나서야 도로 땅을 딛을 수 있었다.

* * *

오전 내내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 인사를 건네는 통에 혼이 쏙 빠졌다.

유난히 떠들썩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더글라스와 볼더를 만나러 갔을 적에는 소란에서 달아나는 모양새였다.

어찌나 정신이 없는지 머스탱의 교수실 문을 열 때까지도 귀가 얼얼했다.

“에른하르트 영식! 봐요, 이번에는 쇄골과 팔까지 이어지는 길을 다르게 해석해서 넣어봤거든요. 여기 이 인체 해부도를 보시면 지난번에는 제 몸에 새겨진 기억대로 A 루트로 진행했지만, 더글라스 교수님께서는 B 루트를 사용하셨다고 하니까.”

“어서 오세요, 에른하르트 영식. 샌슨 교수님께 이야기는 들었어요.”

“여어.”

내게 인사를 건네는 볼더의 목소리가 시끄럽지 않게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교수와 간단히 인사했다. 약속한 대로 마엘로 샌슨도 머스탱의 교수실에 자리해 있었다.

샌슨까지 셋이서 더글라스 머스탱 교수가 운기조식을 하는 것을 지켜봤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머스탱은 혈도를 따라 마나를 이끄는 것에는 성공하였으나 그 이끈 기운들은 단전에 자리 잡지 못했다.

사정은 메이지 볼더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대로 그들이 하는 모양새를 보고 내게 그 까닭을 물었으나 나 또한 막막하여 알 길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공심법의 진의를 깨닫지 못한 탓이 아닐까 싶었으나, 그 진의라는 것이 또 막막한 개념이라 내 짧은 말로 전달할 길이 없었다.

하늘을 담아야 하는데 마나를 끌어오고 있으니 이 어찌 되겠는가, 따위로 답해 보았자 광인의 말과 다르지 않게 들릴 것이었다.

그 하는 모양새를 보던 마엘로 샌슨이 흐으음, 깊은 침음을 흘리더니 더글라스 머스탱을 붙잡고 몇 가지를 물었다. 나도 함께 들으라고 한 소리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의 삼분지 일을 모르는 나로서는 마법 수업을 듣는 것처럼 얌전히 있는 수밖에 없었다.

“왜 오러가 아니라 마나 운용 방식을 사용하신 겁니까?”

“지난번에는 오러를 운용했었어요. 에른하르트 영식의 기운은 마법보다는 검에 가까운 기운이니까⋯. 하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단전’에 모이지 않고 흩어지더라고요. 그래서 혹시나 싶었죠.”

“게다가 이 ‘혈도’라는 것이 움직이는 방식이 오러보다는 마나 운용법에 가까운 형태로 섬세하기도 합니다. 여기 이 인체 도해를 보시면은⋯.”

마엘로 샌슨이 질문하고, 더글라스 머스탱이 대답하고, 메이지 볼더가 보충했다. 그리고 나는 얌전히 들었다.

창궁대연신공을 이런 방식으로 뜯어서 본 것은 나 역시 처음이라 신기하기만 했다.

내가 신공을 연마할 때는 개념적인 줄글로 배웠는데, 이들이 내게 보여 주는 것은 수학적 기호가 첨가되어있는 도식이었다.

틀린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어하였으나 불안은 그들의 몫이고 나는 거들어 주기만 하면 된다기에 몇 번이나 거듭하여 같은 말을 풀어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나마 메이지 볼더가 이런저런 자료를 미리 찾아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해 두었기에 설명이 쉬웠다.

한참을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마엘로 샌슨이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내가 정말로,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예, 교수님.”

“도대체 이걸 어디에서 배웠냐.”

“⋯.”

탄식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두 교수가 나를 배려하여 그동안 많은 것을 묵인해 주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나 자신도 나의 과거를 떠올릴 때면 가슴 한켠에 주저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를 모르는 탓이었다.

혹여 내가 허투루 말을 내어 큰 잘못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늘 나를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믿고 따르는 두 고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편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혼자 담고 있는 비밀의 무게가 무거워 힘겨울 적마다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솟았다.

나는 꺼낼 말을 고르기 위해 입을 몇 번 벌렸다가, 닫았다가, 애써 목소리를 냈다.

“⋯제가.”

“아니, 거기까지만 하자.”

“예?”

무어라 더 말하려던 나를 마엘로 샌슨이 깔끔하고 단호하게 막았다.

나는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 마엘로 샌슨이 왜 막아섰는지 알았다. 메이지 볼더가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내 편의를 돌보지 않는 이가 동석해 있다는 것을 의식했으리라.

“그렇게 끙끙 앓으라고 한 말은 아니야. 다음에, 말하고 싶어지면 말해.”

“하지만 지금 에른하르트 영식이 내공심법의 원류에 대해 알려주면 중요한 키포인트가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메이지 볼더. 계약 조건은 기억하고 계실 거라고 믿습니다.”

다행히 더글라스 머스탱 교수가 바로 그를 막았다.

샌슨은 침음하더니 제 머리칼을 양손으로 흩었다.

나는 이때, 나도 모르게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을 털어놓을 뻔한 것에 놀라 간담이 서늘했다.

저도 모르게 털어놓으려 했던 것은 마엘로와 더글라스를 그만큼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이 땅에 내렸는지 해답을 찾아줄지도 모른다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허나 말할 길이 막힌 지금, 바로 대답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다 싶었다.

살아 있는 인간이 죽은 뒤를 안다는 것이 그 얼마나 두렵고 괴기한 일인가. 쉬이 준비 없이 털어놓을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화경의 고수와 그에 필적하는 고수가 내 편에 서 있었다. 나쁜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아 든든했다.

그래, 내 눈에 보이는 그들은 내 또래의 사내들이었다.

믿을 수 있는 동기가 생긴 것 같아 안도했다.

무림맹의 깃발을 높이 세우고 그 아래에 모였던 수많은 군웅(*같은 시대에 활약한 여러 영웅)을 볼 적에도 이런 기분이었다.

모든 일이 정의롭고 공정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약 없는 믿음이 중단전 어림에 뜨뜻한 열기로 고였다.

우리는 다시 화제를 돌려 창궁대연신공을 분해하여 한 토막씩 해석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확실히 마엘로 샌슨은 뛰어난 검수로서, 더글라스나 볼더와 다른 시각으로 툭툭 던지는 것에 능했다.

중원의 그 어떤 무인이 일주천에 몇 초의 시간이 걸리고 그 속도가 달라질 때마다 기의 양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연구해 보았을까.

이야기를 나눌수록 기묘하고 신기하여 절로 감탄을 쏟아 내게 되었다. 한마디를 하면 열을 아는 치가 셋이 모였으니 말 한마디 할 적마다 고심하고 조심했다.

차근히 운기조식에 대한 해석을 들은 마엘로 샌슨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리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의 큼직한 체구 탓에 푹 소리를 내며 소파가 깊게 꺼졌다.

“이건, 저는 쓸 수 없는 방법입니다.”

“어째서요?”

“제가 이미 경지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으음, 두 분은 아시겠지만⋯.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건 대기의 모든 마나를 오러로 활용할 수 있는 경지이기 때문에, 말하자면 이미 체외에 ‘단전’이란 것을 가지고 있는 셈이라서요. 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게 맞겠네.”

이미 자연의 기운을 수족처럼 사용할 수 있는데, 그중 일부만 몸에 담아 사용하는 것은 지금의 경지에서는 소꿉장난과도 같은 일이라는 말이었다.

세상 만물을 단전처럼 사용한다는 말에 다시 한번 화경의 경지에 대한 꿈이 커졌다.

중원에서는 내가 부족하여 이루지 못하였으나, 시어런의 법칙을 따라 꾸준히 행한다면 나 역시 언젠가는 화경에 발을 디뎌볼 수 있을 것이다. 가슴이 크게 뛰었다.

마엘로 샌슨의 설명을 차분히 듣던 메이지 볼더가 격양된 태도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서슬에 서류 다발이 흐트러져 떨어졌지만, 어차피 마법으로 정리할 것을 알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보조 동력 장치처럼 사용될 수 있습니다! 만약의 만약에 외부의 마나를 끌어올 수 없게 되는 극한 상황에 처하면 이 내공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라고요!”

“⋯언제 그런 상황에 처하겠습니까?”

“그, 그건.”

“대륙에 마나가 고갈될 일이 생기면 세계 멸망이죠⋯.”

마엘로 샌슨과 더글라스 머스탱이 번갈아 가며 부정적인 답변을 하여 볼더를 위축시켰다.

어쩐지 등골이 오싹했다. 세계가 멸망한다니, 상상하지 못한 단어의 조합인 탓이었다.

대개 중원에서 멸한다는 표현은 마을이나 가문의 일에나 쓰였다. 과연 배운 것이 많으니 머릿속에 담아두는 단위도 거대하다 싶어 뻣뻣하게 굳은 내 목덜미나 주물렀다.

마엘로 샌슨이 그런 나를 돌아보며 위로하듯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의 경지까지는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일단 완전히 수족처럼 다룰 수 있는 기운이 일정량 이상 존재한다는 건 대단한 거고, 그 위 단계에 올라서 자연의 오러를 다룰 때도 미리 연습해 보았으니 수월할 거야.”

“⋯그렇습니까?”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걸. 내 제자 중 둘이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되다니, 엄청나잖아.”

아직 초절정에도 닿지 못한 몸으로 화경을 논하고 있는 것은 우스운 일이겠으나, 마엘로 샌슨의 안목을 믿었다.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노력하겠습니다.”

깍듯하게 대답하자, 어쩐지 더글라스 머스탱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참스승을 둘이나 옆에 끼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샜다.

잠시간 휴식 시간을 갖고, 다시 펼쳐진 보고서들을 주워 고칠 것을 고치고 일정을 정리했다.

메이지 볼더가 다음 시간에는 골렘을 가져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이 무척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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