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107화 (107/176)

107.

주말에는 시험 기간 동안 소홀하게 대했던 루베르와 나들이를 나왔다.

아해가 미리 시험이 끝나면 주말을 함께 보냈으면 한다 청해 왔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심란하여 조용히 다니고 싶다고 하기에 다른 학우는 부르지 않았다.

조용한 것이 좋아 나와 다닌다고 말했으니 구태여 없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되어 편했다.

안 그래도 일전에 가 보았던 식물원이 무척 마음에 들어 한 번 더 가 보고 싶었기에 잘됐다 싶기도 했다.

둘이 마차를 타는데 앞이 아니라 옆자리에 앉기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멀미 탓에 정방향으로 앉는 것이 좋다 하여 내가 맞은편으로 옮겨 앉았다.

아이도 나도 몸이 크기 시작하여 나란히 앉는 것보다는 이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여겨 한 행동이었는데, 못내 서운해하는 것이 우스웠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어? 아니, 내 표정 이상해?”

“아뇨. 별로.”

이렇게 아해들이 나를 친근하게 대할 적마다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요즈음 들어 내 외양의 덕을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전생에는 몸이 크고 성정이 무뚝뚝하여 가까운 아해들도 나를 어렵게 대하거나 공경하는 자세를 취하였는데, 지금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많은 선배와 동기들이 자주 내 옆에 기대어 있으려 하거나 어깨에 팔을 걸치거나 머리를 쓰다듬거나 하였다. 내가 가지고 놀던 병아리 인형 같은 취급이었다. 아마 내가 작고 어린 탓일 터였다.

크게 싫지는 않았으나 어색하긴 했다.

별말 없이 식물원 앞에서 내렸다.

루베르가 미리 표를 구해뒀다며 내 손목에 띠를 둘러 주었다. 기다리지 않고 바로 정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을 것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한적했다. 주말 아침에는 늦잠을 자는 사람이 많아 그렇다는 설명에 짧게 웃었다.

나는 다시 태어난 후에는 한낮까지 푹 자는 일이 없었다. 늘 마음 한켠이 조급했던 탓임을 이제는 알고 있었지만 몸에 익은 습관을 털어내지 않았다.

이전에는 수업이 다 끝난 저녁 무렵에 도착하여 몰랐지만, 날이 밝으니 온실 안쪽까지 깊숙이 든 햇빛이 사방에서 무지갯빛으로 산란하여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아름다움이 황홀하여 쉬이 걸음을 걷는 중에도 자꾸만 멈춰 서게 되었다.

이전과 꼭 같은 길을 따라 걷는 중에도 빛이 다르니 나무의 생김도 달랐다. 재잘대며 이것을 보라 저것을 보라 삿대질하는 아해들이 없으니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공원 관리인으로 보이는 치가 어느 공터에 우르르 곡식들을 흩뿌리자 지저귀던 새들이 모여들어 낱알을 쪼았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주의 깊게 팻말 하나하나를 읽고 있으니 내 옆에서 나란히 걷던 루베르가 슬쩍 말을 붙였다.

“여기 열매가 열렸는데, 혹시 봤어?”

“음?”

잎사귀 뒤쪽을 들춰 확인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모르고 있던 것이었다. 푸르고 반들반들한 잎을 가진 사철나무의 열매가 그 잎사귀와 꼭 같은 녹빛이었다.

내가 신기해하며 감탄하자 아해가 여기도 있다, 여기도. 하고 조곤조곤 속삭이며 손끝으로 짚어 주었다. 나도 몇 개를 더 찾아내어 루베르에게 알려 주니, 크게 기뻐했다.

이렇게 소소한 것으로 쉽게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늘 크고 너른 것을 아름답다 여겼는데, 이렇게 작고 가엾게 생긴 것들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큰 나무 아래 떼 지어 피어나는 풀꽃이 참 귀하고 어여쁘다.

사람도 그랬다. 크고 난 인물 하나의 몫으로 주어진 세상이 아닌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잔잔한 풀꽃 같은 인물이 그리도 많고 중했던 것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겨야만 하겠다.

그런 이야기를 입에 담자, 아이는 제왕학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 또한 그런 것을 잊지 않고 마음에 깊게 새겨두겠다 하기에 잘 생각했다 등을 쓸어주었다.

그렇게 나란히 걸으면서 사철나무 열매와 같은 어여쁜 것을 찾아 서로에게 알려 주기 위해 안력을 돋웠다. 덕분에 나무 둥치에서 자라는 이름 모를 버섯도 보고, 갈라진 나무껍질 틈에 달려 있는 곤충의 허물도 보았다.

어디선가 먼 곳에서 악단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보다 가까운 곳에서 새가 울었다. 뺨에 닿는 시선이 간지러웠다.

이제 루베르가 나를 바라보는 것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수업 시간 중에도, 혹은 식사를 하는 중에도 문득문득 고개를 들 적마다 아이가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탓이다.

어색할 것도 없이 녀석을 돌아보았다. 화들짝 놀라 반걸음 뒤로 물러서는 아이의 낯이 붉은 것을 또 보았다.

이미 서로의 간격을 보지 않아도 아는 것이 당연한 경지였다. 루베르가 내 어깨 뒤로 바투 붙었던 것을 모르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는 부딪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화들짝 놀라는 아해를 달래 주기 위하여 그 녀석의 어깨를 두어 번 도닥여 주었다.

한 번은 이야기해야겠다 싶어서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온실을 한참을 구경하고 나서 두 번째 온실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왜 자꾸 쳐다봅니까.”

“⋯불편해?”

“가끔은.”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또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추는 녀석의 등허리를 살짝 밀었다.

내 전생의 몸이었다면 어린 아해를 감싸 달래기에 적절한 행동이었을 것을, 지금의 손이 자그마해 그저 녀석의 등에 텁 하고 손을 올린 것처럼 보이는 꼴이 우스워 손을 거뒀다.

계속 걸으라는 소리인 것을 알아듣고 다시 걸음을 느릿느릿 옮기면서 녀석이 서운한 목소리를 냈다.

“⋯그럼, 보지 말까⋯?”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저 이유가 궁금해서.”

흘긋 올려다보니, 아이는 이미 이마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음 온실은 봄꽃 온실이었다. 달큼한 내음이 번지는 사이에서 붉게 물든 루베르는 저 스스로 꽃인 것처럼 보였다.

희고 까만 아이가 붉게 피어 꽃망울 틔우는 소리처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예뻐서, 그냥, 시선이 가.”

“아.”

그런가.

여전히 제 얼굴에 대한 평은 실감이 나지 않았으나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제 머리칼의 색이 옅은 탓이겠거니 하였다. 시어런 제국에서는 옅은 머리 색을 미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괜히 멋쩍은 마음이 들어 제 머리를 쓸어 넘기자, 손가락 사이에 구불거리는 터럭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흐음.”

“싫어⋯?”

“별로 신경 안 씁니다.”

“어. 그, 그래?”

“예. 뭐 선배가 좋으시다면야.”

아이는 무어라 더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결국에는 제 입술을 꾹 깨물며 조용해졌다.

그 모습이 가엾고 귀여워 손이 먼저 나갔다. 녀석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다가 문득 녀석이 얌전한 것이 퍽 익숙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여, 녀석의 아비도 이렇게 자주 머리를 쓰다듬어 주느냐 물었다.

녀석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를 이렇게 다루는 것은 에른하르트 영식밖에 없어.”

“그렇습니까?”

“아, 아니. 좋다는 말이야.”

“예.”

손을 떼려 했더니 냉큼 내 손목을 붙잡아 더 쓰다듬어 달라 머리를 들이대는 것이 귀여워 그만 웃어 버렸다.

하지만 꼴이 우스울 것 같으니 그만하고 가자 찬찬히 달래어 다시 걸었다.

팔다리가 짧고 뼈와 근육이 나약한 것은 불편한 일이어서 얼른 키가 크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다.

오늘은 더했다. 녀석보다 키가 크다면 머리를 쓰다듬거나 어깨를 두드리는 일이 좀 더 편했을 터였다.

이후에 나이가 더 들어도 녀석과 이렇게 친근하게 지낼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곧 지웠다. 녀석과 또래로 태어나 친근한 황제를 모시는 일도 나름의 재미일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루베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꽃내음 나는 길을 걸었다. 꽃다발을 갖고 싶어 하는 기색이기에 물어보았으나, 괜찮다고 몇 번을 사양하기에 그러려니 하고 굳이 떠안기지 않았다.

점심 식사를 하러 식물원 내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 이전에 제니가 고르지 않았던 메뉴를 먹어 보았다.

뼈가 잘 발라진 생선 살 위에 크림소스와 꽃이 소복하게 얹혀 나왔다. 전용 스푼 위에 생선 살과 꽃을 잘 얹어 입에 넣었다. 향긋한 풍미가 제법이었다.

루베르와 둘이 마주 보고 앉아 소란스럽지 않고 차분하게, 그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전에 루베르가 황가의 비사에 대해 이미 한 차례 털어낸 탓인지 서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도 놀랍거나 이상하지 않았다.

루베르는 에른하르트 가의 일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무척 궁금해했다.

제가 동생들을 자랑할 적에 어쩔 수 없이 팔불출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참을 수도 없고 참을 생각도 별로 없었다.

루베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더니, 미하엘도 아스델도 참 똑똑하고 재치 있는 아이들이라는 둥, 후에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둥 귀에 단 말을 늘어놓았다.

흐뭇하여 자꾸만 웃음이 났다.

요즈음 배우고 있는 고급 검술 수업의 이야기도 했다.

“이제 학기가 시작한 지 겨우 두 달인데, 벌써 합공의 기초가 선다는 것이 무척 신기합니다. 시어런 황가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합격술을 연마합니까?”

“아니, 이건⋯ 너무 기초적인 단계라서. 보통 시어런 아카데미에서 합격술의 기초에 대해서 배우고, 황실기사단에 입단하면⋯ 포지션을 지정해 준다고 들었어. 내가 알기로는 그래.”

“포지션?”

“우측 방위의 상대에 노련한 사람은 우측에 배치하고, 멀리 보는 사람은 후방에 배치하고⋯ 뭐 그런 식이겠지? 이건 기사단장과 단원들 모두가 면담과 실전 대련을 통해서 지정한다고 들었어. 그, 자세히는 모르지만 말이야.”

“허어.”

하기야 이미 정해져 있는 인원으로 협공을 한다면 언제 합격 상대가 바뀌어도 괜찮은 지금의 수업과는 또 다르게 운용하는 것이 마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던 것은 지금의 내가 새로운 배움에 지나치게 흥분하여 옳고 그름을 따져 가리지 못했던 탓임을 알아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기초를 쌓는 방안이라도 무척 대단한 방법이긴 했다.

바로 이번 주에는 드디어 모든 학생들이 어떤 조합으로도 합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속도가 더 느리거나 손발이 안 맞는 부분이 있기는 하였으나 겨우 두 달 만에 이뤄낸 성과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마엘로 샌슨에 대한 공경과 찬양으로만 하루를 꼬박 채우라고 하여도 쉬운 일이었다.

검술 수업에 대한 이야기도 루베르와 내가 서로 합이 잘 맞아,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하여 목이 쉽게 말랐다. 루베르가 내 몫의 에이드를 한 잔 더 주문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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