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새순처럼 노란빛을 띠는 연둣빛의 음료는 그 맛이 무엇인지 모르게 달았다. 갈증 해소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달달한 맛이 먹을만해서 별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아카데미 내의 모든 학생들이 내가 단 음식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굳이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나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내년에도 마엘로 샌슨 교수님께 수업을 듣고 싶은데, 2학년은 중급 검술을 들어야 한다기에 걱정이 많습니다. 샌슨 교수님은 올해에 초급 검술과 고급 검술만 가르치셨으니까⋯.”
“내년이면 샌슨 교수님께서 중급 검술과 고급 검술을 가르치실 테니까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걸.”
“음?”
“지금 검술부 정교수님이 샌슨 교수님을 포함하여 네 분이 계시는 건 알고 있어?”
“⋯.”
“지금 1학년 검술부 담임 교수님이 마엘로 샌슨 교수님이잖아. 2학년, 3학년 검술부는 담임 교수님이 따로 계시거든. 그리고 만약 교수님들 중 한 분이 일이 생겼을 때 담임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도록 정교수님 한 분이 종종 아카데미에 출근하고 계셔.”
“허어⋯.”
내가 또 생각이 짧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기야 검술부가 1학년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당연하게 마엘로 샌슨이 전 학년을 맡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화경의 고수도 몸이 하나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 탓이다.
각 학년의 담임이 다른 것과 내년에 마엘로 샌슨이 중급 검술을 맡는 것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몰라 잠자코 있었더니 루베르가 곧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대어 주었다.
“대개 한 학년의 담임을 맡으면, 그 학년이 졸업할 때까지는 해당 교수님이 전담해서 가르치시는 편이야. 나머지 세 분도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강자이시기 때문에, 사실 초급 검술과 중급 검술을 가르치는 데는 차고도 넘치는 분들이시거든. 나도 담임 교수님은 샌슨 교수님이 아니야.”
“허어어⋯.”
“물론 에른하르트 영식은 마엘로 샌슨 교수님과 아주 잘 맞지만, 각 교수님들마다 교수법이 다르기 때문에 호오가 있는 편이야. 예를 들어서⋯. 검법의 종류나 각 검법의 특징에 대해서 배우고 싶은 학생이라면 샌슨 교수님과 무척 안 맞았을걸.”
“검술을 이론만 배워서 뭐 합니까?”
“연구를 하겠지?”
“⋯아.”
당연한 일이라는 듯 되돌아오는 대답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랬다. 더글라스 머스탱의 경우도 그렇지 않은가. 검술을 익혔으나 자신뿐만이 아니라 수십, 수백이 함께 강해지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시어런을 떠받치고 있었다.
나는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벙긋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잠시 내가 생각할 시간을 준 루베르가 빙긋 웃으며 달래듯 말을 이었다.
“초급 검술과 중급 검술은 그래서, 보통은 담임 교수님의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시간표가 짜여 있어. 교수님과 학생의 성향이 맞지 않을 때는 다른 교수님의 수업을 들을 수도 있지만, 다른 학년과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하고.”
“⋯음.”
“물론 고급 검술의 경우에는 소드 마스터가 될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만 자격 요건이 되기 때문에, 마엘로 샌슨 교수님이 매해 전담하고 계시지만⋯. 에른하르트 영식이 원한다면 졸업할 때까지 내내 마엘로 샌슨 교수님의 수업만 들을 수도 있을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습니까.”
“물론 비도술 수업 같은 식으로⋯ 메인 검법이 아닌 다른 것을 가르치는 부교수님들이 많으니까, 그건 그것대로 잘 골라 들으면 될 테고. 나도 적당히 들어 알고 있는 게 있으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
“예.”
그러나 지금 당장은 더 궁금한 것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느긋한 마음으로 즐긴 디저트 접시가 셋을 넘어가니 더 이상 탐이 나지도 않아, 다른 온실들을 보러 가자 했더니 루베르 역시 기꺼이 몸을 일으켰다.
이전에는 문이 닫혀 있어 보지 못했던 공간이 열려있어 그 앞을 기웃거렸다.
곧 관리인이 나와 문을 열어 주기에 인도하는 길로 걸었다. 둥근 형태의 다른 온실들과 다르게 첨탑처럼 뾰족하고 세모난 온실에 들어서자 그물망으로 짜인 문이 또 있었다.
찌르르 찌르르 귓전에 새소리가 닿았다. 수백 마리 새들이 지저귀며 저들끼리 몰려 놀았다.
시어런의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인세의 것이 아닌 풍경이었다.
온갖 빛깔의 기화요초가 크고 화려한 잎을 길게 늘어트린 사이로 화려한 깃을 뽐내는, 동그랗고 작거나 길쭉하고 큰 새들이 날아다녔다.
보드라운 깃을 가진 녀석들은 사람에 익숙한 모양인지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 손을 펼치면 손바닥에 올라앉고, 고개를 들면 어깨에 걸터앉았다.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품 안에 안겨드는 것을 떠받치기 위해 두 팔을 앞으로 모았다. 뺨을 비비는 것에게 순순히 뺨을 내어 주면서도, 눈이라도 쪼이면 큰일이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유순하게 구는 새를 개나 고양이 어르듯 목 아래를 쓸어 주었다.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감촉에 경탄했다.
돌아보니 두 발로 걷는 것은 나와 루베르뿐이고, 이 기묘한 곳에 머무는 것들은 죄다 날짐승인 모양이었다.
가슴께까지 높게 올라온 안내판의 글귀를 눈으로 따라 읽었다.
오후 다섯 시 이후로는 새들의 쉬는 시간입니다. 먹이는 안내소에서 구입이 가능합니다. 새들이 놀라지 않게 조용히 머물러 주세요. 문을 열 때는 새들이 따라 나오지 않는지 확인해 주세요⋯.
내 품에 안긴 크고 묵직한 새는 까마귀를 닮았다.
그 꽁지깃에 여러 색의 다른 깃털이 꽂혀 있는 것이 어여쁘고 신기하다 여기다가, 긴 공작 깃털 하나가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웃었다. 참 재주도 좋지. 그 날개깃 사이를 어르듯 긁어 주었다. 녀석이 입을 짝 벌리고 크게 하품했다.
나는 새가 하품을 하는 것을 이날 이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 우습고 신기해 루베르를 돌아보았더니, 녀석 또한 제 어깨 위에 날짐승 하나를 얹은 채였다.
“보았느냐?”
“어? 어⋯ 어어. 뭐, 뭐를?”
“지금 이 아해가⋯.”
말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하대를 한 것을 알았다. 서둘러 어미를 고쳤다.
“하품을 하는 모습이 참 귀엽지 않습니까.”
“⋯아아. 맞아, 어, 나도 봤⋯ 어.”
루베르가 홀린 듯 까만 눈을 깜박이는 것을 보았다.
내가 보기에도 이렇게 벅차고 황홀한 풍경인 것을, 이 어린 아해가 보기에는 또 어떨까 생각하였더니 절로 기분이 들떴다.
나는 품 안에서 비비적거리는 검은 것을 어르다가, 비적이며 날아갈 태세이기에 순순히 놓아 주었다.
먹이를 주는 줄 알고 벌린 주먹 사이로 뛰어드는 것도 있었고, 난데없이 어깨에 훌쩍 앉아서 지저귀는 것도 있었다.
귀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길이 잘 든 짐승을 떼거리로 본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내가 아는 그 누구를 데려다 놓아도 기쁘고 즐거울 것을 알았다.
다시 돌아본 루베르의 머리 위에 샛노란 새가 둥지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귀여운 마음에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여전히 얼빠진 낯을 한 소년이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민망해했다.
“참 잘 어울리십니다. 머리 장식을 꽂아도 어여쁠 테지요.”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왜요. 조금 더 올려 두고 있어도 괜찮지 않습니까.”
“고개를⋯ 돌릴 수가 없어⋯.”
날 수 있는 것을 얹어 두고서도 혹여 새가 떨어져 다칠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참하고 착했다. 녀석의 머리 위에 얹힌 샛노란 것을 조심히 감싸다가 멀리 날렸다.
마음이 들떠 새 먹이를 사다가 흩뿌리고 먹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른 온실로 향하는 중에도 조금 전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픽 웃음이 샜다. 옷깃에 붙은 깃털을 떼어내어 손에 모으며 문득 입을 열었다.
“선배는 노란 것이 잘 어울립니다.”
“⋯노란 것?”
“아까 그 새나, 병아리 같은 것들.”
“⋯내가? ⋯내가?”
“예.”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는 것이 무척 귀여웠다.
다시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결대로 정리해 주었다. 자꾸만 손이 가는 건 이 녀석이 머릿결이 좋은 탓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조금 전 쓰다듬고 어르며 놀던 새들도 꼭 이런 감촉이었다.
부끄럼탐을 하는 아해를 끌고 여기저기 좀 더 구경을 하다가 잠시 쉬어 가자 하여 이전에 마리앤이 그의 연인과 함께 앉았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눈앞으로 탁 트이도록 너른 못과 노랫소리에 맞춰 위로 치솟는 분수가 보였다.
그 물이 솟아오르는 것도 신기했으나, 가느다란 물줄기 여럿이 동시에 떨어지며 부서지는 모습은 폭포수를 보는 것처럼 시원했다.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다가, 루베르가 마실 것을 사 오겠다 일어서기에 허락했다.
일전에는 어린 동무들과 웃고 떠드느라, 기쁘게 웃는 마리앤을 바라보느라 넋이 빠져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오늘은 퍽 많이 보았다.
내가 이렇게 크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지금껏 모르고 살았다. 홀로 남아 사위가 적막해진 뒤에도 내내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알싸한 풀 내음이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귀를 기울이면 수면에 몸을 내던지는 물방울 소리가 검을 내치는 소리만치 경쾌하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악기 소리, 소리높여 웃는 웃음소리, 머리 위로 부서져 내리는 따사로운 햇볕⋯.
너무 완벽하여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과 규율에 대해 배우고 또 배우고 있지 않았더라면 견디지 못했을 행복이었다. 고개를 젖혀 얼굴에 빛을 받았다.
내 부족함을 깨달을 적마다 빨리 자라고 싶어 안달이 났으나, 또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익숙한 발소리가 자박자박 가까워지다가 잠시 멈췄다.
나는 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쉬워 눈을 뜨지 않았다. 루베르는 한참을 일 장 거리에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으나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다가온 녀석이 건넨 음료는 아까와 같이 달짝지근했다. 우리는 고요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 * *
다음날에는 도서관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시험이 끝난 주에도 공부를 하는 것이 독하다며 혀를 내두르던 동무들이 하나둘 야영 보고서 쓸 것을 가지고 모였다.
처음 내 곁에 앉아 있던 루베르는 쉐이든에 이어 데미안까지 내 앞에 앉자 바쁜 일이 있다 하여 먼저 보냈다.
제니와 이반도 소식을 듣고 찾아와 소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다 같이 둘러앉아 여유 있게 과제를 끝마치고 나니 마음이 낙낙하니 여유로워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