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서로서로 이름을 나누었다.
글로틴 테너의 동무인 올리버 컴바인은 나와 함께 비도술 수업을 듣는 선배이기 때문에 몇 차례 인사를 나눈 기억이 있었지만, 마리앤의 연인이라는 글로틴의 얼굴을 바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마리앤이 그렇게 빛이 나고 잘생겼고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나, 글로틴 테너 역시 시어런의 평균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머리 색은 맑게 갠 날 호수 빛처럼 푸르고 화사하여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겠다 싶었고, 그 눈동자는 짙은 녹색이었다.
눈은 둥그렇고 코가 높고 얼굴이 갸름했으나 그것을 다 모아 둔 것이 잘생긴 것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얼굴에 비해 큼지막한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안경알이 얇아 큰 눈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궁금한 마음이 커 그 얼굴을 뜯어보느라 글로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더니 마리앤이 냉큼 사이에 서서 시선을 막았다.
“왜 그렇게 봐요. 우리 오빠 닳아요.”
“무슨.”
“⋯마리, 아냐. 안 닳아⋯.”
글로틴 테너가 당황하여 마리앤의 소매 끝을 잡아 말렸다. 잠시 그 의미를 몰라 멀뚱히 서 있었더니, 웃음을 꾹꾹 눌러 참는 기색의 쉐이든이 내 소매를 잡아끌며 똑같은 어조로 장난을 쳤다.
“그러게 왜 그렇게 봐요. 미카 닳잖아요.”
“잘생긴 분들은 가만히 있는데 지킴이들만 열일하는 현장.”
“뭘 지킨다는 말이냐?”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아해들이 다들 크게 웃기에 나 또한 덩달아 웃긴 하였으나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나중에 쉐이든에게 따로 설명해 달라 해야겠다 여기며 의아한 마음을 눌러 참았다.
길바닥에 서서 마주 보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깝다 여길 무렵, 시간을 확인한 쉐이든이 서글서글한 어조로 두 선배에게 함께 식사할 것을 청했다. 음식점을 정해 두고 각자 살 것 사고 볼일을 보고 정해진 시간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낯선 사람을 어색해하는 제니도 마리앤의 연인에 대한 흥미가 앞섰는지 꺼리는 기색이 없었고, 마리앤이 영 글로틴과 떨어질 생각을 않는 것이 신경 쓰이기도 했기에 나 또한 크게 반기며 그러자 권했다.
두 소년과 헤어지고 난 뒤에 마리앤이 헤헤, 멋쩍게 웃으며 제 양 뺨을 손으로 폭 덮어 가렸다. 여전히 발그스름한 낯이 분을 칠한 양 화사했다.
“그렇게 좋아요?”
“으응⋯. 아, 다들 불편하지 않겠어요? 갑자기 제가⋯.”
“식사를 먼저 권한 건 전데요, 뭐. 테너 영식과 친해지고 싶기도 했어요.”
“테너 선배가 경영부셨던가요?”
“그렇죠. 성적도 꽤 좋다고 들었는데.”
쉐이든과 데미안이 살갑게 대답하며 마리앤을 달래 주었다. 마리앤은 몇 차례 심호흡하며 더운 마음을 달래다가 씩씩하게 주먹을 치켜들었다.
“우리 빨리 아티팩트 사러 가요!”
“네에ㅡ.”
싹싹하게 호응한 제니가 마리앤을 따라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나도 따라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옆의 소년들이 웃으며 지켜만 보기에 나 또한 짐이나 챙겨 들고 그 뒤를 따랐다.
* * *
아이들의 수가 많아 다 함께 둘러앉은 식탁이 큼지막했다.
흰 천이 깔려 있는 위로 요리를 담은 거대한 접시가 놓이고, 각자의 접시에 일부를 덜어 먹을 수 있도록 집게 따위를 두었다.
서로의 접시에 얹은 음식은 뒤로 하고 다들 저 궁금한 것을 묻느라 바빴다.
동무들이 글로틴 테너에게 궁금한 것을 묻고, 밥 한술 제대로 뜨지 못한 글로틴 테너가 음료로 목을 축이며 대답해 주고는 했다. 음식이 식어가는 것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꾸준히 식사를 하는 것은 나와 이반 둘뿐이었다.
경영학과 교수님들에 대한 질문이나 학과 수업에 대한 것들부터 시작된 질문들은 곧 글로틴 테너의 가족 관계나 친하게 지내는 벗들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곤란할 정도로 질문이 많은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받아 주는 이가 자상하고 꺼리는 기색이 없어 그냥 두었다.
“친구들⋯ 중에서는 아무래도 여기 컴바인 영식이랑 가장 가깝죠.”
“난 아닌데.”
“이렇게 말하면서도 저랑만 놀아요.”
올리버는 툴툴대며 대꾸하는 것이 묘하게 심기가 불편한 듯했다.
제게 시선이 가지 않는 것이 불만인 것인지, 저들끼리 노는데 엉뚱하게 끼어든 우리가 불편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원래 성품이 말도 많고 싫은 것도 많은 것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전에 수업 시간에 나와 어울릴 적에는 꽤 상냥한 성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쩐지 이상했다.
반면 글로틴은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서 지우지 않은 채, 제 옆에 달라붙어 싹싹하게 이것저것 음식을 챙겨 주는 마리앤을 사양하느라 바쁘면서도 꼬박꼬박 공손하게 굴며 대답을 이었다.
“태어난 해도 비슷하거든요. 올리버랑 저랑⋯. 다섯 살 생일 무렵에 놀이 친구로 처음 만나서, 지금까지 이어진 인연이죠. 하도 봐서 이제는 말 안 해도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알 수 있어요.”
“무슨 소리야.”
“그럼 지금은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마리앤이 눈을 빛내며 묻자, 글로틴 테너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글쎄요. 필로덴도르 영애가 예쁘다는 생각?”
“뭐야, 그건 글리 오빠 생각이잖아요!”
마리앤이 까르르 숨넘어가게 웃으며 글로틴의 팔뚝을 가볍게 내리쳤다. 나와 벤자민을 때리던 매운 손짓과 다르게, 툭, 나비 날갯짓처럼 어여쁜 동작이었다.
그 둘이 하는 짓을 흐뭇하게 보다가 문득 시선을 돌렸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올리버 컴바인의 낯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눈치챈 것은 나 뿐만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쉐이든이 곧장 말을 돌렸다.
그 덕분에 나는 글로틴 테너가 어릴 적부터 애완동물을 많이 길렀고, 지금도 본가에 여덟 살짜리 개 한 마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그 개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올리버 컴바인 또한 평소와 같이 이런저런 말을 더했다.
올리버는 글로틴이 어렸을 적에 책을 보는 것만 좋아하면서도 개를 위해 꼬박꼬박 정원에 나가 산책을 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풀어놓는 일화들이 모두 다정하여 조금 전 보았던 낯선 얼굴이 착각인가 싶었다.
유난히 오랜 시간이 걸린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아, 후식은 별도로 두고 디저트와 차를 추가로 주문하여 자리를 이었다.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두 선배와 동무들은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내가 제갈 아무개의 친우로서 모용연화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과 꼭 같았다.
우리가 아는 마리앤과 글로틴이 아는 마리앤의 모습을 비교하기도 하고, 글로틴을 시험하듯 짓궂은 가정을 하기도 했다.
글로틴은 어떤 질문에도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대답하는 모양만 봐도 참 똘똘한 놈이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두어 스푼 입에 물었던 제니가 방긋 웃으며 짓궂은 물음을 하나 더했다.
“그럼 둘이 결혼하겠네요?”
글로틴 테너가 곧장 대답하지 못한 첫 질문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의 정적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제니도 앗차 하고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글로틴 테너는 여전히 은은하게 웃는 낯을 하고 약간의 간극을 둔 뒤, 제니의 물음에 물음으로 대답했다.
“제니가 보기에⋯ 마리앤이 제 청혼을 받아 줄 것 같나요?”
“아, 미쳤나 봐, 진짜!”
곧장 마리앤이 비명을 닮은 소리를 내질렀다.
이번에 때린 것은 좀 아팠던지 글로틴이 아야, 아야 소리를 내며 마리앤에게 얻어맞았다. 그 하는 짓이 유들유들한 것이 안경 쓴 여우가 따로 없었다.
이런 소리까지 듣고 싶지 않았다며 아우성치는 아해들 사이로 나는 또다시 올리버의 표정을 살폈다. 그 또한 다른 아해들처럼 장난스럽게 찡그린 낯을 하며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괜한 오해를 한 것이 민망하여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밤이 한참 늦어서야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 두 대를 불렀다.
마리앤과 제니는 두 선배가 여자기숙사 문 앞까지 데려다 준다 하기에 따로 태웠다. 우리 몫의 마차에 올라 문을 닫자마자 데미안과 쉐이든이 눈을 마주치는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이거 괜찮나?”
“⋯아니, 모르겠는데.”
“뭐가 말이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쉐이든 대신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올리버 컴바인 선배 말이야. 좀 이상했던 것 같아서.”
“어떤 의미로?”
“그, 정확한 것은 아닌데⋯. 마리앤과 글로틴 선배 사이를 좀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 정도는 나도 알았다.
이전에 올리버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쉐이든에게 전했던 적이 있어 슬쩍 쉐이든을 바라보았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쉽게 눈치챈 쉐이든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세 가지 경우의 수가 있어.”
“어떤?”
“첫 번째. 올리버 선배‘도’ 마리앤을 좋아한다.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은근히 있는 일이거든. 진짜 운명인지는 결혼식장 들어가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잖아. 시어런 제국에서 이혼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건 차치하고서라도.”
“음.”
“두 번째. 글로틴 선배‘가’ 마리앤을 안 좋아한다. 이건 글로틴 선배가 유들유들하고 말을 너무 잘해서 생긴 오해일 수도 있는데⋯. 결혼 얘기 나왔을 때 말이야, 선배가 살짝 멈칫했잖아. 그런 걸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사람인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웃는 얼굴에 얼굴색도 안 변했고.”
“⋯으으음. 세 번째는?”
“세 번째는.”
쉐이든은 잠시 숨을 골랐다.
말없이 묵묵하게 듣고 있던 이반이 마차 창틀에 얹은 손에 턱을 괴고 몸을 숙여 주의 깊게 듣는 몸짓을 했다.
반면, 데미안은 깊은 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쉐이든 또한 데미안과 같은 자세로 입을 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일이 동시에 일어났을 수도 있어.”
“⋯하지만 마리앤 그 애는.”
“맞아, 글로틴 테너 영식을 좋아하지. 그것도 겉으로 보일 만큼 반짝반짝하게.”
묘하게 찜찜하단 생각은 하면서도 그 까닭을 몰랐던 나는 쉐이든의 해설을 듣고 어쩐지 체한 듯 불편한 기분이 들어 입을 열지 못했다. 그 후로 돌아오는 길 마차 안은 내내 조용했다.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에 데미안이 조언 한마디를 겨우 건넸을 뿐이었다.
“일단, 걱정은 하되 끼어들지 말자.”
다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