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야영 수업 과제물을 제출한 이후에는 시간을 잊고 살았다.
중원에서의 무도 수련이란 긴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자신을 닦고 깎아 나가는 과정이었기에 같은 행동을 우직하게 반복하는 일이 많았다. 하루 종일 몸을 험하게 써도 특별한 일이 없을 적에는 머릿속이 늘 맑고 고요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홀로 하는 수련과 운기조식을 빠뜨리지 않고, 매일 이어지는 수업에도 충실하게 몰두하며, 시험공부와 과제들을 전부 해치우는 동시에 말을 돌보고 있자니 중간중간 잊거나 놓치는 것이 더러 있었다. 정신이 혼곤했다.
이렇게 숨 가쁘게 살았던 적이 또 있었을까.
식사하는 시간이 아까워 간단히 샌드위치 따위로 끼니를 채우려다가 동무들에게 혼이 났다. 그러나 그들 또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나 이번에 유난히 경영 학술 수업을 많이 듣고 있는 쉐이든은 암기 과목이 많아 매일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 와중에 단비와 단비의 여자친구가 교정을 거닐며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어찌 저 아이들만 시간이 이렇게 남는 것인가 하여 부러운 탄식을 흘렸다.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는 것은 마리앤도 마찬가지였다.
이전의 시험 기간에 늘 그러했던 것처럼 퀭한 낯을 한 소녀는 반쯤 울상이 되어 책상에 엎드리면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흐으으윽⋯. 글리 오빠 보고 싶어요⋯.”
“보러 가면 되지 않습니까.”
“이 꼴론 못 가요⋯.”
“왜요.”
“못생겨서요⋯.”
“아니, 평소와 크게 다르지도 않은걸.”
“이럴 땐 평소처럼 예쁘다고 해 주세요, 미카엘.”
“평소처럼 예쁩니다.”
“진짜⋯. 너무 서럽다⋯.”
듣는 척도 하지 않을 것이면서 굳이굳이 말 한마디를 더 붙이는 것이 우습고 귀여워 칭얼거리는 것을 옆에 끼고 내 공부에나 몰두했다.
이번 학기의 중간고사도 1학기 시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 첫 주에 시험 범위를 알려 주고, 둘째 주는 휴강하고, 셋째 주에 시험을 본다. 이어지는 넷째 주는 시험 결과 확인과 성적 오류 정정, 문제 풀이와 해설 기간이다.
다만 야영 수업만큼은 매달 둘째 주마다 야영을 떠나도록 되어 있었다.
시험공부로 시들시들한 아이들은 지난달과 달리 먹을 것이 아니라 빼곡하게 정리한 노트들을 야영 가방에 꼭꼭 채워 넣은 채 길을 떠났다.
오가는 길에서라도 공부하는 것이 법도라 하여 나 또한 그렇게 했다.
이번 야영지가 늪지대 근처인 것이 퍽 다행이었다. 아이들이 가는 곳이라 그런지 늪 자체가 크고 위험하지 않았다.
작달막한 늪에 모여있는 약초들을 서둘러 채취하고, 싸 온 도시락을 데워 먹으며 넓은 자리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다 함께 공부를 했다.
우리 조뿐만 아니라 다른 조 아해들도 대부분 사정이 비슷했다.
같은 수업을 듣는 몇몇이 질의응답으로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책장을 넘겼다. 빼곡하게 하늘을 가린 나뭇가지들 안쪽으로 아해들의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돌아오는 길에는 같은 조를 이루어 걷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과목을 듣는 아해들끼리 한데 모여 걸었다.
나는 데미안, 쉐이든, 그리고 낯만 익힌 아티팩트 수업을 듣는 아해들과 함께 걸었다. 시험공부와 관련된 질답을 꼼꼼하게 듣자니 아카데미까지 돌아오는 길이 무척 짧게 느껴졌다.
그나마 나는 동무들에 비하면 여유 있는 편이었다.
오전 수업은 전부 마엘로 샌슨의 수업이기에 시험을 따로 보지 않았고, 더글라스 머스탱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시험을 보지 않았다. 야영 수업도 보고서로 대체하고, 제국의 계보 수업 역시 매번 보는 가벼운 쪽지 시험으로 족했다.
마법의 장비 아티팩트, 명마 예찬론, 실전 비도술 이렇게 세 과목만 중간고사를 보는데 심지어 실전 비도술은 10m 과녁을 맞히는 실전 시험만 치르면 됐다.
점차 낡아가는 아해들을 보면서 이번 학기의 내가 운이 참 좋았구나 싶었다.
다음 학기에도 시험을 치르지 않는 과목을 우선해서 들어야겠다 속으로 단단히 다짐을 했다.
* * *
중간고사를 무사히 치렀다.
데미안은 법학부에서 일등을 차지할 것 같다며 신이 났고, 제니 또한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받았다며 싱글벙글했다. 쉐이든과 벤자민 또한 그 내역은 자랑하지 않아도 씨익 웃는 낯이었다.
물약을 만들다 말고 다 같이 이마를 맞대고 가을 먹거리를 궁리했다.
가을.
흔히 가을은 먹을 것이 풍족해지는 계절이라고 하지만 난 여태 실감한 적이 없었다.
중원에 있을 적에는 계절을 막론하고 마을에 들를 적에는 소면에 만두를, 그럴 여유도 없을 적에는 육포와 벽곡단을 먹고 살았다.
간간이 안휘에 들를 적에는 본가에 앉아 여러 찬이 나오는 식탁을 받았으나, 매해 같은 때에 세가에 머무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음식에서 계절감을 읽기가 어려웠다.
시어런에 다시 태어난 이후로는 한겨울에도 푸릇한 채소와 향 나는 과실을 맛볼 수 있었다.
노지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 마법 온실에서 키워 낸 작물들이었다. 여름에도 딸기 타르트를 먹고 싶다 하면 그렇게 하고, 겨울에도 수박 빙수를 먹고 싶다 하면 찾아 먹었다.
내가 직접 요리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음식의 가격을 따져 물은 적도 없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익숙한 식자재와 낯선 식자재들이 아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고구마를 굽는다 밤을 굽는다 난리를 하다가, 무화과를 먹어야 한다 사과를 사 가자 속닥이는 말들이 모두 귀여웠다.
한참을 떠들어대던 아해들이 묵묵한 나를 돌아보며, 수업이 끝나자마자 야시장에 함께 나가자 하기에 그러마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것만 보이면 호들갑을 떨며 모두를 불러 쪼르르 모여 구경하던 것은 지난 학기의 일이다. 한 학기만큼 자란 아해들은 저들 나름대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물건을 골랐다.
먹을거리를 고르고 구입하는 것은 아해들에게 맡기고 그 뒤를 따라 걸으며 묵직한 봉투들을 하나씩 받아 들었다.
아해들의 씀씀이가 낙낙하여 저들 먹을 양을 훌쩍 넘겨 사는 것을 알아도 구태여 말리지 않았다.
결국 가져가서 구운 뒤에는 같이 수업 듣는 동무들에게 나누어 준다 어쩐다 하여 다 해치울 것을 알았다.
먼저 식료품상에 들러 수업 시간 중에 이야기가 나왔던 것들을 모조리 샀다.
시험 기간에 야영지에서 제대로 놀지 못한 것이 아쉬워 그 한을 풀어야 한다며 기운찬 목소리를 내는 것이 우스워 말리지 않았다.
고구마도 한 자루, 밤도 한 자루. 사과는 예쁘고 고운 것으로 고르고 골라 한 바구니. 묵직한 것을 내가 모조리 주워 드니 쉐이든이 저도 자루 하나를 갖고 가겠다 떼를 써 사과 바구니를 그 손에 쥐여 주었다.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포목점이었다.
이제 쌀쌀해질 것이고, 다음 달에는 숲으로 야영을 가니 포근하게 몸을 감쌀 것이 필요하다며 동무들끼리 맞추어 입을 망토를 고르는 데 시간을 많이 썼다.
내 보기에는 이것과 저것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도 푸른 검은색과 누런 검은색 사이에서 한참을 떠들어대는 모양새가 어지러웠다.
제니와 마리앤 뿐만 아니라 데미안과 쉐이든도 옷 고르는 데엔 일가견이 있다 보니 나 홀로 멀거니 서서 시간을 죽였다.
그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데미안이 날 잡아끌어 옆에 세워 물었다.
“미카엘이 보기에는 어때요? 이거, 이거, 이거 중에서요.”
“⋯뭐가 다릅니까?”
“이건 좀 더 도톰하고, 이건 짜임이 좋고, 이건 모두에게 색이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이거?”
“이유는?”
“그중에 가장 가벼운 것 같아서요.”
“와, 아무거나 고른 줄 알고 서운해하려고 했는데.”
“그러게요. 무게 중요하죠, 무게. 이걸로 살까요?”
와아 하고 아이들이 망토를 들었다 놓으며 그 무게를 따져 보았다.
체력이 좋지 않아 늘 비실대는 아해들이었다. 밤에는 보온 마법이 걸려 있는 침낭 안에 들어갈 것이니, 만약 더워 손에 들더라도 가벼운 것이 좋을 것 같아 꺼낸 말에 다들 동의하여 흐뭇하였다.
망토를 하나씩 손에 들고 필요한 아티팩트를 사러 가는 도중에 마리앤이 어! 큰 소리를 내더니 자리에 우뚝 섰다.
마리앤의 얼굴이 불을 켠 듯 환해지는 것을 보고 나 또한 시선을 멀리 두었다.
멀찍한 곳에서도 밝은 민트색 머리칼이 눈에 띄었다. 글로틴 테너, 그 녀석이었다.
마리앤은 망설이지 않고 그쪽으로 뛰었다.
도도도 달리는 녀석의 치맛자락이 발목께에서 꽃처럼 피어 나풀거렸다. 녀석을 알아챈 소년이 놀란 듯 크게 눈을 떴다가, 머뭇거리며 팔을 벌렸다.
폭 소리 나게 품에 안겨드는 마리앤 탓에 소년이 크게 휘청했으나, 그 등을 글로틴의 일행이 떠받쳐 넘어지지 않았다.
야영 수업을 함께 듣는 나와 아해들도 서로 눈짓 교환을 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마리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나올 줄 알았으면 연락할걸!”
“시험 끝나면 친구들이랑 논다기에,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으으응.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너무 좋다⋯.”
“공부한다고 못 만난다고 한 게 누군데.”
“전가요?”
“네, 필로덴도르 영애. 당신이요.”
주고받는 말들에 큰 의미가 담겨 있지 않아도 다디달았다. 서로 친근히 여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밝고 번쩍이는 머리 색을 한 청년이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할 때마다 마리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까르르 웃었다. 꽃망울이 톡 튀는 소리 같기도 하고,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같기도 했다.
글로틴 테너가 제 품에 안겼던 마리앤을 바로 서도록 도와주고 반걸음 물러나는 모습을 보고, 녀석의 하는 태도나 마음 씀씀이가 바른 것이 만족스러워 고개를 끄덕였다. 쉐이든이 웃는 소리가 짧게 귓전을 스쳤다.
“저는 안 보입니까?”
“아니, 컴바인 선배도 계셨네요. 전혀 몰랐는데.”
“뭐요?”
마리앤과 올리버가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며 그쪽으로 가까이 섰다.
그제야 마리앤이 앗차, 하더니 동무들과 연인을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뺨이 발갛게 상기된 것이 기쁨 탓인지, 아니면 민망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