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시험이 있는 달의 넷째 주는 휴강을 하는 일이 많았다.
월요일 오후마다 듣는 마법의 장비, 아티팩트 수업이 그랬다. 이 비는 시간에 무엇을 할 지는 정해져 있었다.
초급 검술 수업이 끝나자마자 마엘로 샌슨에게 오후에 독대할 수 있을지 청했다.
“매일 보는데도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예.”
“하이고⋯.”
당연한 일 아닌가? 즉답했더니, 샌슨이 언제나처럼 장난스럽게 얼굴을 찡긋거리며 시간을 내 주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일전부터 나는 창천무애검법을 전부 풀어 헤쳐 불필요한 동작을 없애거나, 다른 검식과 재조합하여 차근차근 새로운 검법을 창안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검식은 상황에 맞추어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는 탓에, 원본에서 무언가를 더하고 뺀다고 하더라도 아류일 뿐, 원류가 되지 못했다.
때문에 정검을 창안하기 위해서는 본이 되는 사상이나 기질이 필요했다.
남궁의 검이 하늘을 본뜨고, 화산의 검이 까마득한 절벽과 매화를 본뜨고, 종남의 검이 묵직하게 가라앉은 바윗돌과 돌산을 본뜬 것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무언가를 축으로 삼아야 했다.
내 축은 세상이다. 시어런에 본을 두었다.
늘 하늘을 그렸던 나였다. 이제 땅을 굽어보고 싶었다.
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와 자애롭고 너른 땅을 훑고 나 자신을 돌아보고자 하였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칠 때는 내가 이 땅에 처음 났던 때처럼 강하고 매섭게 섬광처럼 떨어지도록, 바닥을 훑을 때는 다정하고 온후하여 은밀하도록, 다시 내게 돌아올 때는 반듯한 뜻을 담도록 했다.
제1식부터 제5식까지의 흐름이 그러했다. 샌슨은 내 동작을 유심히 보더니 곧장 자신의 몸을 사용하여 같은 식을 펼쳤다. 빠르게, 느리게, 더욱 느리게.
세 차례나 고절한 무인이 펼치는 검형을 보고 있자니 미흡한 부분을 바로 짚을 수 있었다.
“2식에서⋯.”
“2식에.”
둘이 동시에 짚어 말하고 나서 잠시 웃었다.
내가 경청하는 자세로 바로 서자 마엘로 샌슨이 말을 이었다.
“빠르게 아래로 떨치는 것은 좋은데, 손목에 부담이 많이 가는 자세야. 네게 맞는 유일한 검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신체 어느 한 부위에 힘이 집중되는 것은 좋지 않은데, 다른 이에게 전해 주고 싶은 목적으로 만든다면 이건 고쳐야겠지.”
“예.”
“또 그다음에 아래로 훑는 동작은⋯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잘 모르겠는데, 미카. 이것도 대인전을 상정한 검술이야? 이 높이에서 발목이 동강 날 몬스터는 오크 정도뿐인데, 글쎄다.”
나는 아주 잠시 머뭇거렸다가 얌전히 대답했다.
“예.”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너무 무서워하지 마.”
샌슨의 말에 놀랐다.
깨달음은 늘 섬광처럼 찾아오는 법이었다. 나는 몬스터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했다.
저 높은 산에 있는 몬스터가 우르르 밀고 들어와 내 사람들을 해치기에 시어런은 너무나도 강대하고 정당한 제국이었다. 하여 곁의 사람이 변심하여 칼을 품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 여겼다.
나는 사람을 많이 죽였고 또 사람에게 죽임당했다. 여즉 몬스터를 접해본 적이 없는 내가 창안하는 검식이 사람을 노리는 것은 당연했다.
시어런의 나를 담으려 애썼지만, 중원의 내가 담겼다.
그것을 샌슨의 입을 통해서야 알았다.
고심하는 내 어깨를 위로하듯 투덕거린 샌슨이 말을 이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시어런 제국을 벗어나면 대인전도 종종 일어나니까. 이전에 사용하던 검법보다 살기가 많이 빠지기도 했고⋯. 어쨌든 전체적인 틀은 나쁘지 않으니, 차근차근 다듬어 보자고.”
“⋯예.”
중원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번뜩이는 머리나 무쇠 같은 몸은 가져 본 일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반복적으로,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하여 명성을 쌓고 실력을 쌓았다.
아주 작은 돌로 쌓아 올리는 돌탑처럼, 틈 없이 빼곡하게, 그러나 대단하지 않게 지켜 온 검이 나를 빚었다.
지금도 그랬다.
일검을 휙 내려쳐서 새로운 검식을 창안하는 멋들어진 모습은 내게 맞지 않았다.
한 땀 한 땀, 손과 발의 세밀한 각도를 차분하게 따져보고 실을 잣듯 새끼를 꼬듯 잇고 또 이었다.
마엘로 샌슨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한 시진을 수련하면 이 각은 휴식하도록 했다.
두 시간마다 삼십 분의 휴식을 취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내공과 운기조식에 대한 이야기도 입에 담게 되었다.
이전에는 설명할 길이 없어 입을 다물었지만, 최근에 더글라스와 볼더의 덕으로 시어런의 언어로 풀이하여 설명을 들은 일이 많아 해설이 쉬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 마엘로 샌슨이 흐음, 침음성을 내더니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지난 학기에 머스탱 교수님께 들은 적이 있는데, 완전 잊고 있었네. 서로 시간이 안 맞다 보니⋯ 그래, 화요일마다 그 마법사를 부른다고?”
“예. 매주 화요일 오후에 머스탱 교수님과 메이지 볼더에게 운기조식을 가르치거나⋯ 운기조식법을 문서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내일 나도 한 손 거들어 줘도 될까?”
“예, 물론입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려야 할 일입니다.”
말을 꺼내 보길 참 잘했다 싶어 절로 입이 벙긋 벌어졌다.
새벽에도 오전에도 오후에도 내내 수련으로 보낸 탓에, 저녁 식사 즈음이 되어서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꾸준한 수련으로 또래에 비해서는 월등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지학이 되지 않은 몸이었다. 난이도 높은 검형을 반복해서 긋는 행위에 피로가 쌓였다.
식사 전에 얼른 씻고자 방문을 여는데, 옆방 문이 불쑥 열리더니 쉐이든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미카! 이제 들어와?”
“음. 식사는 했고?”
“아니, 너 기다렸지. 얼른 씻고 나와.”
“그러마.”
하여간 정이 참 많은 아해였다.
녀석이 배곯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얼른 피로를 물로 씻어 냈다. 식사를 마치고 운기조식을 하고 그 스트레스인가 스트레칭인가 하는 것을 해 봐야겠다 마음먹었다.
* * *
그러나 삶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쉐이든은 식당이 아니라 제 방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세 가지 이유로 놀랐다.
첫 번째는 쉐이든의 방에 평소에는 본 적 없던 꽃이며 종이 장식들이 소란스럽게 들어차 있어 놀랐고, 두 번째로는 친밀한 아해들만 아니라 얼굴만 겨우 익힌 소년 소녀들도 방 안에 가득하여 놀랐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생일 축하해, 미카!”
“에른하르트 영식, 생일 축하해!”
테이블 위에 놓인 커다란 초콜릿 케이크의 위용을 보고 놀랐다.
나는 당황하여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그랬다. 아주 덥지도, 아주 춥지도 않은 선선한 계절. 9월의 마지막 주에 늘 크게 연회를 열어 축하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동안에는 생일 연회를 따로 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주인공이 없는 빈 생일 파티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아카데미는 대부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이들이 모두 겪는 일이기 때문에 졸업 이후 처음 맞는 생일에 성년식을 크게 한다고 했다.
어안이 벙벙한 나를 아이들이 잡아끌어 케이크 앞에 세웠다.
큰 소리로 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자르라며 길쭉한 전용 나이프를 쥐여 주는 것까지 에른하르트 가에서 하던 연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잘라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옆에 따라붙은 쉐이든이 즐거운 낯으로 종알거렸다.
“사실 네 생일은 내일이지만, 열두 시 정각에 부르려고 하면 안 나올 것 같아서 미리 불렀어. 시험이 끝나고 다들 여유 있을 때가 생일이라서 딱 좋았지.”
“⋯아⋯.”
“왜 표정이 그래? 정말 몰랐어?”
“음.”
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시종들의 솜씨에 아이들의 손이 더해진 모양인지 장식 여기저기에 미흡한 구석이 있었다. 그것이 더욱더 감격스럽게 다가왔다.
저마다 자그마한 선물이나 카드 따위를 손에 든 아해들이 건네주는 것을 모두 받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일 년이 거의 지나가도록 나는 이런 것을 생각지도 못해서 다른 아이들의 생일을 챙기지 못하였는데,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하는 것이 민망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아이들 중 몇이 다음 해 생일에는 나를 초대하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기에 꼭 참석하겠다 손가락을 걸고 약속도 했다.
나중에 쉐이든에게 물어 생일 축하 명단이라도 만들어야겠다 결심했다. 이 또한 정을 나누는 재미이리라 생각하니 귀찮기는커녕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테이블 옆에 보조 테이블을 몇 개나 두고 여러 음식을 쌓아 두었다.
큰 접시에 놓인 요리들을 아이들 모두가 웃고 떠들며 나눠 먹었다.
일전에 키아드리스와의 대련에서 이겼을 적에 맛보았던 포도 음료를 이때에 다시 보았다. 축하할 일이 있을 적마다 마시다 보니 더욱 정감이 가는 맛이라, 몇 병 따로 구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의자가 부족하여 바닥에 앉거나 벽에 기대어 서야 했으나 맛있는 음식이 있고 또래의 친구들이 있으니 불편하지 않았다.
아예 소파를 한켠에 밀어 두고 바닥에 둥그렇게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음료가 든 잔을 높게 부딪쳤다.
적당히 배를 채운 뒤에는 테이블 위에 빈 접시들을 올려 두고 다 같이 춤을 추기도 했다.
사내아이들이라면 모를까, 여아들과 손을 잡는 것이 꺼려져 몸을 숨기자 아해들의 웃음소리가 드높아졌다.
내 수줍음을 타는 것이 아니라 춤을 잘 추지 못해 그런 것이다 몇 번이나 변명을 했다.
아이들이 가져온 선물을 열어 보고 몸에 걸쳐 보기도 했다.
대부분의 선물이 또래가 쉽게 구할 수 있는 종류의 장난감인 것도 괜찮게 여겨졌다.
나중에 데미안이 귀띔하기로, 일부러 금액에 상한선을 두었다 하기에 감사 인사를 했다. 가문 대 가문이 아니라 친구로서 받는 선물로는 이것이 적당했다.
해가 지고도 자정이 넘을 때까지 모두가 흥이 넘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굴었으나, 자정에서 삼십 분이 딱 지나자마자 기숙사 사감이 와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본래 남자 기숙사에 여학생이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지만, 생일 파티를 이유로 아해들이 조르고 졸라 겨우 허락을 받은 것을 이때 알게 되어 무척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립이 조금 넘은 젊은 낯의 기숙사 사감은 어질러진 실내를 한 번 훑어보고, 쉐이든에게 내일 시종들을 불러줄 테니 오늘은 일찍 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내 어깨를 두 번 툭툭 두드리더니 빙긋 웃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에른하르트 영식.”
“감사합니다, 사감님.”
감사한 마음에 절로 깍듯해졌다. 간단히 묵례하자 사감은 크게 웃으며 다시 한번 축하 인사를 건네고 내 방문을 열어 주었다.
어쩐지 잠들기 직전까지 가슴이 수런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